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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아키텍처

by 김경훈


우리는 ‘의사(醫師)’라는 단어를 오해한다. 우리는 그들을 ‘과학자’ 혹은 ‘기술자’라 여긴다. 질병이라는 이름의 고장 난 기계(몸)를 수리하는 냉철한 엔지니어. 우리는 그들의 지식이 더 날카롭기를, 그들의 손기술이 더 정교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약의(藥醫)’, 즉 약을 잘 써서 병을 고치는 3등 의사다. 혹은 ‘식의(食醫)’, 먹는 것을 조절하여 병을 다스리는 2등 의사다.


그러나 조선의 일곱 번째 왕, 세조(世祖)는 달랐다. 평생을 자신의 병과 씨름했던 그는 의술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팔의론(八醫論)’을 통해 선언했다. 가장 으뜸가는 의원은 기술자가 아니라, ‘심의(心醫)’, 즉 ‘마음의 의사’라고.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하여, 그 기(氣)를 안정시켜 병의 근원을 다스리는 자. 병증이 아니라, 그 병의 원인이 되는 ‘마음’을 치료하는 자.


하지만 이 ‘심의’라는 존재는 과연 실재하는가? 아니면 왕의 이상 속에만 존재하는 철학적 유니콘인가. 21세기, 모든 것이 데이터와 시스템으로 환원되는 이 차가운 병원의 아키텍처 속에서 과연 ‘마음’을 치료하는 자리가 남아있기나 한가.


이것은 3년간 병원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완벽한 ‘객체(Object)’로 존재했던 한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무너진 세계 속에서 교과서가 아닌, 세 사람의 ‘실존’을 통해 ‘심의’라는 단어의 진짜 아키텍처를 발견하게 되는 어느 고통스럽고도 눈부신 날들의 기록이다.



1. 붕괴의 서막


2004년, 14살의 김경훈에게 세상은 빛과 논리로 가득 찬, 완벽한 설계도였다. ‘차박사’로 불렸던 유년기, 그는 기계공학과 천문학을 꿈꿨다. 그의 뇌는 수학과 과학의 아름다운 공식들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몸은 ‘유능제강(柔能制剛)’의 철학을 체득한, 동메달리스트 유도 소년의 그것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의 아키텍처가 붕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두통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노이즈(Noise)였다. 하지만 그 노이즈는 곧, 그의 머릿속에서 불법 체류 중인 록밴드가 24시간 헤비메탈을 연주하는 듯한, 끔찍한 고통으로 증폭되었다. 그는 너무 고통스러워 벽에 머리를 박았다. 피가 흘렀지만, 정작 두통은 1도 줄어들지 않았다.


네 번째 응급실에 실려 가던 날, 세상의 모든 소리와 빛이 마치 전원 버튼을 뽑아버린 텔레비전처럼, ‘툭’ 하고 꺼졌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3년이라는 시간을 잃어버린 뒤였다. 16살.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안 보인다는 자각조차 없는 완벽한 공백(Void). 그 낯선 고요함 속에서 그의 존재를 증명해 준 유일한 ‘실재(Reality)’는 그의 손을 잡은 아버지의 거칠고 떨리는 손, 그리고 그에게서 나는 3년간의 절망과 피로가 응축된 땀 냄새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외동아들을 위해 3년간 직장을 그만두고, 24시간 그의 곁을 지켰다. 아버지는 그 3년짜리 낮잠이 영원한 잠이 되지 않도록 지켜낸, 그의 첫 번째 생명줄이었다.


병원이라는 시스템은 그에게 자비롭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김경훈’이 아니었다. 그는 ‘1117호실, 원인불명 뇌신경 손상 환자’라는 이름의 ‘객체’였다. 그는 수많은 의사들을 만났다.


어떤 의사는 ‘혼의(昏醫)’였다. 그의 복잡한 증상 앞에서 당황하여, 어제와 오늘, 다른 처방을 내렸다.

어떤 의사는 ‘광의(狂醫)’였다. 그의 상태를 항상 최악으로 상정하며, “평생 걷지 못할 수도 있다”는 극약 처방 같은 진단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어떤 의사는 ‘망의(妄醫)’였다. 그의 고통이 ‘여기’에 있는데도, 엉뚱한 ‘저기’를 검사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그들은 모두, 세조가 말한 ‘악의(惡醫)’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몸’을 보았지만, 그의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보지 못했다.



