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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아키텍처

by 김경훈


우리는 기억을 ‘저장’한다고 믿는다. 뇌라는 이름의 거대한 중앙 서버, 혹은 하드 드라이브 어딘가에, 과거의 경험들을 차곡차곡 데이터 파일로 보관한다고. 우리는 이 아카이브가 ‘연대순(Chronological)’으로 질서 정연하게 정렬되어 있으며, 필요할 때마다 정확한 ‘검색’을 통해 꺼내볼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만약, 기억이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재건축(Reconstructed)’되는 것이라면 어떨까.

만약 우리의 뇌가 완벽한 라이브러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증축되고 붕괴되며, 때로는 전혀 다른 시대의 자재들을 엉뚱하게 이어 붙여 만든, 기묘한 ‘아키텍처(Architecture)’라면.


어떤 방(15년 치의 시각 정보)은 화려한 빛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제는 문이 잠겨버렸다. 어떤 방(3년간의 공백)은 아예 설계도에서 누락되어,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암흑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방(그 이후의 20년)은 오직 소리와 촉각과 냄새라는 낯선 자재들로만 위태롭게 지어져,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그 구조가 변하고 있다.


기억은 ‘기록(Record)’이 아니다. 기록은 과거에 고정된 박제다. 그러나 기억은 ‘경험(Experience)’이다. 그것은 현재의 감각이라는 불꽃이 과거의 잊힌 화약고에 불을 붙일 때 비로소 폭발하는 살아있는 ‘사건(Event)’이다.


이것은 자신의 부서진 기억의 아키텍처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믿었던 한 남자가 아주 뜻밖의 ‘냄새’라는 이름의 열쇠를 통해, 잊혔던 방의 문을 열게 되는 어느 늦가을 저녁의 기록이다.



1. 20년 묵은 김장독


김경훈의 연구실은 늦가을의 낮은 햇살이 먼지 쌓인 책등 위를 비추며 고요함 속에 잠겨 있었다. 공기 중에는 갓 내린 케냐 원두의 짙은 산미와, 수천 권의 책(물론, 대부분은 그의 서버에 잠든 디지털 데이터 형태지만)이 내뿜는 묵은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는 지금, ‘연구 모드’의 가장 깊은 곳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의 주력 연구인 ‘정보 접근성’이나 ‘유니버설 디자인’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과거’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유쾌한 미소가 아닌, 복잡한 데이터베이스에서 원하는 값을 찾는 데 실패한 프로그래머의 깊은 짜증이 서려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개인 서버에 20년 가까이 보관해 온, ‘경훈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폴더를 뒤지고 있었다.

그의 ‘디지털 김장독’.

그가 10대 후반, 충주성모학교 시절부터,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독수리 타법으로 쳐 내려갔던 수만 개의 텍스트 파일들. 일기, 단상, 습작 소설, 심지어 신학교 입회를 준비하며 썼던 ‘라이프 스토리’의 초고까지.


그는 15살에 시력을 잃은 후, 모든 것을 기록했다. 시각을 신뢰할 수 없게 된 순간부터, 그는 이 ‘텍스트’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하고도 영원한 아카이브라고 믿었다. 화면낭독기가 읽어줄 수 있는 순수한 텍스트. 그것은 그의 가장 완벽한 기억 저장소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완벽한 시스템은 그를 배신하고 있었다.


“젠장….”

그가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초조하게 오갔다.

“F3, 검색. ‘충주’. 엔터. 1,200개 파일 검색됨. 아, 아니지. F3, ‘기숙사’. 엔터. 800개 파일. 이것도 아니야. 대체… 뭐라고 저장했더라?”


