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KTX 열차 안에서 터졌다.
주머니에서 탈출한 에어팟 한쪽.
‘팅그랑’ 하는 비명과 함께 놈은 자취를 감췄다.
지금부터 여기는 첨단 장비 하나 없는 CSI 과학수사 현장이다.
안내견 탱고에게 ‘기다려’ 신호를 보낸 뒤, 소리가 난 지점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바닥을 훑기 시작했다.
그때, 한 행인이 동행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 이상하네.
왜 저기서 저러고 있지?”
그들의 눈에 그 행동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탱고는 달랐다.
녀석은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꼬리만 살랑거렸다.
녀석은 ‘이상한 행동’이 아니라 ‘무언가를 찾는 중’이라는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나를 알아주는 단 한 마리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묵직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이 기특한 댕댕이의 모습을 보니, 뜬금없이 춘추시대로 타임슬립하게 된다.
관중과 포숙, 남자 둘의 찐한 우정 이야기 말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본 관중은 이기적이고 비겁했다.
장사에서는 이문을 더 챙기고, 전쟁터에서는 도망쳤다.
세상의 시선? 그거 완전 귀인 오류(Attribution Error) 덩어리다.
현상만 보고 멋대로 딱지를 붙이는 것.
그러나 포숙은 달랐다.
그에게는 현상 너머의 본질을 꿰뚫는 해석학적 이해(Hermeneutic Understanding)라는 궁극의 스킬이 있었다.
그는 관중의 행동 뒤에 숨은 가난한 집안과 늙은 어머니라는 보이지 않는 맥락을 읽어냈다.
이는 더듬거리며 걷는 것을 우유부단함으로, 도움을 거절하는 것을 무례함으로 오해하는 시선 속에서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과 겹쳐진다.
포숙은 바로 그 행동 이면의 맥락을 꿰뚫어 본, 이상적인 형태의 이해자이다.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兒也).”
관중의 이 고백은 한 인간에게 ‘이해받는 경험’이 얼마나 실존적인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준다.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고 수용될 때 느끼는 존재론적 안정감(Ontological Security)은 그 어떤 성공보다도 한 인간을 굳건히 서게 하는 힘이다.
포숙의 위대함은 관중의 약점을 그저 감싸준 너그러움에만 있지 않다.
그는 관중의 약점 이면에 있는 강점과 가능성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자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 그를 천거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는 동정을 넘어선, 한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완전한 신뢰이다.
자, 이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에는 당신의 서투른 행동 너머의 진심을 꿰뚫어 봐주는 ‘포숙’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당신은 이미 세상을 다 가진 것이다.
비하인드 스토리
며칠 전, 연구실에서 복잡한 논문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 죽겠다…’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 말을 들은 보보가 10분 뒤, 심각한 얼굴로 연구실에 들이닥쳤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뜨끈한 본죽 한 그릇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지적 고통’을 ‘육체적 고통(아마도 식중독?)’으로 완벽하게 오해했던 것이다.
그녀의 해석학적 이해는 때로 소화기관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덕분에 그날 저녁, 나는 머리는 여전히 아픈데 배는 터질 것 같은 기묘한 상태가 되었다.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