2. ‘심의(心醫)’의 아키텍처: 아버지의 돌봄


두 번째 생명은 침대 시트를 붙잡고 하루 세 번, 앉았다 일어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3년간 누워 있던 그의 다리 근육은 완전히 소멸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다리에 힘이 없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첫 번째 ‘심의(心醫)’는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의사가 아니었다.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카메라와 조명 기계나 만지작거리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김경훈이 만난 그 어떤 의사보다도 위대했다.


“훈아.”

어느 날 오후, 아버지는 재활을 포기하고 멍하니 누워있는 아들 곁에 앉아, 낡은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그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세조실록>의 한 부분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귀에, ‘팔의론(八醫論)’에 대한 이야기를, 투박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읽어주기 시작했다.


“... 으뜸가는 의원은 ‘심의’인바,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하여 기(氣)를 안정시켜 병을 낫우는 심신의술(心身醫術)을 최고로 친 것이다….”


김경훈은 그 단어를 처음 들었다. ‘심의(心醫)’. 마음의 의사.

“... 아부지.” 그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게… 어딨어요. 다… 사기꾼(詐醫) 아니면, 사람 죽이는 의사(殺醫)뿐이던데….”


아버지는 책을 덮고, 그의 앙상한 팔을 잡았다.

“여기 있지.”

“... 네?”

“내가 오늘부터 니 ‘심의’다.”

아버지는 웃지 않았다.

“니 마음이 병든 건, 니 몸이 말을 안 들어서 그렇다. 몸이 일어서면, 마음도 따라 일어선다. 붓다가 ‘집착’을 병의 원인이라 했다지? 지금 니는 ‘걸을 수 있었던 과거’에 집착하고 있어. 그 집착을 버리고, 지금, ‘앉았다 일어서는’ 현재에만 집중하는 거다. 그게 니가 할 수행이고, 내가 내릴 처방이다.”


아버지는 그를 침대에 앉혔다.

“자, 오늘부터 시작이다.”

그는 아들의 후들거리는 몸을, 자신의 몸으로 지탱했다.

“하나!” (일어서고)

“둘!” (앉고)

“셋!” (다시 일어서고)


아버지의 구령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꺼져가던 생명의 심지를 다시 지피는 ‘주문(Spell)’이었고, 무너진 아들의 신경망을 다시 연결하려는 아버지의 필사적인 ‘앙가주망(참여)’이었다. 세 번이 다섯 번이 되고, 스무 번이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보행기를 잡고 병원 복도 한 바퀴를 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약의(藥醫)’도, ‘식의(食醫)’도 아니었다. 그는 아들의 ‘마음’이 무너진 이유를 정확히 진단하고, ‘재활’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처방을 내렸으며, 그것을 자신의 온몸으로 함께 수행했다. 그는 완벽한 ‘심의(心醫)’였다.



3. 두 번째 ‘심의’: 지영이 누나의 ‘일상’


몸이 조금씩 말을 듣기 시작하자, 진짜 절망이 찾아왔다.

기계공학과 천문학자를 꿈꾸며 포항공대 캠퍼스를 누비던 기억. 수학과 과학의 아름다운 도형과 수식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걷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절망이었다. 그는 ‘환자’라는 본질에 갇혀버렸다.


그때, 두 번째 ‘심의’가 나타났다.

간호사 지영이 누나였다. 그녀는 다른 간호사들처럼, 그를 ‘1117호 김경훈 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이 차박사!”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순찰을 돌다 말고, 그의 침대 맡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에게서는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아니라, 몰래 먹은 듯한 달콤한 초코파이 냄새가 났다.

“너, 옛날에 차 불빛만 보고 차종 맞혔다며? 완전 뻥이지?”

“... 아닙니다.” 김경훈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맞춰봐. 나 오늘 무슨 차 타고 출근했게?”


그녀는 그를 ‘환자’로 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과거’를 가진,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그냥 ‘짜증 많고 까칠한 남동생’으로 대했다. 그녀는 그에게 주사 바늘 대신, ‘세상 이야기’를 찔러 넣었다.


“야, 너 그거 들었어? 지금 밖에 난리 났다. 비가….”

“너, 어제 <스타크래프트> 결승전 봤냐? 임요환이…”

“아, 맞다. 너 이거 먹어.”


그녀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몰래 숨겨 온 몽쉘 통통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차갑고 비인간적인 병원의 시스템 속에서 그녀의 그 작은 ‘불법 반입품’은 김경훈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데이터’였다.