그는 분명히 기억했다. 17살 무렵,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겪었던 아주 중요한, 그리고 아주 유쾌했던 어떤 ‘사건’에 대해 그가 분명히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을. 그는 그날의 감각을, 그 성취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파일의 제목이 ‘기숙사의 추억.txt’인지, ‘친구들과.hwp’인지, 아니면 그저 ‘asdf.txt’였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20년 묵은 김장독은 잘 익은 묵은지가 아니라, 이름표도 없이 뒤죽박죽 쑤셔 박힌, 정체불명의 배춧잎 더미에 불과했다. 그의 완벽했던 ‘기록’은 ‘검색’이 불가능해지는 순간, 그냥 ‘쓰레기 데이터’가 되어버렸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뇌가 그 3년간의 공백기(Blank Period) 동안,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인덱싱(Indexing)’하는 방식마저 망가뜨려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서늘한 공포를 느꼈다.


“크응….”

그의 발치에서 이 모든 지적인 고뇌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안내견 탱고가 주인의 이 낯선 좌절감을 감지한 듯, 불편한 신음 소리를 냈다. 녀석은 거대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더니, 김경훈의 굳어버린 손등에 자신의 축축하고 따뜻한 코를 꾹 갖다 댔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일어나시죠, 주인님. 지금 당신이 붙들고 있는 건, 썩은 배춧잎입니다.’


김경훈은 탱고의 이 지능적인 ‘감정적 불복종’에, 결국 항복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서 ‘연구 모드’의 긴장이 풀리고, 유쾌함을 닮은 피곤하고도 자조적인 미소가 돌아왔다.

“알았어, 알았어. 가자, 인마. 네 말이 맞다. 이놈의 김장독은 오늘 밤 보보가 돌아오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검색 엔진으로 다시 돌려봐야겠어.”



2. 잊힌 키워드


그날 저녁 8시, 대구의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탱고가 먼저 꼬리를 치며 거실로 달려 들어갔다. 김경훈은 밖의 차가운 공기를 뒤로하고, 따뜻하고 익숙한 ‘집’의 아키텍처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멈춰 섰다.

그의 모든 감각이 예고 없이 날아든 하나의 강력한 ‘데이터 패킷’에 의해 압도당했다.


그것은 ‘냄새’였다.

달콤하고, 짭짤하며, 고소한. 끓는 간장과, 볶은 채소와, 그리고 식욕을 무자비하게 자극하는 참기름의 냄새.


“자기야? 왔어?”

주방에서 보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가 학회에 간 사이 그의 부모님 댁에 들러 ‘반찬을 좀 털어왔다’고 메시지를 보낸 참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반말로, 언제나처럼 장난기가 가득했다. “어머니가 당신 먹이라고 잡채를 산더미처럼 싸주셨어. 지금 데우고 있는데, 냄새 죽이지?”


‘잡채.’


그 단어와, 그 냄새가 김경훈의 뇌리에 꽂히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20년 묵은 김장독이 그가 하루 종일 찾지 못했던 바로 그 파일이 ‘쾅’ 하고 열렸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얼어붙었다.

그의 뇌가 현재의 감각(냄새)과, 과거의 기억을 격렬하게 ‘융합’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두 개의 다른 시간대를 동시에 살고 있었다.



2004년, 14살의 대구. 시력을 잃기 1년 전.

그의 생일날. 부엌에서 들려오는 어머니가 잡채를 볶는 ‘촤아악’ 하는 소리. 그는 몰래 주방에 들어가 뜨거운 잡채 면발을 손으로 집어 먹다 등짝을 맞았다.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마지막 생일의 ‘시각적’ 기억. 따뜻한 주황색 조명 아래,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갈색의 그 음식.



2007년, 17살의 충주성모학교. 시력을 잃고, 3년간의 공백 끝에 복학한 시절.

아무도 없는 주말 기숙사. 그와, 그처럼 집에 가지 못한 친구 두 명. 그들은 배가 고팠다. 그는 문득, 14살의 그 ‘맛’을 기억해 냈다. 그는 친구들을 이끌고, 기숙사 사감 몰래 반입한 작은 전기 포트에, 각자 식당에서 훔쳐 온 당면과, 간장과, 설탕과, 참기름을 몽땅 쏟아부었다.

‘야, 불 올려!’

