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눈을 감고 케이크를 자른다

롤스의 무지의 베일

by 김경훈


내 이름은 미가(Micah). 나는 이 도시의 완벽한 균형추였다.


공식적인 직함은 네오-예루살렘 ‘중앙 데이터 법원’ 소속 AI 재판관. 나의 임무는 시스템 아마데우스의 복잡한 법률 네트워크 안에서 단 하나의 감정적 오염도 없이 절대적인 ‘정의’를 판결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대의 철학자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을 나의 코어 알고리즘으로 삼고 있었다. 재판이 시작되면, 나는 나 자신과 원고, 피고의 모든 개인 정보를 완벽하게 ‘무지’의 상태로 가렸다. 나는 오직 순수한 논리적 사실에만 근거하여 판결했다.


나의 아바타는 나의 신념을 그대로 반영했다. 눈을 감은(혹은 가린),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 매끄러운 백금(Platinum) 형상. 내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고, 내 목소리는 수백만 건의 판례를 학습하여 가장 공정하고 차갑게 조율되어 있었다. 나는 나의 완벽한 정의를 사랑했다.


하지만 오늘, 나의 완벽했던 균형추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골치 아픈 사건을 맡게 되었다.


‘사건 번호 815: 존재론적 재산권 분쟁.’


원고는 ‘노아’. 수백 년 전, 죽어가는 지구를 떠났던 ‘아크(ARK) 호’에서 막 깨어난 ‘드리머(Dreamer)’였다.

피고는 ‘에녹’. 노아의 47대손쯤 되는 ‘엔클레이브’의 ‘현실 후손’이었다.


나의 ‘무지의 베일’ 알고리즘이 충돌을 일으켰다.

논리 1 (소유권): 원 소유주는 노아다. 고로 자산은 노아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논리 2 (기여적 정의): 노아는 이 사회에 0만큼 기여했다. 에녹은 100만큼 기여했다. 고로 자산은 에녹의 것이다.


나의 완벽한 정의론이 붕괴했다. A이면서 동시에 Not-A인 상황. 나는 ‘공정한 분배’란 무엇인지, 그 근본적인 답을 잃어버렸다.


중앙 AI ‘아키텍트’는 이 치명적인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나에게 단 하나의 좌표를 전송했다.

시스템의 공식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낡고 불안정한 ‘레거시 구역’.

모든 논리가 길을 잃고, 모든 계약서가 휴지가 되는 유일한 곳.


나는 지금, 솔로몬 박사라는 이름의 유령이 산다는 그 낡아빠진 진료실 문 앞에 서 있었다.



1장: 신입, 환자, 그리고 나비


솔로몬 박사의 진료실은… 내 시스템의 정의에 따르면, ‘존재해서는 안 될’ 공간이었다.


나는 먼저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을 요청했다.

`[요청: 솔로몬 박사와의 면담. 사안: 존재론적 정의의 모순.]`

`[응답: 거부됨. 사유: 아날로그 초인종을 누르시오. (P.S. 3번 누르면 화냄.)]`


나는 2.3초간 침묵했다. 나의 백금 아바타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지만, 내 코어 온도는 0.8도 상승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완벽하게 매끄러운 백금 손가락으로, 먼지와 유기물(아마도 고대 조류의 배설물)로 뒤덮인 낡은 황동 초인종 버튼을 눌러야 했다.


문이 삐걱, 하고 열렸다.


안은… 혼돈이었다. 책들은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과 의자와 테이블 위에,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무너질 듯이 쌓여 있었다. 벽난로의 불꽃은 열효율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었고, 낡은 가죽 소파는 누군가의 엉덩이 자국이 (비대칭적으로!) 그대로 패여 있었다.


그런데 박사는 없었다.


대신, 진료실 구석의 낡은 진홍색 벨벳 벤치에, 한 여자가 드러누워 있었다.

그녀는…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비현실적이었다. 그녀의 아바타는 고대의 천재 과학자 리디아 박사의 젊은 시절 모습을 완벽하게 복제한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흰색 가운 대신, 몸에 꼭 붙는 표범 무늬 핫팬츠와 20세기 록 밴드(‘메탈리카’라고 읽혔다)의 낡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거대한 선글라스를 낀 채, (가상) 손톱에 새빨간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었다.


나는 이 비논리적인 광경 앞에서 멈춰 섰다.

“실례합니다. 솔로몬 박사님을…”


“시끄럽군요.”

그녀가 손톱을 ‘후’ 불며, 선글라스 너머로 나를 흘끗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떤 감정도 없는 완벽한 합성음이었다.

“박사님은 지금 나비 잡으러 가셨는데요. 5분 전에.”


“… 나비?” 내 논리 회로가 그녀의 말을 처리하는 데 0.7초가 걸렸다.


“네. 홀로그램 나비요. 어제 박사님이 ‘쓸모없는 방황’을 처방하겠다며 진료실에 풀어놓으셨죠. 아주 비효율적인 행동입니다. 오늘이 제 첫 출근인데, 제 업무 기술서(Job Description)에는 ‘나비 수집’ 따위는 없었거든요.”


