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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의 아키텍처

by 김경훈


우리는 ‘기술(Technology)’을 오해한다. 우리는 그것을 ‘효율’과 ‘진보’의 동의어라고 믿는다. 더 빠른 속도, 더 매끄러운 인터페이스, 더 거대한 시스템. 기술은 인간의 삶을 더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며, 그 끝에는 완벽한 유토피아가 있을 것이라 막연히 기대한다.


그러나 만약, 그 ‘진보’라는 이름의 거대한 아키텍처가 누군가에게는 견고한 ‘벽’이 된다면 어떨까.

만약, 기술의 진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존재들—장애인, 노인, 빈곤층—이 그 시스템의 ‘사용자’가 아니라, ‘제거’되어야 할 오류나 노이즈(Noise)로 취급된다면.


‘보조 기술(Assistive Technology)’. 이것은 휠체어, 보청기, 혹은 하얀 지팡이라는 ‘물건’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이것은 ‘철학’이다. ‘기술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스티글러, 044), 기술을 인간의 ‘도구’로 되돌려 놓으려는(듀이 068) 가장 치열한 선언이다. 그것은 ‘장애’를 개인의 ‘결함’으로 보는 ‘의료적 모델’을 거부하고, ‘장애’를 시스템과 환경의 ‘실패’로 규정하는 ‘사회적 모델’의 가장 구체적인 실천이다.


1980년, 스물한 살의 농구선수 닐 스퀘어는 교통사고로 사지가 마비되었다. 세상은 그에게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친척은 ‘sip-and-puff(마시고 내쉬기)’라는 장치를 고안해, 그의 ‘날숨’을 ‘언어’로 번역해 냈다. 닐 스퀘어는 ‘기술’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세상과 다시 ‘연결’시켰다.


이것은 그 ‘연결’의 아키텍처에 대한 이야기다. 단순한 ‘기부’나 ‘지원’이 아니라, ‘시민 참여형 플랫폼’을 통해, 한 사람의 ‘결핍’을 공동체의 ‘창의성’으로 연결해 내는 어느 캐나다 비영리단체의 놀라운 설계도에 대한 기록이다.



1. 10년 전, 경계 너머의 도시 (미시간, 2014년)


2014년, 11월의 미시간은 이미 혹독한 겨울의 한복판에 있었다. 앤아버의 캠퍼스는 잿빛 하늘 아래, 끝없이 내리는 눈에 갇혀, 마치 거대한 소리굽쇠처럼 낮고 단조로운 울림만을 내고 있었다. 김경훈, 당시 ‘엘리야(Elijah)’라 불리던 스물세 살의 유학생은 이 ‘백색 공백(White Void)’ 속에서 자신만의 생존법을 터득해가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기어코 해부하고야 말겠다는 ‘차박사’ 시절의 호기심이 뒤섞인, 익살스럽고도 날카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시력을 잃은 후, 충주성모학교와 서강대를 거치며, 자신만의 ‘감각의 아키텍처’를 구축했다. 그는 눈 대신 귀와 코, 그리고 피부로 세상을 ‘읽었다’.


하지만 미시간의 눈(雪)은 그가 한국에서 쌓아 올린 모든 데이터를 무력화시켰다. 눈은 모든 소리를 흡수했고, 모든 냄새를 지웠으며, 모든 지형의 경계를 매끄럽게 덮어버렸다. 그는 기숙사에서 강의실로 가는 그 짧은 길조차, 마치 남극을 탐험하듯, 지팡이와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 주말, 추수감사절 연휴(그의 생일이 포함된)를 맞아, 그의 친구 마이클이 특별한 제안을 했다.

“헤이 엘리야. 지루하지? 캐나다 갈래?”

“캐나다? 지금 이 눈보라에?”

“응. 윈저(Windsor)야. 국경 넘으면 바로 코앞이야. 내 사촌 빌(Bill)이 거기서 좀… 재밌는 걸 하거든. 너한테 보여주고 싶어.”


‘보여주고 싶다’는 말에, 김경훈은 그만의 블랙 코미디 섞인 미소를 지었다.

“마이클, ‘보여준다’는 말은 나한테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거 알잖아. 게다가 캐나다는… 춥잖아.”

“아니, 아니!” 마이클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건 ‘보는’ 게 아니야. 이건 ‘만드는’ 거야. 빌은… 뭐랄까, 너 같은 사람이거든. 세상을 좀 다르게 조립하는 사람.”



