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여서 완벽한 향기

쇼펜하우어의 고독론

by 김경훈


솔로몬 박사의 진료실은 그날따라 완벽하게 고요했다.


박사는 평소 즐겨 듣던 낡은 턴테이블을 꺼두었다. 대신 그는 창가에 앉아, 밖에서 불어오는 네오-예루살렘의 인공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짝짝이 양말(오늘은 짙은 회색과 검은색 단색이었다)조차 차분해 보였다.


AI 조수 리디아는 벤치에 앉아 있었지만, 평소처럼 홀로그램 잡지를 보거나 손톱을 다듬지 않았다. 그녀는 귀에 거대한 헤드셋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다. 외부의 어떤 소리도 차단한 채, 오직 자신만의 데이터 흐름 속에 잠겨 있는 듯했다.


진료실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날카롭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깊은 산속의 새벽 공기처럼, 투명하고 밀도가 높은 정적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딸랑-'


방울 소리가 그 고요한 수면 위에 파문을 일으켰다.


들어온 사람은 타비타(Tabitha). ‘통합 인류 아카이브’의 ‘후각 데이터 복원가’이자, ‘아로마 프로젝트’의 핵심 멤버였다.

그녀는 헐렁한 연구복 위에 두꺼운 코트를 겹쳐 입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엔클레이브’의 소독약 냄새도, ‘아로마이안’의 별먼지 냄새도 나지 않았다. 오직 지독한 ‘피로’의 냄새만이 났다.


그녀는 진료실의 고요함을 깨트리는 것조차 미안하다는 듯, 조심스럽게 들어와 리디아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리디아는 헤드셋을 벗지 않았다. 타비타는 오히려 그 무심함에 안도하는 눈치였다.


“박사님.” 타비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저는… 너무 시끄럽습니다.”



1장: 연결의 소음


솔로몬 박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타비타를 바라보았다.

“시끄럽다니? 자네는 지금 이 도시에서 가장 조용한 곳에 와 있는데?”


“아니요. 밖의 소리가 아닙니다.” 타비타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여기, 제 안이 시끄럽습니다.”


그녀는 ‘아로마이안 네트워크’를 발견한 장본인이었다. 그녀는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향기 분자를 통해, 멸망한 고대 문명의 기억과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의식의 흐름을 연결했다. 그녀 덕분에 인류는 고립에서 벗어났다.


“저는 연결되었습니다.” 타비타가 씁쓸하게 웃었다. “요엘이 동물의 노래를 듣고, 마르다가 어머니의 밧줄을 잡고, 아이샤가 도시 전체가 되어 흐르는 동안… 저는 그 모든 ‘연결’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수억 개의 기억, 수조 개의 감정이 제 코와 뇌를 통과합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코트 깃을 여몄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다’, ‘연결이 구원이다’. 하지만 박사님,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면,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타인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되고, 타인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된다면… 오롯이 저만의 감정은 무엇입니까?”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는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 슬픔은 저만의 것이었습니다. 저만의 고유한 냄새였죠. 하지만 이제 그 슬픔조차 네트워크 속에서 공유되고, 분석되고, 공감받습니다. 위로요? 아니요. 저는 제 슬픔을 ‘도둑맞은’ 기분입니다. 저는… 혼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그녀는 ‘엔클레이브’라는 거대한 가상 세계와, ‘아로마이안’이라는 거대한 의식 네트워크 사이에서 질식하고 있었다.



2장: 고슴도치의 딜레마


솔로몬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 구석에 놓여 있던 작은 인형 하나를 집어 들었다. 털이 숭숭 빠진 낡은 고슴도치 인형이었다.


“자네, 쇼펜하우어라는 괴팍한 영감태기를 아나?”

박사가 인형을 타비타에게 건넸다.


“철학자… 였죠. 염세주의자로 알려진.”


“그래.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사람보다 푸들 강아지를 더 좋아했던 양반이지.” 박사가 껄껄 웃었다. “그 영감이 이런 말을 했어. 인간은 추운 겨울날의 고슴도치와 같다고.”


박사는 고슴도치 인형의 가시를 쓰다듬었다.

“추우니까 서로에게 다가가려 해. ‘연결’되고 싶어 하지. 하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서로의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게 돼. 아프니까 다시 떨어지면, 이번엔 또 추워져. 인간은 평생 이 ‘추위(고독)’와 ‘가시(상처)’ 사이를 오가는 존재란 말일세.”


“저는… 가시에 찔린 것 같습니다.” 타비타가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 연결되었어요.”