그녀는 그의 ‘병’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삶’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그의 끝도 없는 철학적 궤변과, 초등학교 시절의 허풍, 심지어 화이트데이 여자친구에게 차였던(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트라우마까지도, 밤늦도록 들어주었다.


그녀는 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를 ‘환자’라는 ‘본질’에서 꺼내어, ‘경훈이’라는 ‘실존’으로 되돌려놓았다. 그녀의 그 ‘일상적인’ 대화와 ‘쓸데없는’ 농담이야말로, 그의 무너진 마음을 재건축하는 가장 강력한 치유의 아키텍처였다.



4. 세 번째 ‘심의’: 신부님의 ‘깨달음’


육체는 회복되었지만, 영혼은 여전히 길을 잃고 있었다. ‘왜 나인가.’

그때, 아버지의 친구였던 노신부님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김경훈의 고통을 단번에 감지했다.


그는 ‘넌 할 수 있어’라는 값싼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거대한 본질을 들이밀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김경훈의 곁에 앉아, 그가 느끼는 분노와 절망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저 ‘들어주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신부님이 나지막이 말했다.

“경훈아. 네가 보는 세상은 어둡겠지만… 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빛이 나는구나.”


그 한마디.

그것은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의 순간이었다. 머리로만 맴돌던 수백 권의 철학책과, 가슴을 짓누르던 수만 톤의 절망이 그 ‘말 한마디’로 인해 비로소 연결되었다.


그는 깨달았다.

그는 ‘보는’ 능력을 잃었지만, ‘말하는’ 능력을 얻었다.

그는 ‘빛’을 잃었지만, ‘소리’를 얻었다.

그는 ‘기계공학자’라는 산에서 내려왔지만, ‘심의(心醫)’라는 새로운 산을 발견했다.


그날 아침, 그는 ‘죽기밖에 더 하겠어?’라는 실존적 자유를 얻었다.

그는 신부님이 서명원 신부가 말했던 ‘붓다’와, 그리고 ‘예수’와 정확히 같은 일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김경훈의 ‘고통’을 진단하고, 그 고통의 원인이 ‘상실에 대한 집착’ 임을 간파했으며, ‘너의 이야기에는 빛이 난다’는 가장 완벽한 처방을 내렸다.


그는 ‘살의’가 가득했던 이 병원에서 세 명의 완벽한 ‘심의(心醫)’를 만났다.



5. 주석: 치유의 아키텍처


그날 밤, 아파트로 돌아온 김경훈은 자신의 아이폰에, 이 오래되고도 선명한 기억에 대한 주석을 음성으로 남겼다. 그의 목소리는 유쾌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감사와, 그의 삶을 지탱하는 확고한 철학이 담겨 있었다.



‘제목: 치유의 아키텍처, 혹은 심의(心醫)라는 이름의 시스템.

세조는 ‘심의’를 으뜸으로 쳤다. 그는 왕이었기에, 병의 원인이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나는 3년간의 병원 생활 동안, 그 ‘팔의론’의 모든 스펙트럼을 경험했다. 나를 절망시킨 것은 ‘광의’와 ‘망의’였고, 나를 살린 것은 세 명의 ‘심의’였다.

첫 번째 심의, 나의 아버지는 무너진 나의 ‘육체’를 ‘돌봄의 윤리’로 다시 세웠다. 그는 나의 ‘몸’을 치유했다.

두 번째 심의, 지영이 누나는 나를 ‘환자’라는 감옥에서 꺼내어 ‘일상’이라는 세상과 다시 연결시켰다. 그녀는 나의 ‘관계’를 치유했다.

세 번째 심의, 노신부님은 나의 ‘상실’이라는 고통에 ‘의미’라는 빛을 비춰주었다. 그는 나의 ‘영혼’을 치유했다.

결론: 진정한 치유의 아키텍처는 약(藥醫)이나 음식(食醫)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몸(재활), 관계(일상), 그리고 영혼(의미)이라는 세 개의 기둥이 ‘접촉’과 ‘대화’라는 따뜻한 지붕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 나는 사제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정보 접근성’이라는 이름으로, 시스템에 갇힌 수많은 ‘오뚝이’ 선배들과, ‘박민준’들과, ‘유진’ 학생들의 ‘마음’에 접속하려 애쓴다. 어쩌면 나는 내가 꿈꾸던 그 ‘심의(心醫)’의 길을, 나만의 방식으로, 여전히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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