2. ‘메이커스’의 아키텍처, 혹은 ‘sip-and-puff’


그들이 도착한 곳은 윈저 시 외곽의 한 허름한 창고였다. 문을 열자, 김경훈의 코를 찌른 것은 커피 향이나 책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두가 플라스틱을 녹이는 매캐한 냄새, 뜨거운 글루건의 아교 냄새, 그리고 3D 프린터가 작동하며 내뿜는 미세한 오존 냄새였다. 그의 귀에는 톱질 소리, 드릴 소리, 그리고 그 모든 소음 사이로, 낮은 목소리로 열띤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어디야, 마이클? 무슨… 불법 무기 제조 공장이라도 돼?” 김경훈이 익살스럽게 속삭였다.

“하하, 비슷해! 여긴 ‘메이커스 메이킹 체인지(Makers Making Change)’의 윈저 지부야.”


마이클의 사촌이라는 빌은 40대쯤 되어 보이는 손에서 방금 전까지 만진 듯한 기계유 냄새가 나는 남자였다. 그는 김경훈의 손을 우악스럽게 움켜쥐며, 이 공간의 ‘시스템’을 설명했다.


“반가워요, 엘리야. 여긴, 간단히 말해서 ‘필요한 놈’이 ‘만드는 놈’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는 김경훈을 창고 한편으로 이끌었다.

“저기, 저 친구 보이죠. 루시. 루게릭병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해요. 근데 저 친구가 뭘 원하는지 알아요? 닌텐도 스위치로 ‘젤다’를 깨고 싶대요.”


김경훈은 그 말에, 이 공간의 본질을 단번에 이해했다. 이것은 ‘복지’나 ‘자선’의 공간이 아니었다. 이것은 ‘욕망’과 ‘기술’이 만나는 가장 치열한 ‘혁신’의 현장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봤어요?” 빌이 웃었다. “저기, 저 입에 문 빨대 같은 거. ‘sip-and-puff(마시고 내쉬기)’ 스위치예요. ‘마시는’ 숨에 ‘A 버튼(점프)’을, ‘내쉬는’ 숨에 ‘B 버튼(공격)’을 매핑(Mapping)했죠. 조이스틱은 턱으로 움직이고요. 젠장, 어제는 나보다 먼저 가논을 잡았다니까!”


빌은 1980년, 닐 스퀘어라는 사지마비 농구선수가 그의 친척이 만든 바로 그 ‘sip-and-puff’ 장치로 세상과 소통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닐은 죽었지만, 그의 ‘정신’—기술을 통해 세상과 접속하려 했던 그 절박한 의지—이 ‘닐 스퀘어 소사이어티’라는 이름의 거대한 시스템으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빌이 말했다. “거창한 ‘보조 기술’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이웃의 문제를 해결하는 거죠. 여기 있는 메이커(Maker)들은 다 자원봉사자예요. 엔지니어, 학생, 심지어 은퇴한 목수까지. 장애인이 플랫폼에 ‘내 손가락이 이 연필을 못 잡아요’라고 글을 올리면, 누군가 그걸 보고 3D 프린터로 그 사람 손에만 꼭 맞는 ‘연필 그립’을 설계해서 그냥 ‘만들어’ 주는 겁니다. 설계도는? 당연히 오픈소스죠. 전 세계 누구나 다운받아서 고치고, 더 좋게 만들 수 있게.”


김경훈은 전율했다. 이것은 그가 꿈꾸던 ‘정보 접근성’의 가장 완벽한 실현이었다.

그는 귄터 발라프가 폭로한 스타벅스의 ‘가짜 파트너십’을 떠올렸다. 그리고 호리구치 토시히데가 구축한 ‘진짜 파트너십’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그가 목격한 이것은 그 두 가지를 모두 뛰어넘는 것이었다.


스타벅스의 시스템은 ‘착취’의 아키텍처였다.

호리구치의 시스템은 ‘거래’의 아키텍처였다.

하지만 닐 스퀘어의 시스템은 ‘증여(Gift)’와 ‘연결(Connection)’의 아키텍처였다.


이곳에서는 ‘장애’가 ‘결함’이나 ‘비용’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메이커’들에게 창의적인 도전을 촉발하는 ‘퀘스트(Quest)’이자, 새로운 기술을 탄생시키는 ‘엔진’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3. ‘나’의 아키텍처, 혹은 10년 후의 깨달음


다시 현재, 2025년 11월의 대구.

김경훈은 10년 전 윈저의 그 창고에서 맡았던 매캐한 플라스틱 냄새를 떠올리며, 자신의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지금, ‘보조기기 열린 플랫폼’이라는 10년 전 그가 만났던 ‘메이커스 메이킹 체인지’의 한국판 시스템에 대한 자문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그날의 흥분과 함께, 지금의 현실에 대한 씁쓸한 미소가 교차했다.

