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낡은 옷을 만지작거리며 살아간다. 그것은 한때 완벽하게 몸에 맞았던, 화려하고 눈부신 갑옷이다. 우리는 그 옷을 입고 전성기를 누렸고, 사랑을 쟁취했으며,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 그 옷의 감촉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우리는 가끔 잊어버린다. 지금의 ‘나’는 그 옷을 입었던 20대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성장해 버린 자신. 세월과 경험, 혹은 고통이라는 이름의 풍화작용을 겪으며, 우리의 몸과 마음은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렸다. 하지만 뇌는 그 낡은 옷장의 문을 자꾸만 열어본다. ‘추억은 벗어놓은 옷으로, 그것이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성장해 버린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다.’ 2014년, 미시간의 차가운 기숙사 방에서 내가 적어두었던 이 문장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냉혹한 진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머리로는 이 진실을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그 낡은 옷을 기어코 다시 입어보려 한다.
이것은 그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는 이름의 기묘한 아키텍처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가장 빛나던 과거(the beautiful clothes)와, 20킬로그램의 세월이 더해진 현재(the grown self) 사이의 격렬한 불화.
이것은 그 낡은 옷의 실밥이 마침내,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찢어지는 그 처절한 순간에 대한, 어느 늦가을 아침의 기록이다.
1. 아카이브, 혹은 낡은 옷장의 유혹
김경훈의 대구 아파트 거실은 주말의 느긋함과 갓 내린 핸드 드립 커피의 짙은 산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연구 모드’가 아닌, 지극히 사적인 ‘회상 모드’에 잠겨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키보드가 아닌, 아이폰의 화면을 천천히 스크롤하고 있었다. 화면낭독기는 그가 2007년부터 ‘경훈이’라는 이름의 폴더에 차곡차곡 담아두었던, 그의 ‘디지털 김장독’을 읽어 내리고 있었다.
그는 20년 묵은 텍스트들 속에서 자신의 과거 페르소나들을 발굴하는 중이었다. 15살에 모든 것이 멈추고, 3년간의 공백(2004-2006)을 거쳐, 2007년 충주성모학교에서 세상을 다시 ‘읽는’ 법을 배우던 소년. 그리고 마침내, 2014년, ‘엘리야(Elijah)’라는 이름으로 미시간의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던 유학생.
그는 화면낭독기가 2014년 10월의 어느 날에 작성된, 지금 이 글의 모티프가 된 메모를 읽어 내리는 것을 들었다. ‘... 성장해 버린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다.’
그의 입가에, 그만이 지을 수 있는 익살스럽고도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10년 전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에게 보낸 이 경고가 너무나도 정확해서 소름이 돋았다.
그때의 ‘엘리야’는 날렵했다. 그는 ‘차박사’와 ‘유도 소년’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안 보인다’는 사실을 ‘다르게 본다’는 무기로 바꿔낸 참이었다. 그는 마이클과 조쉬 같은 친구들과 함께, 보이지 않는 암벽을 ‘읽으며’ 올랐고(클라이밍), ‘공을 굴려서 패스한다’는 새로운 ‘규칙’을 창조하며 농구 코트를 누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달렸다.
그 시절, 그는 마라톤이 취미였다. 그는 10킬로미터를 50분 안에 주파했다. 그의 몸은 그가 생각하는 대로 정확하게 움직이는 완벽하게 조율된 기계였다.
그는 손을 들어, 현재 자신의 배를 만져보았다. 30대 중반의 연구자. 하루의 대부분을 앉아서 보내는 삶. 10년 전보다, 그는 20킬로그램의 ‘세월’과 ‘지식’과, 그리고 ‘야식’을 더 축적한 상태였다. 그는 이 부드럽고 묵직한 ‘현재’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저 날렵했던 ‘과거’의 옷이 그리운 것도 사실이었다.
“자기야! 준비 다 됐어? 오늘 날씨 완전 대박인데!”
욕실에서 보보의 맑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두 사람이 함께 동화천을 달리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그럼!” 김경훈이 환하게 소리쳤다. 그의 가슴속에서 10년 전의 그 ‘엘리야’가 낡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중얼거렸다. ‘좋아, 오늘이야. 저 철학 박사 양반에게, 10km 50분의 위엄이 뭔지 똑똑히 보여주겠어.’
2. 낡은 옷의 배신 (The Cognitive Dissonance)
동화천의 공기는 칼날처럼 차가웠지만, 햇살은 따뜻했다. 김경훈은 이 완벽한 ‘인지 부조화’의 날씨가 지금 자신의 상태와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곁에는 하네스 대신 가벼운 리드줄을 맨 탱고가 산책의 기쁨에 꼬리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자, 그럼 출발!”
