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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는 그저 책만 빌려주는 사람인가

AI 시대, 우리에게 '문헌정보학'이 필요한 이유

by 김경훈


'사서(Librarian)'라는 직업을 떠올릴 때, 우리는 흔히 정숙한 도서관 데스크에서 책을 대출하고 반납하는 모습을 연상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현대 사회에서 사서와 문헌정보학 전문가가 수행하는 역할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만약 사서의 역할이 단순히 '책을 지키고 빌려주는 것'에 머물렀다면, 인공지능과 디지털 데이터가 모든 것을 대체할 것이라는 예측 속에서 이 직업은 이미 위기를 맞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1. 정보 중개자에서 '지식 내비게이터'로


과거의 사서가 '정보의 중개자'였다면, 현대의 사서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지식 내비게이터(Knowledge Navigator)'입니다.


첫 번째 칼럼에서 다루었듯이(정보 리터러시), 현대인에게는 정보의 진위를 판별하는 능력이 절실합니다. 사서는 바로 이 '정보 리터러시 교육'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이들은 이용자에게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찾는 방법, 출처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기준, 그리고 가짜 뉴스를 걸러내는 훈련을 제공하는 '정보 교육 전문가'입니다.



2. 데이터를 조직하는 '커뮤니티 아키텍트'


또한, 현대의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라 지역 사회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조직하며, 공유하는 '커뮤니티 허브'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사서는 이 과정에서 '커뮤니티 아키텍트(Community Architect)' 역할을 합니다. 지역의 역사 자료를 디지털화하여 보존하는 '디지털 아카이빙'을 주도하고,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데이터(공공 데이터, 취업 정보, 복지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제공합니다.


나아가 도서관 공간 자체를 재설계합니다. 코딩 교육, 미디어 제작 워크숍, 디지털 창작 공간(메이커 스페이스) 등을 기획·운영하며 도서관을 지식 생산의 거점으로 탈바꿈시키고 있습니다.



3. AI 시대, 더욱 중요해진 역할


두 번째 칼럼에서 논했듯이(데이터 큐레이션), 문헌정보학은 AI의 기반이 되는 데이터를 조직하는 학문입니다. 이 원칙은 도서관 현장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사서들은 방대한 장서를 '분류'하고 이용자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목록화'합니다. 이는 AI가 학습 데이터를 '라벨링'하고 '분류 체계(Taxonomy)'를 만드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전문성입니다. 이들은 수백 년간 축적된 정보 조직의 원칙을 바탕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지식에 접근하는 시스템을 설계하고 유지하는 전문가들입니다.


결론적으로, 현대의 사서는 책이라는 '매체'에 갇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정보와 지식이라는 '본질'을 다룹니다.


책을 정리하는 모습 뒤에는 혼란스러운 정보를 체계화하는 고도의 전문성이 숨어 있으며, 대출 데스크 너머에서는 지역 사회의 정보 격차를 해소하고 미래 세대의 디지털 역량을 교육하는 중요한 임무가 수행되고 있습니다. 사서는 책을 빌려주는 사람을 넘어, 우리 사회의 '지식 인프라'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핵심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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