‘시스템은 복제할 수 있지만, 철학까지 복제할 수는 없다.’


그는 한국의 현실을 분석했다. 국립재활원의 시도는 훌륭했다. 하지만 ‘시민 참여’라는 핵심 엔진이 빠져 있었다. 시스템은 여전히 ‘공급자(정부/기관)’ 중심이었고, 장애인은 ‘수혜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닐 스퀘어의 시스템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연결’ 그 자체에 목적을 두었다면, 한국의 시스템은 ‘우수한 품질의 보조 기구 보급’이라는 ‘결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시력을 잃은 후,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것은 ‘최첨단 기기’가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그가 병원에서 3년간의 공백을 깨고 나왔을 때, 그가 충주성모학교에서 점자를 배울 때, 그가 미시간에서 ‘엘리야’가 되어 농구를 할 때… 그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연결’이었다.


그의 아버지. ‘심의(心醫)’가 되어, 3년간 그의 손을 잡아주며 ‘돌봄’으로 그를 세상과 연결시켰다.

간호사 지영이 누나. ‘일상’의 수다로, 그를 ‘환자’가 아닌 ‘사람’으로 연결시켰다.

미시간의 마이클. ‘규칙의 파괴’로, 그를 ‘장애인’이 아닌 ‘친구’로 연결시켰다.


그는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보고서의 마지막 결론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은 10년 전 마이클의 사촌 빌이 말했던 그 ‘닌텐도 스위치’를 조작하듯,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그는 지금, 이 시스템의 ‘버그’를 잡고, 새로운 ‘패치’를 제안하고 있었다.



4. 앙가주망, 혹은 연결이라는 이름의 기술


“... 보조 기술의 중요성은 단순히 기기를 ‘보급’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화면낭독기로 자신의 글을 검토했다.

“진정한 ‘포용적 사회’란, 장애인에게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입니다.”


“닐 스퀘어 소사이어티의 ‘메이커스 메이킹 체인지’는 이 지점에서 완벽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그들은 장애인을 ‘도움이 필요한 존재’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혁신의 주체’로 그 위상을 전환시킵니다. 동시에, 비장애인 ‘메이커’들에게는 자신의 기술과 재능을 통해 타인의 삶에 직접 ‘기여’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이고도 강력한 ‘의미’를 제공합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지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연결’입니다. ‘자유주의적 개입주의(Sunstein, 043)’가 아니라, ‘초월적 공동체(De Shalit, 046)’의 실현입니다. 기술은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 서로에게 ‘선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겸손한 ‘인터페이스’가 되어야 합니다.”



5. 주석: 접속의 아키텍처


그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오늘 밤, 보보와 함께, 그가 유학 시절 즐겨 먹었던, 그러나 지금은 너무 비싸져 버린 ‘체리맛 트위즐러’ 대신, 대구의 명물인 ‘납작만두’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그는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이 길었던 사유에 대한 마지막 주석을 음성으로 남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10년 전 윈저의 그 창고에서 느꼈던, 매캐하지만 희망 넘쳤던 그 냄새가 실려 있는 듯했다.



‘제목: 접속의 아키텍처, 혹은 ‘sip-and-puff’의 철학.

인간은 ‘기술의 노예’(Stigler, 044)가 될 수도, ‘기술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 스티글러의 ‘보철성’은 인간이 결함투성이 존재이기에 기술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닐 스퀘어는 그 ‘보철성’을 가장 극적으로 증명했다. 그는 ‘입김’이라는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신체 기능을, ‘sip-and-puff’라는 기술과 연결하여, 그것을 ‘언어’와 ‘의지’로 확장시켰다.

하지만 진짜 혁신은 그 ‘기술’ 자체가 아니다. 진짜 혁신은 닐 스퀘어의 친척이 그를 ‘포기’ 하지 않고, 그의 ‘결핍’에 ‘접속’하려 했던 그 ‘사랑’이다.

결론: ‘보조 기술’은 ‘기계’가 아니라 ‘관계’다. 그것은 ‘연결’의 아키텍처다.

… 오늘 내가 쓴 이 보고서가 10년 전 윈저의 그 창고에서 맡았던 냄새만큼이나, 뜨겁고 진실하기를 바란다. 적어도, 누군가의 ‘날숨’이 ‘절망’이 아닌 ‘희망’의 언어가 될 수 있도록.’



비하인드 스토리


국민대학교에 기고한 글이 발행되었습니다.

관심 가져주시고 이야기 들어주신 신민아 작가님 또는 편집장님 감사합니다.


https://press.kookmin.ac.kr/news/articleView.html?idxno=104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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