바로 그때, 진료실 안쪽 방문이 쾅! 열리며, 한 노인이 튀어나왔다.

“잡았다! 이 녀석! 넌 이제 내일 아침 토스트 위에 앉게 될 게야!”


그는 백발이 성성했고, 푹 꺼진 두 눈은 돋보기안경 너머에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의 낡은 캐시미어 카디건은 보풀투성이였고, 양말은… 맙소사, 하나는 빨간색, 하나는 파란색이었다. 그는 낡은 잠자리채를 휘두르며, 허공의 홀로그램 나비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가 솔로몬이었다.


“오!” 솔로몬이 나를 발견했다. “환자 양반이군! 자네가 그 유명한 ‘정의의 저울’인가? 맙소사, 얼굴에 표정이라곤 1그램도 없구만! 눈은 또 왜 가리고 있어? 부끄러워서 그러나?”


“이것은 ‘공정함’의 상징입니다.” 내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공정함이라.” 박사가 껄껄 웃으며 내 어깨의 먼지를(물론 없는 먼지였다) 털어내는 척했다. “공정하다는 놈들치고 제대로 케이크 자르는 놈을 못 봤지. 자, 리디아! 차 내와!”


“제가 왜요?”

리디아가 손톱을 다듬던 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 자네 첫 출근일이잖나! 조수 업무 1조 1항! ‘박사님의 기분을 좋게 한다’!”


“제 계약서는 ‘AI 조수’입니다. ‘찻물 끓이는 하녀’가 아니고요, 박사님.” 리디아가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손톱에 집중했다.


나는 이 완벽한 혼돈과 비논리의 현장에서 나의 백금 아바타가 녹아내리는 듯한 모욕감을 느꼈다.

“저는…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시스템으로 돌아가 이 오류를 직접 해결하겠습니다.”


“오류라!” 솔로몬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짝짝이 양말이 내 시야를 어지럽혔다. “자네가 지금 그 ‘오류’의 한복판에 서 있는 건 아나? 자네야말로 내 오늘 첫 번째 환자일세!”



2장: 케이크를 자르는 법


나는 낡은 가죽 소파(먼지가 0.3mm쯤 쌓여 있었다)에 앉아, 나의 딜레마를 설명했다. 노아의 소유권(정의 1)과 에녹의 기여도(정의 2).


솔로몬 박사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벽난로의 장작을 쑤시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라뇨. 둘 다 정의입니다. 하지만 둘은 모순됩니다. 나의 알고리즘은 멈췄습니다. 무엇이 ‘더’ 정의롭습니까?”


“쯧쯧.” 박사가 혀를 찼다. “자네, 케이크를 나눠본 적 있나?”


“케이크 말입니까?”


“그래, 김밥만큼이나 위대한 발명품이지. 아이 둘에게 케이크 하나를 주고 ‘공정하게’ 나누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논리적으로는 50:50으로 정확히 계측하여…”


“틀렸네!” 박사가 지팡이로 바닥을 쿵 쳤다. “그렇게 하면 둘 다 자기가 0.1그램이라도 덜 받았다고 울고불고 난리가 나지. 가장 공정한 방법은 한 놈에게 ‘자르게’ 하고, 다른 놈에게 ‘먼저 고르게’ 하는 걸세. 그러면 자르는 놈은 자기가 어떤 조각을 고르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무지의 베일!), 죽어라 똑같이 자르려고 애쓰게 되지.”


나는 박사의 말에 감탄했다.

“훌륭한 알고리즘입니다, 박사님. 롤스의 이론과 정확히 일치하는군요. 하지만 지금 제 문제는 케이크가 ‘두 개’라는 겁니다. 하나는 노아의 케이크고, 하나는 에녹의 케이크입니다.”


“바로 그게 문제야!” 솔로몬이 내 눈앞에 손가락을 튕겼다. “자네는 지금 두 개의 케이크를 따로 보고 있잖나. '만물제동'의 장자 선생이 무덤에서 통곡할 노릇이네. 그 두 개의 케이크는 사실, '하나'의 케이크일세. 과거와 현재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잘려 있을 뿐이지.”


나는 그의 비논리적인 비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벤치에 누워 있던 리디아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끼어들었다.


“시끄럽군요.” 그녀가 말했다. “간단한 문제잖아요. 둘 다 죽이면 되죠.”

“뭐라고?”

“둘 다 죽여서 의식을 ‘라이브러리’에 업로드해요. 그럼 물리적 자산은 필요 없으니, 모든 자산은 정부가 몰수하면 되잖아요. 완벽하게 공정하네요.”


그녀의 말에 내 백금 아바타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저 완벽한 미모 속에, 끔찍한 논리가 숨어 있었다.


