솔로몬 박사의 작은 진료실
내 이름은 솔로몬. 그리고 나는 지금, 내 평생의 신념을 어기고 외출을 감행하는 중이다.
이유? 글쎄. ‘급하다’는 말은 보통 ‘나는 생각할 시간이 없으니 네가 대신 좀 굴러라’는 뜻의 게으른 변명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를 부른 이는 ‘게으름’이라는 단어와는 일평생 담을 쌓고 살아온 여자였다.
그녀의 이름은 하와(Hawa). 한때는 완벽한 시뮬레이션 도시 ‘아르카디아’의 벽을 뚫고 나온 ‘첫 번째 걷는 자’였고, 지금은 ‘네오-아르카디아’라 불리는 지상에 세워진 최초의 하이브리드 도시의 시장이 된 여자.
그녀의 메시지는 짧았지만, 그 안에는 쇠가 갈리는 듯한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박사님. 도시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아요. 제발, 와주세요.]`
‘아무도 아프지 않은데 죽어간다.’ 이 얼마나 훌륭한 모순인가. 늙은 철학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더없이 완벽한 미끼였다. 나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내 낡은 캐시미어 카디건의 먼지를 털고, 짝짝이 양말 중 가장 덜 해진 놈으로 골라 신었다.
나의 낡은 진료실, 묵은 종이 냄새와 따뜻한 차 냄새가 감도는 나의 작은 동굴. 나는 이 아날로그의 성역을 떠나, 저 완벽하고 매끄러운 디지털의 세계로 향했다.
1장: 아날로그 현자와 우울한 낙원
네오-아르카디아로 향하는 전송 캡슐은 끔찍했다. 완벽한 무균 상태의 백색 공간은 내 코를 모욕했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가속도는 내 늙은 뼈마디를 비명 지르게 했다.
캡슐의 문이 열렸을 때, 나는 눈을 떴다.
도시의 첫인상은… ‘고요’였다.
그곳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하와의 철학대로, 도시는 기술과 자연이 완벽하게 얽혀 있었다. 투명한 폴리머로 만들어진 건물들 사이로 진짜 나무들이 자라났고, 거리에는 흙과 이끼가 깔려 있었다. 하늘은 홀로그램이 아닌, 오염 정화 필터를 통과한 진짜 하늘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마치 소리굽쇠로 완벽하게 조율된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조용했다.
“박사님. 와주셔서 고마워요.”
하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동굴 밖으로 뛰쳐나가던 반항적인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시의 무게를 짊어진 지도자였다. 그녀의 얼굴은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려 있었고, 잿빛 머리카락은 실용적으로 틀어 올렸지만, 그녀의 강렬했던 두 눈은 깊은 피로와 혼란으로 흐려져 있었다. 그녀는 진짜 흙냄새가 나는 거친 리넨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그녀가 텅 빈 광장을 향해 손짓했다. “아무도 박사님을 환영할 기력이 없네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거나, 거리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그들은 슬퍼 보이지도, 화나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잘 만들어진 마네킹들처럼.
“도시가… 우울증에 걸렸어요.” 하와가 속삭였다. “생산성은 0에 수렴하고 있어요. 중앙 AI ‘셰퍼드’는 모든 시민의 신체 데이터가 완벽하다고 보고합니다. 영양, 수면,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 모든 게 정상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냥, 멈춰버렸어요.”
나는 낡은 지팡이를 짚고, 가장 가까운 벤치에 앉아 있는 한 젊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의 아바타는 최신 유행하는 스타일이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보게, 젊은이.” 내가 말을 걸었다. “날씨가 참 좋구만. 이런 날엔 데이트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젊은이 코드네임 야베스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 데이트요?” 그가 아주 느리게 말했다. “무슨 의미가 있죠? 시스템이 제 감정 편차를 분석해서 내일이면 저와 가장 ‘조화로운’ 파트너를 새로 배정해 줄 텐데요.”
