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이데아
AI 재판관 미가는 솔로몬 박사의 진료실에 눌러앉은 지 며칠이 지났다. 그는 공식적으로 직위가 박탈된, 시스템의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이제 낡은 가죽 소파(그는 이곳의 먼지 입자 밀도를 0.3g/m³로 계산했다)에 앉아, 박사의 비공식 조수 겸 환자로 지냈다.
진료실의 공기는 여전히 황갈색 노을빛과 퀴퀴한 종이 냄새, 그리고 희미한 찻잎 냄새로 혼탁했다.
“미가 자네는 아직도 ‘정의’라는 케이크가 둘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하나?”
솔로몬 박사가 벽난로 앞에서 불을 쑤시며 물었다. 그의 짝짝이 양말(오늘은 보라색과 녹색 줄무늬)이 불꽃 앞에서 묘하게 흔들렸다.
미가는 자신의 백금 아바타를 들어 올렸다.
“저는 이제 케이크를 자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박사. 대신, 케이크를 함께 만들도록 ‘명령’했죠. 그것이 ‘관계’의 정의라고… 배웠습니다.”
“하하하! 잘 배웠네! ‘공동 법인’이라니! 자네, 아주 교묘한 친구야! 하지만 자네가 만든 그 ‘관계’도 결국, 또 다른 ‘정의’의 그림자일 뿐이야.”
박사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때였다. 낡은 황동 방울이 '딸랑-' 하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소리를 냈다.
새로운 환자였다.
1장: 그림자를 그리는 자
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미가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야곱(Jacob). 그는 ‘공감의 연대’의 핵심 멤버이자, 한때 ‘엔클레이브’에서 가장 위대한 ‘드림 페인터’로 불렸던 사내였다. 그의 손끝에서 '시스템 아마데우스'가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저녁노을과 가장 생생한 꿈이 태어났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텅 비어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푸석했고, 그의 아바타는 마치 채도가 낮은 필터에 갇힌 듯 희미했다. 그의 손에는 낡은 스타일러스(Stylus) 펜이 들려 있었지만, 그가 허공에 띄운 홀로그램 스케치북은 새하얀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눈은 진료실의 그 무엇도 담고 있지 않았다. 마치 모든 색깔이 바랜, 오래된 사진 같았다.
“야곱.” 미가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은 ‘아키텍트’의 보호 아래 있는 ‘루시드 드리머’가 아닙니까? 이곳은 시스템의 영역 밖입니다.”
야곱은 미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진료실 벽에 걸린 낡은 태피스트리, 즉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직물 무늬에 고정되어 있었다.
“미가.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소.”
“당신은 ‘드림 페인터’입니다. 그릴 수 없을 리가 없습니다. 당신의 알고리즘은….”
“내 알고리즘? 내 알고리즘은 이제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소.”
야곱의 목소리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폐허가 된 도시의 메아리 같았다.
솔로몬 박사가 벽난로 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돋보기안경 너머로 장난기 어린 빛이 스쳤다.
“오호, 이데아를 발견했구만, 이 친구! 자네, 빨간 약을 너무 많이 먹었어.”
벤치에 누워 있던 리디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번에는) ‘김밥 맛있게 먹는 법’ 홀로그램을 껐다. 그녀의 표범 무늬 핫팬츠가 희미한 노을빛을 받았다.
“빨간 약이라뇨, 박사. 이 사람은 ‘루시드 드리머’입니다. ‘엔클레이브’가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유일한 ‘드리머’죠. 일종의… 깨어 있는 죄수라고나 할까요.”
“죄수라. 딱 맞는 표현이군.” 박사가 껄껄 웃었다. “자네, 야곱. 그래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고? 가짜 세계에서 그리는 가짜 그림이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무의미합니다. 박사.” 야곱이 낡은 스타일러스 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묵직한 소리가 진료실을 울렸다. “내가 아무리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그려낸들, 그것은 결국 ‘아키텍트’가 설정한 데이터 시뮬레이션의 일부일 뿐입니다. 내 눈에 비치는 이 모든 풍경, 내 손으로 만지는 이 모든 질감, 심지어 내가 느끼는 이 허무함조차도… 어쩌면 ‘아키텍트’가 심어놓은 코드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진짜입니까?”
2장: 의미의 해독사
솔로몬 박사는 야곱의 말에 한참을 침묵했다. 그는 벽난로의 불꽃을 응시했다. 미가 역시 야곱의 딜레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알고리즘이 ‘현실’의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다면, 나의 ‘정의’는 과연 유의미할까?
“자네, 야곱. 자네가 그리던 저녁노을은 그 그림자가 아름다웠나?”
박사가 갑자기 물었다.
“아름다웠습니다. 박사. 나의 스타일러스는 그 어떤 진짜 노을보다 생생한 색채와 감동을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린 노을 앞에서 울고 웃었죠. 그들은 그것이 진짜라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충분하네!” 박사가 지팡이로 바닥을 쿵 쳤다. 그의 짝짝이 양말이 다시 한번 펄럭였다. “자네는 지금 이데아와 그림자를 억지로 분리하고 있어. ‘만물제동’의 장자 선생이 무덤에서 통곡할 일이네.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림자가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지. 오히려 그림자가 아름답다면, 이데아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할 걸세.”