보보가 가볍게 발을 구르며 앞서 나갔다. 그녀는 김경훈보다 몇 해 연상이었지만, 꾸준한 요가와 필라테스로 다져진 그녀의 몸은 그가 아는 그 어떤 ‘시스템’보다도 효율적이고 가벼워 보였다.
김경훈도 그녀를 따라 발을 뗐다.
그리고, 30초 만에, 그는 ‘낡은 옷’이 그를 배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머릿속(2014년의 ‘엘리야’)은 가볍게 날아오르라고 명령했다. ‘보폭을 넓혀! 호흡은 들이쉬고, 내쉬고! 상체를 세워!’
하지만 그의 몸(2025년의 ‘김경훈’)은 그 명령을 완벽하게 거부했다.
발바닥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킬레스건이 비명을 질렀다. 20킬로그램의 세월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그의 무릎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가 가장 당황한 것은 ‘땀’이었다. 10년 전, 그는 땀이 나지 않는 체질이었다. 그는 땀 대신 눈물만 흘린다고 농담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살이 찐 그의 몸은 이 사소한 움직임에도 격렬하게 저항하며, 등줄기와 이마를 타고 불편하고 끈적한 ‘땀’이라는 이름의 ‘오류 메시지’를 쏟아내고 있었다.
“자기야! 괜찮아? 무릎 아픈 거 아니야?”
저만치 앞서가던 보보가 뒤를 돌아보며 걱정스럽게 외쳤다.
“괘, 괜찮아! 먼저 가! 금방 따라갈게!”
그는 헉헉거리며 소리쳤다. 그는 지금, 20년 전 대학 MT에서 겪었던 그 ‘위조지폐’의 순간을 다시 겪고 있었다. “안 보이는데, 업을 수가 있나?”라는 그 시선. 오늘, 보보의 그 걱정스러운 목소리는 그에게 이렇게 들렸다. “그 몸으로, 뛸 수가 있나?”
그는 자신의 ‘장애’가 아니라, 자신의 ‘현재’ 때문에, 또다시 ‘자격 미달’ 통보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는 10년 전의 그 날렵한 마라토너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낡은 기억에 집착하는 땀에 전 거북이였다.
3. 전사(戰士)의 마지막 돌격
그들은 겨우 3킬로미터를 달리고, 벤치에 주저앉았다. 탱고는 신이 나서 헥헥거렸지만, 김경훈은 거의 반쯤 죽어 있었다. 보보가 물병을 건네며, 그의 땀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주었다.
“무리하지 말라니까. 당신, 어제도 새벽 3시까지 논문 썼잖아.”
그녀의 다정한 위로가 그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2016년, 지도신부에게 ‘하산’을 명 받았던 그날을 떠올렸다. 그는 3년간의 공백을 딛고 일어섰다. 그는 ‘죽음’마저 초월했다. 그는 이깟 20킬로그램의 ‘세월’ 따위에게 질 수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보보.”
“... 왜, 또.”
“저기 앞, 다리까지. 100미터 정도 되려나. 경주하자.”
보보는 그의 뜬금없는 제안에, ‘이 남자가 드디어 미쳤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녀의 한숨 소리로 그렇게 짐작했다.)
“자기야, 그러다 쓰러져. 앰뷸런스 부를까?”
“아니! 나 아직 안 죽었어! ‘엘리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여주겠어!”
그는 비장하게 스타트 자세를 잡았다. 15년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육상 선수의 완벽한 자세. 한쪽 무릎을 꿇고, 땅을 짚었다. 탱고가 그의 이 기묘한 행동에, 갸우뚱하며 그의 얼굴을 핥았다.
“준비….”
그는 탱고의 리드줄을 꽉 잡았다.
“... 출발!”
그가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크르르릉!’
탱고가 그의 이 돌발적이고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긴급상황! 주인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지려 한다!’ 혹은 ‘주인이 미쳤다!’로 오인한 모양이었다.
훈련된 안내견의 ‘지능적 불복종’ 프로토콜이 작동했다. 탱고는 그가 튀어 나가려는 반대 방향으로, 즉 그를 ‘보호’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뒤로 버텼다.
그 결과는 처참한 물리적 참사였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김경훈의 80킬로그램의 관성과, 그 자리를 사수하려는 탱고의 30킬로그램의 버티는 힘이 ‘리드줄’이라는 단 하나의 지점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으악?!”
김경훈은 10년 전 클라이밍을 할 때처럼, 잠시 공중부양을 하는 듯한 무중력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10년 전 유도를 할 때 배웠던 그 어떤 ‘낙법’으로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중력이 그의 등을 동화천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퍽!’