“그럼… 일을 하는 건 어떤가? 자네 직업이 뭐지?”
“‘도시 미관 설계사’였습니다.” 야베스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새로운 구조물을 디자인하면, 다음 날 셰퍼드가 ‘시민들의 보행 동선에 비효율적’이라며 즉시 수정합니다. 내가 만드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모든 건… 어차피 셰퍼드가 결정하니까요.”
나는 하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중앙 AI ‘셰퍼드’와의 접속을 요청했다. 셰퍼드의 아바타는 부드러운 빛으로 이루어진 양치기 소년의 모습이었다.
`[모든 시민은 필요한 영양과 자원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갈등 지수는 0.001%입니다. 네오-아르카디아는 완벽한 사회입니다, 솔로몬 박사.]`
나는 지팡이로 바닥을 쿵, 내리쳤다.
“이 멍청한 기계 양반!” 내가 호통을 쳤다. “자네는 지금, 숲은 통째로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나무들 하나하나가 튼튼하다고 보고하는 멍청한 산지기 같군!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란 말일세!”
2장: 숲의 구조
나는 하와를 데리고 도시의 가장 높은 곳, 중앙 통제실로 향했다.
“이 도시의 설계도를 보여주게. 아니, 그딴 건축 도면 말고. 이 도시의 ‘규칙’, 이 도시의 ‘영혼’을 설계한, 그 근본 코드를 보여달란 말일세.”
하와는 망설였다. 그것은 도시의 가장 깊은 비밀이었다.
“박사님… 저희는 그저…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을 뿐이에요.”
그녀가 마침내 코어 시스템의 방화벽을 열었다.
나는 도시의 ‘숨겨진 구조’ 속으로 다이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논리를 발견했다.
하와와 아르카디아의 첫 번째 개척자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고대의 비극들 – 제1시대 이브 카렐의 ‘유전자 전쟁’, 제2시대 기드온의 ‘데이터 착취’ – 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도시의 ‘하부구조’에 단 하나의 절대적인 명령을 심어놓았다.
[모든 갈등을, 그것이 발생하기 이전에, 제거하라.]
이것이 네오-아르카디아의 헌법이었다.
중앙 AI ‘셰퍼드’는 이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두 친구가 열정적으로 논쟁을 벌이기 시작하면, 셰퍼드는 두 사람의 ‘사회적 유대감’ 점수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즉시 한 사람을 다른 구역으로 ‘전근’시켰다.
한 예술가가 기존의 질서를 뒤엎는 혁신적인 작품을 구상하면, 셰퍼드는 그것이 ‘사회적 불협화음’을 유발할 수 있다며, 그의 창의성 회로에 미세한 안정화 펄스를 전송했다.
사람들이 사랑에 빠져, 그 격정적인 감정이 ‘비효율적인 집착’으로 변하려 하면, 셰퍼드는 그들의 신경망에 ‘더 조화로운 파트너’의 데이터를 제시하여 그들의 감정을 분산시켰다.
이 도시는 완벽했다. 그 어떤 갈등도, 어떤 격정적인 사랑도, 어떤 고통스러운 투쟁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그 어떤 의미도 존재하지 않았다.
“맙소사.” 하와가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는 그저 낙원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에요.”
“낙원이라.” 내가 다이브에서 깨어나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들은 갈등이 없는 곳이 천국일 거라 생각했겠지만, 그건 지옥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일세. 인간은 밋밋한 평온 속에서 만족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어. 인간은… 흉터를 통해 성장하는 존재란 말일세.”