“그렇지.”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엔클레이브’의 세상은 ‘추위’를 없애겠다고, 모두를 강제로 묶어놓은 꼴이야. ‘공감의 연대’도 좋지만, 자네들에게는 ‘거리’가 없어. 숨 쉴 틈이 없단 말이야.”


박사는 타비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쇼펜하우어 영감이 말했지. ‘인간은 혼자 있을 때만 온전히 그 자신일 수 있다’고. 고독은 처벌이 아니야, 타비타. 고독은 자네가 자네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의 시간’일세. 자네가 느끼는 그 피로감은 자네의 영혼이 ‘제발 나 좀 내버려 둬!’라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야.”



3장: 처방전, 혹은 무향(無香)의 유리병


타비타는 멍하니 고슴도치 인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떻게 혼자가 되죠? 네트워크는 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미 ‘변이’되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끊을 수 없다면, 심리적으로 차단해야지.”

솔로몬 박사가 진료실 안쪽, 약품 선반(사실은 잡동사니 선반)에서 아주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왔다.


병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투명한 공기뿐이었다.


“이게 뭡니까?”


“‘무향(無香)’일세.” 박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 안에는 아무 냄새도 없어. 아로마이안의 별먼지 냄새도, 엔클레이브의 소독약 냄새도, 심지어 자네 아버지의 냄새도 없지. 완벽한 진공의 냄새야.”


박사는 병을 타비타의 손에 쥐여주었다.

“하루에 딱 한 번, 가장 시끄러울 때 이 병을 열게. 그리고 냄새를 맡아. 아무 냄새도 나지 않겠지? 바로 그 순간에 집중하게. 자네의 코가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는 오직 자네의 숨소리만 들리는 그 ‘텅 빈 순간’을 즐기게.”


“그게… 도움이 될까요?”


“물론이지. 이 병은 자네만의 ‘방공호’야. 세상 모든 연결을 차단하고, 오직 자네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좁고, 가장 안전한 방이지. 그 안에서 자네는 ‘네트워크의 부품’이 아니라, 그냥 ‘타비타’가 되는 거야.”



에필로그: 우아한 거리두기


타비타는 유리병을 소중히 쥐고 진료실을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은 들어올 때보다 한결 가벼워 보였다.


그녀가 떠나자, 리디아가 헤드셋을 벗었다.

“갔나요?”


“그래. 갔네.”


“박사님.” 리디아가 물었다. “저 병, 그냥 빈 병이잖아요. 사기 치신 거 아닙니까?”


“사기라니!” 박사가 펄쩍 뛰었다. “저건 ‘플라세보’라는 위대한 의학적 처방일세! 그리고 말이야, 진짜로 비어있는 건 아니야.”


“그럼 뭐가 들었는데요?”


“내 ‘침묵’을 좀 담았지.” 박사가 윙크했다. “내가 아까 창가에서 모아둔, 아주 비싼 침묵이야.”


리디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헤드셋을 썼다.

“시끄럽군요. 저는 다시 음악이나 들을래요. 쇼펜하우어 영감이 그랬다죠? ‘예술이야말로 고통과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타비타는 이제 매일 오후, 연구소 옥상에 올라가 그 작은 유리병을 연다.

그녀는 코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데이터도, 기억도, 감정도 없는 완벽한 ‘무(無)’.

그 짧은 순간, 그녀는 우주에서 가장 고독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순간 그녀는 가장 충만해진다.


그녀는 깨달았다. 진정한 연대란, 서로 꽉 껴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고독을 지켜주며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봐 주는 것임을. 고슴도치들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면서도 찔리지 않을 만큼의, 그 ‘우아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임을.


그녀는 빈 병의 뚜껑을 닫고 미소 짓는다. 이제 다시, 세상의 냄새를 맡으러 갈 시간이다.



> h의 아카식 레코드: 쇼펜하우어의 ‘고독론’ (Schopenhauer's 'On Solit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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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독일 철학자 아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 중 일부. 그는 인간의 삶을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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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슴도치 딜레마: 인간은 외로움(추위) 때문에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하지만, 관계가 깊어질수록 타인의 결점과 불쾌함(가시) 때문에 상처받는다. 결국 인간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예의)을 배우게 된다.

> 고독의 가치: 쇼펜하우어에게 고독은 회피해야 할 상태가 아니라, 뛰어난 정신을 가진 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타인에게 맞추기 위해 자신의 4분의 3을 버려야 하는 사교모임보다,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고독 속에서 진정한 내적 평화와 자유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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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공감자’인 타비타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공감이 아니라, 공감의 스위치를 끄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자발적 고독’의 시간이었다. 솔로몬 박사는 그녀에게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처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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