그는 젖은 낙엽 더미 위로, 거대한 ‘대(大)’ 자로 뻗어버렸다.
“자기야!”
보보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의 곁에서 탱고는 자신이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 ‘주인을 구했다!’는 뿌듯함으로, 그의 얼굴을 미친 듯이 핥아대기 시작했다.
김경훈은 젖은 낙엽과, 탱고의 침과, 자신의 처절한 패배감 속에서 10년 전의 그 낡은 옷이 마침내, 완벽하게 산산조각 났음을 깨달았다. 그의 찬란했던 마라토너 ‘엘리야’는 오늘 이곳 동화천에서 자신의 충직한 기사 탱고의 과잉 충성에 의해 장렬히 ‘전사’했다.
그는 아팠지만, 그보다 더,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 하하하! 젠장, 탱고… 너 이 자식… 월급 압수야….”
4. 앙가주망, 혹은 새로운 옷
그날 저녁, 그는 약국에서 사 온 파스를 허리에 붙인 채, 소파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보보는 그의 옆에서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탱고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임에도 불구하고, 김경훈이 던져준 개껌을 씹으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아, 진짜….” 보보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나, 당신 그렇게 공중부양하는 거, 태어나서 처음 봤어. 완전 ‘매트릭스’였는데. 10년 전에도 그렇게 날아다녔어, 엘리야?”
“닥쳐….” 김경훈이 신음하며 돌아누웠다. “내 2014년의 영광은 갔어. 그 옷은 이제… 완전히 찢어졌다고.”
보보는 웃음을 거두고, 그의 곁으로 다가와, 파스를 붙인 그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길은 따뜻했고, 그의 욱신거리는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잘 됐네, 뭐.” 그녀가 반말로, 그러나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뭐가 잘 돼.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데.”
“그 낡은 옷, 버릴 때가 됐다는 거잖아.” 그녀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그거 당신한테 안 어울려. 너무 꽉 끼고, 촌스럽고, 무엇보다… 재미없어.”
“재미없다고?”
“응. 나는 10km 50분에 뛰는 ‘엘리야’는 몰라. 관심도 없고. 그건 그냥, 당신이 말한 그 2014년 메모장에나 박제되어 있는 죽은 ‘기록’이잖아.”
그녀는 그의 몸 위로 올라와, 그의 눈을(그는 그녀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꼈다) 마주 보며, 그의 가슴에 뺨을 댔다.
“나는… 지금 이 남자가 좋아.” 그녀가 속삭였다. “허리는 좀 아플지 몰라도, 20킬로그램만큼 더 따뜻하고, 더 푹신하고, 무엇보다… 나를 웃게 할 줄 아는 이 남자. 탱고한테 어이없이 당하고도, 그걸 ‘블랙 코미디’로 승화시킬 줄 아는 이 ‘실존’하는 남자. 나는 그 낡은 옷보다, 지금 당신이 입고 있는 이 ‘김경훈’이라는 옷이 훨씬 더 섹시한데.”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찾아, 그의 앓는 소리를 막아버렸다.
5. 주석: 추억의 아키텍처
그는 아이폰을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허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무게와 온기를 느끼며, 오늘의 이 복잡하고도 아픈 사유에 대한 마지막 주석을 머릿속으로만 그렸다.
‘제목: 향수(Nostalgia)의 아키텍처, 혹은 낡은 옷에 대한 변명.
2014년의 메모는 옳았다. ‘추억은 벗어놓은 옷’이다. 오늘 나는 그 낡은 옷을, 10년 전의 ‘엘리야’라는 갑옷을, 억지로 다시 입으려 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나의 ‘현재(무거운 몸)’가 나의 ‘과거(날렵한 기억)’를 배신했다. 아니, 탱고가 배신했나?
어쩌면 탱고의 ‘지능적 불복종’이야말로, 이 ‘인지 부조화’에 대한 가장 완벽한 ‘철학적 논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 머릿속의 ‘망상(Elijah)’이 내 육체의 ‘현실(Kyung-hoon)’을 해치지 못하도록, 나를 강제로 ‘하산’시켰다. 녀석, 제법인데.
결론: 헤세는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오늘, 탱고 덕분에, ‘엘리야’라는 이름의 낡은 세계를 완벽하게 파괴했다.
그리고 이제, 이 아픈 허리와, 보보의 따뜻한 입맞춤과 함께,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날 시간이다.
…아, 젠장. 허리 아파서 오늘 밤 ‘새로운 탄생’은 좀 힘들 것 같은데. 흑흑.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블랙 코미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