‘넘쳐! 넘쳐, 이 자식아!’

‘냄새! 냄새 어떡해!’

전기 포트에서 끓어 넘친, 간장이 졸아붙고 당면이 눌어붙어 만들어낸 그 기묘한 ‘탄 맛’의 잡채. 그들은 그것을 낄낄거리며 손으로 집어 먹었다. 그것은 그가 17살에,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창조’해낸 최초의 ‘성공’이자, ‘승리’의 맛이었다.



그가 오늘 하루 종일 찾으려 했던, 그 ‘기숙사의 추억.txt’ 파일의 진짜 이름은 ‘잡채 레시피.txt’였다.


그는 깨달았다. 그의 ‘디지털 묵은지’는 실패하지 않았다. 그가 ‘키워드’를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키워드는 ‘논리’가 아니라, ‘냄새’였다.



3. 기억의 아키텍처 (Dialogue & Romance)


“... 자기야?”

그의 긴 침묵에, 보보가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어렸다.

“왜 그래? 냄새 맡고 체했어? 아니면… 어머니가 해준 거라 싫어?”


김경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그가 17살에 그 ‘잡채’를 완성했을 때 지었던 것과 똑같은 장난스럽고도 뿌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방금… 찾았어.”


“뭘? 잃어버린 식욕?”

“아니. 내가 하루 종일 찾던 그 20년 전 파일을. 이 냄새가… 이 냄새가 바로 그 파일의 ‘검색어’였어.”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앞치마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그 잡채 냄새가 났다.

“와… 보보. 당신, 진짜 대단한데. 내가 하루 종일 ‘경훈이’ 폴더에서 ‘기숙사’니 ‘추억’이니 하는 텍스트 기반 검색으로 찾지 못했던 걸, 당신은 ‘잡채 냄새’라는 이 완벽한 ‘후각 기반 검색’으로 단 1초 만에 찾아내 버렸네.”


보보는 그의 뜬금없는 칭찬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래는 거야, 또. 철학 박사 앞에서 주름잡기는.”


“아니, 진지하게.” 그는 그녀를 안은 채,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의 목소리는 그가 ‘연구 모드’로 전환될 때의 그 지적인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기억이 뇌에, 혹은 하드 드라이브에 ‘저장’된다고 생각해. 류… 아니, 어떤 작가들처럼 ‘디지털 김장독’에 잘 쟁여두면 안전하다고 믿지. 나도 그랬어. 내 20년 치 텍스트 파일. 완벽한 나의 아카이브. 하지만 오늘 그 아카이브는 완벽하게 실패했어.”


그는 잡채 한 젓가락을 입에 넣었다. 14살의 맛과, 17살의 맛, 그리고 지금 30대 후반의 맛이 혀 위에서 뒤섞였다.

“그건 그냥 ‘기록(Record)’일뿐, ‘기억(Memory)’이 아니었던 거야.”


“기록이랑 기억이 뭐가 다른데?” 보보가 그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또 그 소설 같은 궤변 시작이네.”


“완전히 다르지!” 그가 신이 나서 받아쳤다. “기록은 차가운 데이터야. 논리적이고, 질서 정연하지만, 내가 ‘검색’ 하기 전까진 죽어있어. 15년 전의 내 시각적 기억도 마찬가지야. 그건 그냥… 멈춰버린 ‘이미지’의 무덤이야. 아무리 생생해도, 그건 ‘과거’ 일뿐이지.”


그는 보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기억’은… 지금 이 냄새처럼, 살아있는 거야. 그건 데이터가 아니라, ‘경험’ 그 자체지. 그건 내가 검색하는 게 아니라, 저쪽에서 나를 ‘호출(Callback)’하는 거야.”


그는 자신의 ‘판타지 모드’ 스위치를 켰다.

“내 디지털 아카이브가 죽은 드래곤이 지키는 보물 창고라면, 이 잡채 냄새는… 그 창고 문을 여는 유일한 ‘마법 주문(Spell)’ 같은 거라고.”