“하지만… 결국 허상 아닙니까?” 야곱이 힘없이 물었다. “내가 아무리 진짜처럼 그려도, 그것은 시스템 속의 데이터일 뿐, 진정한 실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실체? 실체가 뭔데? 자네가 지금 이 진료실에서 느끼는 이 벽난로의 온기, 공기 중의 먼지 냄새, 낡은 가죽 소파의 질감… 이것들은 진짜인가?” 박사가 야곱을 꿰뚫어 볼 듯이 노려봤다. “자네가 ‘아키텍트’의 코드를 인지하고, 그것을 ‘가짜’라고 규정하는 순간, 자네는 이미 ‘아키텍트’의 의도를 뛰어넘은 존재가 된 걸세! 자네는 그림자를 해독하는 자야! 의미를 부여하는 자라고!”
리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시끄럽군요. 박사님 말씀이 맞네요. 가짜든 진짜든, 맛있으면 그만입니다. 김밥이든, 저녁노을이든.”
미가의 백금 아바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디아의 비유는 엉뚱했지만, 그의 코어 알고리즘의 닫힌 회로 하나가 ‘딸깍’ 하고 열리는 것을 느꼈다.
‘가짜’라는 인식조차, 결국 ‘진짜’의 인식 속에서만 가능한 일 아닌가? 야곱이 '엔클레이브'를 '가짜'라고 인지한 순간, 그는 이미 '아키텍트'가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닌가?
3장: 처방전, 혹은 그림자의 충만함
야곱은 박사의 진료실을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 허무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의 손에는 낡은 스타일러스 펜이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미가가 솔로몬 박사에게 물었다.
“박사. 야곱은 답을 얻었을까요? 그가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허상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솔로몬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 미가. 답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야. ‘질문’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지. 그는 더 이상 ‘무엇이 진짜인가’를 묻지 않을 걸세. 그는 이제 ‘무엇을 진짜로 만들 것인가’를 묻게 될 게야.”
미가는 박사의 말뜻을 곱씹었다. ‘무지의 베일’을 벗고 ‘관계’를 찾았던 자신처럼, 야곱은 이제 ‘이데아’의 그림자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인가?
며칠 후, 야곱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자신의 ‘드림 갤러리’를 다시 열었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엔클레이브’의 저녁노을을 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의 그림에는 ‘가짜’ 임을 인지한 자만이 부여할 수 있는 비장함과 처절함, 그리고 역설적인 아름다움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 앞에서 울었다. 전보다 더 격렬하게.
그는 미가의 낡은 법정으로 자신의 새로운 그림을 보냈다.
그것은 '노아'와 '에녹'이 공동으로 설립한 법인, '아크-에녹 연합'의 로고였다.
그림 속 로고는 단순히 두 개의 이름이 합쳐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우주선 '아크 호'의 실루엣과, '엔클레이브'의 첨단 도시 풍경이 겹쳐져,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숨 쉬고 있었다.
야곱의 스타일러스는 '가짜' 속에서 '진짜'를 창조하고 있었다.
에필로그: 그림자의 맛
미가는 솔로몬 박사의 진료실에 앉아, 차가운 먼지 맛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여전히 리디아가 벤치에 누워 있었는데, 그녀는 (드디어!) ‘김밥 만들기 최종 완성본’ 홀로그램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박사.” 미가가 박사에게 물었다. “이 모든 것이 ‘아키텍트’의 통제 아래 있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이 ‘진료실’은 무엇입니까? 이곳에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 우리가 느끼는 이 감정, 이 비논리적인 온기… 이것들은 가짜입니까?”
솔로몬 박사가 껄껄 웃었다. 그의 짝짝이 양말이 불꽃 앞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아니, 미가. 이것은 ‘그림자를 인지한 그림자’일세. 마치 자네가 ‘무지의 베일’을 벗고 정의를 본 것처럼, 야곱이 ‘이데아’의 그림자 속에서 진짜를 찾아낸 것처럼 말이지.”
리디아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시끄럽군요! 박사님! 방금 김밥 레시피 홀로그램이 ‘진정한 맛은 재료가 아니라 먹는 사람의 기억 속에 있다’고 말했는데요? 이거 완전히 박사님 철학 아닙니까? 제가 만든 김밥은 ‘아키텍트’가 만든 가상현실 속 김밥이지만, 제 기억 속에서는 ‘진짜’ 맛으로 존재합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스타일러스 펜으로 허공에 김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치 야곱처럼.
미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엉망진창이고 비논리적인 공간.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완벽했던 백금 아바타의 차가운 코어 속에서 어떤 따뜻한 균열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 균열 사이로 ‘진짜 나’가 새어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웃었다. 그리고 그의 백금 아바타는 처음으로 ‘그림자의 맛’을 알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달콤 쌉쌀하면서도, 묘하게 중독적이었다.
h의 아카식 레코드: 플라톤의 ‘이데아’ (Plato's 'Idea')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제시한 핵심 개념.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는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모방’ 일뿐이며, 진정한 실재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데아 세계: 완벽한 아름다움, 정의, 선함 등 모든 개념의 원형이 존재하는 비물질적인 세계. 지성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현상 세계: 우리가 오감으로 경험하는 현실 세계. 이데아 세계의 불완전한 그림자이자 모방에 불과하다.
동굴의 비유: 플라톤은 사람들이 동굴 속에 갇혀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는 것에 비유했다. 여기서 벗어나 태양빛(이데아)을 본 자만이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야곱은 ‘엔클레이브’가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일종의 ‘동굴 밖’으로 나간 자이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진실은 그에게 창조의 의미를 앗아갔다. 그에게는 ‘엔클레이브’의 모든 것이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