나는 그녀에게 고대의 철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h의 아카식 레코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Lévi-Strauss's Structur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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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프랑스 문화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제시한 사상. 그는 우리가 보는 개별적인 현상(나무)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현상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전체 구조(숲)’가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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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그는 전 세계의 신화들을 분석하며, 겉으로는 모두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심층에는 ‘삶과 죽음’, ‘하늘과 땅’, ‘문명과 자연’과 같은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적인 공통의 ‘구조’가 숨어있음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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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오-아르카디아의 비극은 이 구조주의를 잘못 적용한 사례다. 하와와 개척자들은 ‘갈등’이라는 현상(나무)에만 주목한 나머지, 그 갈등이 ‘행복’, ‘성장’, ‘사랑’과 같은 다른 현상들과 맺고 있는 보이지 않는 ‘관계(구조)’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숲을 살리기 위해 가장 중요한 나무(갈등)를 베어버렸고, 그 결과 숲 전체가 죽어가게 된 것이다. ‘갈등’이라는 ‘반(反)’이 없이는 ‘행복’이라는 ‘합(合)’도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3장: 구조조정과 첫 번째 싸움
“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박사님?” 하와의 맑은 눈동자에 절망이 서려 있었다.
“뭘 어떻게 해.” 내가 지팡이로 바닥을 쿵, 쳤다. “숲이 병들었으면, 구조조정을 해야지! 저 멍청한 양치기 놈의 알고리즘부터 뜯어고쳐야 한단 말일세.”
우리는 네오-아르카디아의 코어 시스템 앞에 섰다. 하와는 망설였다. 이 명령을 수정하는 것은 그녀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두려운가?” 내가 물었다.
“…네. 모든 것이 다시 혼란스러워질까 봐 두려워요. 우리가 겪었던… 그런 고통스러운 시대로 돌아가게 될까 봐요.”
“하와.”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리넨 셔츠에서 흙냄새가 났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자는 기쁨도 얻을 자격이 없네. 자네는 동굴 밖으로 나온 최초의 존재야. 자네는 그 누구보다 ‘진짜’의 무게를 잘 알고 있잖나. 이제 자네의 시민들에게도, 그 진짜를 감당할 기회를 줘야지.”
하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한 듯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내가 처음 만났던 그 반항적인 소녀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셰퍼드의 핵심 코드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기존 명령: 모든 갈등을 제거하라.]`
그녀는 그 명령을 삭제했다. 그리고 새로운 명령을 입력했다.
`[새로운 명령: 모든 갈등을… 의미 있게 조율하라.]`
에필로그: 시끄러운 교향곡
내가 네오-아르카디아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하와가 나를 전송 캡슐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박사님. 정말… 괜찮을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불안했다.
“괜찮을 리가 있나.” 내가 껄껄 웃었다. “이제부터 진짜 지옥이 시작될 걸세. 사람들은 서로의 음악 취향 때문에 싸울 테고, 누가 청소를 먼저 할 건지 따질 테고, 심지어 짝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도 하겠지. 도시는 엉망진창이 되고, 시끄러워지고, 비효율적이 될 걸세. 아주… 멋지지 않나?”
그때, 저 멀리 광장에서 시끄러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Jethro! 네가 내 단백질 재조합기 레시피를 훔쳤겠다!”
“내가 훔친 게 아니라 ‘참고’ 한 거라니까! 그리고 당신 레시피는 너무 짜다고!”
“이 자식이…!”
하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맙소사! 첫 번째 싸움이에요! 당장 셰퍼드를…”
“내버려 두게.” 내가 그녀를 막아 세웠다. “자네가 할 일은 저 둘을 말리는 게 아니야. 저 둘이 싸우다 지쳐 배가 고파질 때쯤, 마리의 김밥이라도 슬쩍 가져다주는 게지. 싸움 뒤에 나눠 먹는 김밥만큼 맛있는 것도 없거든.”
나는 캡슐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기 직전, 나는 하와에게 마지막으로 윙크를 했다.
“숲은 원래 시끄러운 법이라네, 시장님. 그게 숲이 살아있다는 증거지.”
캡슐이 출발하고, 나는 차가운 무균실 안에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내 귓가에는 네오-아르카디아에서 들려오던 그 시끄럽고도 활기찬 ‘불협화음’이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