그는 자신의 3년간의 공백을 생각했다.

“내 뇌는 3년 동안 멈췄었어. 그 기간의 하드 드라이브는 그냥 텅 비어있지. 하지만 15살 이전의 ‘기억’과, 18살 이후의 ‘기억’은 오늘 이 잡채 냄새 하나로… 그 3년의 공백을 가볍게 뛰어넘어, 그냥 ‘지금’ 이 순간에 다시 연결 돼버렸어. 내 기억의 아키텍처는… 연대순(Chronological)이 아니었던 거야. 그건… ‘감각순(Sensory)’, 혹은 ‘주제순(Thematic)’으로 묶여 있었던 거지.”



4. 감각의 아카이브


보보는 자신의 철학적 지식이 아닌, 그저 어머니에게서 얻어온 반찬 하나가 그의 복잡한 내면의 지도를 완성하는 열쇠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묘한 기쁨을 느꼈다. 그녀는 김경훈이라는 이 남자가 세상의 그 어떤 철학책보다도 더 깊고 복잡한 텍스트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잡채 속의 버섯 하나를 집어,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럼,” 그녀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이 ‘마법 주문’ 좀 더 드셔보시죠, 엘리야 박사님. 당신의 그 15년 치 시각 데이터베이스랑, 지금 이 2025년의 후각 데이터베이스가 잘 융합되는지, 내가 ‘검증’해봐야겠어.”


김경훈은 그녀가 주는 잡채를 받아먹으며 환하게 웃었다.

“검증 완료. 완벽하게 호환되네. 오히려… 14살 때 먹었던 것보다 더 맛있는데.”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젓가락을 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

“그래서 말이야. 내 기억이 그렇게 감각으로만 작동하는 거라면….”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당신이라는 이 ‘존재’는… 내 아카이브에서 대체 무슨 폴더에 저장해야 할지 모르겠어. 당신 냄새, 당신 목소리, 당신 손의 감촉, 당신의 그 엉뚱한 철학적 궤변들… 이건 뭐, 분류 자체가 불가능한, 너무 거대한 데이터잖아.”


보보는 그의 말에,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럼… ‘최상위 루트(Root)’에 그냥 둬, 이 바보야. ‘보보’라는 이름의, 독립된 운영체제로.”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 향기와, 그녀의 피부에서 나는 ‘떼 누아’의 잔향이 그의 모든 기억을 ‘지금, 여기’로 불러 모으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가진 가장 확실한 ‘현재’였다. 이것은 ‘기록’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쓰이고 있는 ‘삶’ 그 자체였다.



5. 주석: 묵은지의 미학



‘제목: 기억의 아키텍처, 혹은 묵은지의 배신.

우리는 ‘기록(Record)’을 ‘기억(Memory)’이라 착각한다. 20년간 모은 나의 ‘디지털 김장독’은 오늘 30년 묵은 잡채 냄새 하나에 완벽하게 패배했다.

기록은 차가운 데이터다. 그것은 ‘검색’되어야만 존재한다. 그러나 기억은 따뜻한 ‘경험’이다. 그것은 나를 ‘호출’한다.

나의 15년 치 시각적 기억은 그 자체로는 박제된 나비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 보보가 가져온 잡채의 ‘냄새’라는 핀이 그 낡은 기억을 현재라는 지도 위에 다시 꽂아주었다. 나의 3년 공백(Blank)은 냄새 하나로 가볍게 뛰어넘어졌다.

결론: 나의 기억의 아키텍처는 ‘논리(Logic)’가 아니라 ‘감각(Sense)’으로 지어져 있다. 뇌는 잊어도, 몸은 기억한다. 15살의 나는 보보가 데워준 2025년의 잡채 냄새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잠든 이 따뜻한 ‘온기’와 ‘향기’. 이것이야말로, 내일의 내가 결코 잊지 못할, 지금 이 순간의 가장 강력한 ‘기록’이다.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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