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스타인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
솔로몬 박사의 진료실은 그날따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가구들의 배치가 바뀌어 있었다. 평소 환자들이 들어오자마자 털썩 주저앉곤 했던 낡은 가죽 소파는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고, 그 대신 딱딱해 보이는 나무 의자가 문 정면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벤치 옆 테이블에는 평소 즐겨 마시던 싸구려 믹스 커피 대신, 향긋한 허브티가 담긴 유리병이 '우연히' 놓여 있었다.
“박사님.”
진홍색 벨벳 벤치에 누워 있던 리디아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인테리어 풍수지리라도 공부하셨나요?”
솔로몬 박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장 높이를 조절하고 있었다. 그의 짝짝이 양말(오늘은 붉은색과 회색 아가일 체크)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아니, 리디아. 이건 ‘설계’일세. 환자들이 들어오자마자 게으르게 소파에 눕는 대신, 저 딱딱한 의자에 앉아 긴장감을 갖게 하고, 카페인 대신 허브티를 마시며 심신을 안정시키게 하려는… 아주 고도화된 심리적 배치지!”
“시끄럽군요. 그냥 ‘잔머리’라고 하시죠.”
리디아는 다시 벤치에 누웠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박사가 '의도적으로' 배치해 둔 허브티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그때, 낡은 황동 방울이 울렸다.
'딸랑-'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박사가 치밀하게 배치해 둔 딱딱한 나무 의자를 무시하고, 구석에 처박힌 낡은 가죽 소파를 찾아내어 털썩 주저앉았다. 박사의 ‘설계’는 3초 만에 실패했다.
그의 이름은 요한(Yoan). ‘외계 지성체 교류 및 윤리 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이자, 인류 최초의 외계-윤리학자였다.
그는 헐렁한 린넨 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그의 어깨는 보이지 않는 우주의 무게에 짓눌린 듯 무거워 보였다. 그의 눈은 깊고 지쳐 있었으며, 그 안에는 수많은 별들의 차가운 빛이 담겨 있었다.
“실패했군요, 박사님.”
요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적어도,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라면 말이죠.”
1장: 구원인가 사기인가
요한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박사님. 저는 ‘게루빔’을 구했습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크산토스 행성의 그 수정 생명체들 말입니다. 그들은 감정이 없고, 오직 논리만을 따르는 종족이죠. 저는 그들에게 다가오는 운석이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문명을 파괴하는 ‘정보-파지 바이러스’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솔로몬 박사는 책장에서 (의도적으로 잘 보이게 꽂아둔) 니체의 책을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자네가 그들과 연합하여 미사일을 쏘아 올린 ‘요한 프로토콜’은 전설이지.”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살자’고도 하지 않았죠.”
요한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저는 그들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실을 ‘편집’했습니다. 그들이 거절할 수 없도록, 오직 ‘자신들의 생존 이익’에만 부합하는 데이터만을 골라, 그들이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순서와 형태로 제시했죠. 저는 그들의 ‘선택’을 설계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박사를 보았다.
“그 결과 그들은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괴롭습니다. 제가 한 짓이… ‘엔클레이브’의 ‘아키텍트’가 우리에게 하는 짓과 무엇이 다릅니까?”
리디아가 벤치에서 흥미롭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아키텍트요? 그 양반은 우리를 가상현실에 가두고 속이고 있잖아요.”
“아니요, 리디아 씨.” 요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키텍트도 우리를 ‘강제’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엔클레이브’라는 환경을 너무나 안락하고 완벽하게 설계해서 우리가 굳이 밖으로 나갈 생각을 ‘못 하게’ 만들 뿐이죠. 그는 우리의 선택을 조종합니다. 부드럽게, 눈치채지 못하게.”
요한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저는 게루빔의 자유의지를 침해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스스로 멸망을 선택할 권리조차 빼앗았습니다. 제가 한 것은 외교가 아니라, 고도화된 사기극이었습니다. 저는… 구원자가 아니라, 그저 또 다른 ‘통제광’일 뿐입니다.”
2장: 급식실의 사과와 케이크
솔로몬 박사는 요한의 고백을 듣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돋보기안경을 벗어 닦았다.
진료실의 공기에는 요한이 가져온 고뇌의 냄새, 즉 ‘책임감’이라는 묵직한 냄새가 배어들고 있었다.
“자네, 급식실에 가본 적 있나?”
박사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네? 급식실이라뇨?”
“그래. 아이들이 밥을 먹는 곳 말일세. 영양사는 고민하지. 아이들이 몸에 좋은 사과를 먹게 할까, 아니면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를 먹게 할까.”
박사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네모난 틀을 그렸다.
“영양사가 사과를 눈에 잘 띄는 앞쪽에 두고, 케이크를 구석에 숨겨두었다고 치세. 아이들은 사과를 더 많이 집어 들겠지. 자, 영양사는 아이들의 자유를 침해했나?”
“... 아니요. 아이들은 여전히 케이크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귀찮았을 뿐이죠.”
“바로 그거야!”
박사가 무릎을 쳤다.