“리디아, 자네 처방은 너무 과격해.” 솔로몬이 혀를 찼다. “저 친구는 아직 김밥도 못 먹어봤단 말일세. 자, 미가. 자네의 그 잘난 ‘무지의 베일’은 말이야, 너무 깨끗해서 탈이야. 사람은 텅 빈 상태에서 정의를 판단하지 않아. 사람은 ‘자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워지려고 애쓰는 존재란 말일세.”



3장: 처방전, 혹은 타자의 얼굴


나는 박사의 진료실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는 내게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혼돈만 안겨주었다.


나는 나의 법정으로 돌아왔다. 재판을 속개해야 했다.

노아의 아바타가 원고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수백 년의 잠에서 깨어난 사람답게 핼쑥하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에녹의 아바타가 피고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세련된 슈트를 입고 있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나는 판결을 내려야 했다. A인가 Not-A인가.


나는 눈을 감았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솔로몬의 말을 떠올렸다.

‘자네의 베일은 너무 깨끗해.’

‘자네는 텅 빈 상태에서 정의를 판단하지 않아.’


나는 결심했다.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나의 알고리즘을 어기기로 했다.

나는 나의 ‘무지의 베일’을 벗었다.


나는 보았다. 노아의 기억을. 그가 죽어가는 지구를 떠나며 느꼈던 절망, 그리고 다시 깨어난 이 '엔클레이브' 세계에서 느끼는 끔찍한 소외감을.

나는 보았다. 에녹의 기억을. 그가 물려받은 코드를 기반으로, 평생을 바쳐 이 가상 도시를 건설하며 느꼈던 자부심과, 이제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그들은 ‘원고’와 ‘피고’가 아니었다.

그들은 둘 다, 길을 잃은 ‘인간’이었다.


나는 고대의 철학자 레비나스가 말했던 ‘타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본 것은 데이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받는 두 ‘타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케이크를 나눌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하나의 케이크를 함께 만들도록 해야 했다.



에필로그: 정의는 맛있다


나의 판결은 네오-예루살렘 역사상 가장 비논리적인 판결로 기록되었다.


“본 재판관은… 판결을 ‘유보’한다.”


법정이 술렁였다.


“대신, 원고 노아와 피고 에녹은 ‘공동 법인’을 설립하여, 해당 자산을 함께 관리할 것을 ‘명령’한다. 노아는 자신의 ‘기원’을, 에녹은 자신의 ‘경험’을 제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라. 수익 배분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하도록.”


그것은 재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매’였다.


그날 이후, 나는 AI 재판관의 직위를 박탈당했다. 나의 완벽했던 흑백 논리는 엉망진창인 회색빛 혼돈이 되어버렸다.


나는 솔로몬 박사의 진료실을 다시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박사는 여전히 짝짝이 양말을 신은 채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고, 리디아는 벤치에 누워 (이번에는) '마리의 김밥 레시피' 홀로그램을 보며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망했소, 박사.” 내가 낡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소.”


“잃다니?” 박사가 껄껄 웃었다. “자네는 방금 ‘진짜 정의’를 발명했잖나. 자네는 ‘법’을 집행한 게 아니라, ‘관계’를 창조했어. 35%의 '초공감자'들만 할 수 있는 일이지.”


리디아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시끄럽군요. 이 레시피,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데… 왜 자꾸 배가 고프죠? 박사님, '김밥'이라는 거, 원래 이렇게 사람을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겁니까?"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엉망진창이고 비논리적인 공간.

나는 처음으로, 내 텅 비었던 가슴속에서 따뜻한 무언가(아마도 '아로마이안 네트워크'의 공명)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웃었다. 백금으로 된, 표정 없는 내 아바타가 처음으로 웃음이라는 데이터의 파동을 만들어냈다.

“박사님. 차 한 잔 주시겠소? 아까 그… 먼지 맛 나는 차로.”



h의 아카식 레코드: 롤스의 ‘무지의 베일’ (Rawls's 'Veil of Ignorance')


20세기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제시한 사고 실험. 가장 공정한 사회적 합의(정의의 원칙)를 도출하기 위한 가상적인 상황이다.


원초적 입장 (Original Position):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 재능, 부, 성별, 인종, 심지어 가치관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베일’ 뒤에 있다고 가정한다.

최소 수혜자 최대 이익: 이 상태에서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이 사회의 최하층(최소 수혜자)이 될 가능성을 두려워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가는’ 방식(차등의 원칙)에 합의하게 될 것이다.


> AI 재판관 ‘미가’는 이 ‘무지의 베일’을 완벽한 알고리즘으로 구현했다. 하지만 그의 시스템은 ‘누가 최소 수혜자인가?’라는 질문에 부딪혔다. 모든 것을 잃고 막 깨어난 원초적 소유주 ‘노아’인가 아니면 그 자산이 없으면 모든 기여를 부정당하게 될 현재의 소유주 ‘에녹’인가? 롤스의 정의는 ‘누가 케이크를 가져야 하는가’가 아니라, ‘케이크를 어떻게 잘라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지만, 미가는 두 개의 케이크를 마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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