“고대의 캐스 선스타인이라는 친구는 그걸 ‘자유주의적 개입주의’, 혹은 ‘넛지(Nudge)’라고 불렀네. 팔꿈치로 슬쩍 찌른다는 뜻이지.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
박사는 요한에게 다가갔다. 그의 짝짝이 양말이 요한의 린넨 셔츠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자네는 게루빔에게 미사일 발사 버튼을 강제로 누르게 하지 않았어. 자네는 그저 ‘생존’이라는 사과를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진열했을 뿐이야.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로 사과를 집어 들었지. 그건 그들의 선택이었어.”
“하지만… 제가 그 상황을 통제했습니다.”
“통제? 오만하군, 요한!”
박사가 호통을 쳤다.
“자네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유’로웠을까? 아니! 그들은 ‘무지’와 ‘바이러스’라는 상황에 의해 멸망을 ‘강요’당했을 걸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고, 그 또한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자네는 ‘멸망’이라는 넛지 대신 ‘생존’이라는 넛지를 선택했을 뿐이야.”
리디아가 거들었다.
“시끄럽군요. 그러니까 박사님 말씀은 어차피 세상은 누군가의 의도대로 굴러가는 판이니, 기왕이면 ‘착한 놈’이 판을 짜는 게 낫다는 거네요. 아키텍트는 우리를 가두려고 판을 짰지만, 당신은 쟤들을 살리려고 판을 짰잖아요. 결과가 다른데 과정이 같다고 징징대는 건 위선이에요.”
요한은 리디아의 직설적인 말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위선.’
그는 자신의 도덕적 결벽증이 오히려 생명을 구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3장: 처방전, 혹은 좋은 건축가
요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동시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는 계속 이 짓을 해도 되는 겁니까? 타인의 선택에 개입하고, 상황을 설계하는 이… ‘주제넘은’ 짓을요.”
“해야지!” 솔로몬 박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환경이야. 자네가 짓는 표정, 자네가 내뱉는 말 한마디가 타인에게는 ‘상황’이 되고 ‘넛지’가 된단 말일세.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조종하고 있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박사는 책장에서 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내 요한에게 건넸다. 그것은 건축학 개론서였다.
“자네는 ‘통제광’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좋은 건축가’가 되기를 고민하게. 아키텍트가 ‘엔클레이브’를 감옥으로 설계했다면, 자네는 그것을 ‘광장’으로 다시 설계하게.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고, 대화하고, 때로는 길을 잃더라도 결국은 더 나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표지판을 슬쩍 바꿔놓란 말일세.”
요한은 책을 받아 들었다. 책의 무게가 그의 손을 통해 마음으로 전해졌다.
그것은 ‘책임’의 무게였지만, 이전처럼 짓누르는 무게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구’의 무게였다.
“알겠습니다, 박사님.”
요한이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그의 눈에 담긴 별빛이 따뜻해 보였다.
“저는 외계-윤리 위원회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제 방식대로 다시 한번 ‘판’을 짜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엔클레이브의 시민들이 스스로 ‘빨간 약’을 선택할 수 있도록, 아주 매력적인 사과를 진열해 두어야겠군요.”
에필로그: 슬쩍 미는 손
요한이 떠난 후, 진료실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리디아는 벤치에서 일어나, 박사가 처음에 옮겨두었던 그 딱딱한 나무 의자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푹신한 가죽 소파를 다시 문 정면으로 끌어왔다.
“뭐 하는 건가 리디아?” 박사가 물었다.
“설계 변경입니다.” 리디아가 시크하게 대꾸했다.
“다음에 올 환자는 아마 아주 지쳐 있을 테니까요. 긴장감보다는 위로가 필요할 겁니다. 이것도 제 나름의 ‘넛지’입니다.”
박사는 벙찐 표정을 짓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자네, 아주 훌륭한 건축가가 다 되었군! 그래, 인간은 역시 푹신한 소파에 약하지!”
리디아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벤치에 누웠다. 그녀의 손에는 박사가 아까 몰래 놓아두었던 허브티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티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다.
‘맛없어. 다음엔 내가 커피 믹스를 몰래 갖다 놔야겠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를 민다. 때로는 벼랑 끝으로, 때로는 따뜻한 소파 위로.
중요한 것은 미는 손의 힘이 아니라, 그 손이 가리키는 방향일 것이다.
요한은 이제 그 방향을 알았다.
> h의 아카식 레코드: 선스타인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 (넛지)’ (Libertarian Paternalism)
>
> 미국의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과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가 제안한 개념.
>
> 넛지 (Nudge):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는 뜻으로, 강제나 지시 없이 사람들의 선택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말한다.
> 자유주의적 개입주의: 모순되어 보이는 두 단어의 결합이다. 사람들의 자유(Libertarian)를 존중하여 선택권을 박탈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부모(Paternal)와 같은 마음으로 개입(Paternalism)하여 '선택 설계(Choice Architecture)'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
> 요한은 자신이 게루빔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괴로워했으나, 솔로몬 박사는 '어떤 식의 배열(상황)도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면, 선한 의도를 가진 개입은 타인의 삶을 개선하는 책임 있는 행동임을 일깨워주었다. '엔클레이브'의 '아키텍트'가 통제를 위한 설계를 했다면, 요한은 이제 해방을 위한 설계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