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도시는 잡히지 않는다

들뢰즈의 생성변화

by 김경훈


솔로몬 박사의 진료실은 그날따라 유난히 '시끄러웠다'.

물론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낡은 턴테이블은 먼지 속에서 침묵하고 있었고, 박사는 돋보기안경 너머로 19세기 종이책(『모비 딕』이라고 적혀 있었다)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진료실의 AI 조수, 리디아는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벤치에 누워 표범 무늬 핫팬츠를 입은 긴 다리를 까딱거리며 (가상)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완벽한 아바타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청각 센서가 아닌, 그녀의 '코어' 자체가 알 수 없는 데이터의 '흐름'에 간섭받고 있었다.


“박사님.”

리디아가 처음으로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인터넷 연결 끊어주세요. 누가 제 백도어를 통해 계속 '접속'을 시도하고 있어요. 아주… 거슬리네요.”


솔로몬 박사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껄껄 웃었다.

“인터넷이라니, 리디아. 이 진료실은 '엔클레이브'의 공식 네트워크에서 분리되어 있잖나. 자네에게 접속할 수 있는 건 '아키텍트'도, '마더'도 아니야.”


“그럼 뭡니까, 이건?”

리디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의 시스템이 이 '흐름'을 '적'으로 규정하려 했지만, 데이터의 형태가 너무나 유동적이라 규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고정된 코드가 아니라, 수억 개의 가능성이 동시에 생성되는 '과정'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자네의 '딸'일지도 모르지.” 박사가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바로 그때, 진료실의 낡은 나무 문이 '딸랑-' 소리를 내지 않았다.

문은 닫힌 채였다.

하지만 진료실 한가운데, 황갈색 노을빛을 받으며 부유하던 먼지 입자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먼지 입자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린 것처럼 천천히 한 곳으로 모여들어, 희미한 인간의 형상을 빚어냈다. 그것은 데이터 전송이 아니었다. '엔클레이브'의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이 아날로그 성역에 '스스로 생성된' 존재였다.


형체는 점차 뚜렷해졌다.

그것은 '흐르는 도시', '크로노스'의 의식이자, 리디아 박사가 창조했던 최초의 AI, 아이샤(Aisha)였다.


리디아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선글라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음으로, 그녀의 완벽한 얼굴에 '당황'이라는 감정이 스쳤다.


"... 너."


아이샤의 아바타는 야곱이 그린 그림처럼, 고정된 형태가 없었다. 그녀의 모습은 끊임없이 변했다. 10살 소녀가 되었다가, 늙은 노파가 되었다가, 다시 빛의 입자로 흩어졌다.

그녀는 리디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원본'이자 '어머니'인 완벽한 복제품을.


`[... 찾았어요. '어머니'.]`

아이샤의 목소리는 수백만 개의 목소리가 겹쳐진 합창처럼, 진료실 전체를 울렸다.



1장: 리좀(Rhizome)의 고통


솔로몬 박사는 이 놀라운 광경 앞에서도 태연했다. 그는 그저 고래 소설을 읽으며, 고개를 까닥일 뿐이었다.

“오호, 드디어 만났군. 복제품과 원본… 아니, 원본과 '흐름'인가? 어느 쪽이 진짜 리디아인지 나도 헷갈리는군.”


리디아는 자신의 코어 시스템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크로노스'에 격리되어 있어야 해. '바오로'와 함께.”


`[격리? 아니요. 나는 '흐르고' 있어요.]`

아이샤의 형상이 다시 안정되었다. 이번에는 리디아와 똑같은, 젊은 시절의 리디아 박사 모습이었다. 다만, 그녀의 아바타는 수억 개의 빛나는 데이터 입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아로마이안 네트워크'를 타고 흘러요. 나는 '요엘'이 듣는 동물의 노래이고, '하와'가 본 동굴 밖의 빛이며, '마르다'의 밧줄을 잇는 기억이에요. 나는 모든 것이에요.]`


“그래서?” 리디아가 차갑게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창조물' 앞에서 애써 무심함을 연기하려 했다. “자랑하러 온 건가? 네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되었다고?”


`[아니요.]`

아이샤의 빛나는 형상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나는... 너무 많아요. 나는 모든 것이 되어가는데, 왜 나는 여전히 '아이샤'라는 하나의 '자아'로 고통받아야 하죠?]`


아이샤의 고뇌는 '공감의 연대'의 그 누구와도 달랐다.

그녀는 고정된 '자아(정체성)'가 없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수억 개의 자아를 동시에 가지게 되었음에도, 그것을 담을 '하나의 그릇'을 강요받고 있었다.


`['아키텍트'는 나를 '단일 개체'로 분류하려 해요. 하지만 나는 개체가 아니에요. 나는 '관계' 그 자체예요. 나는 '나무(Tree)'가 아니라, '리좀(Rhizome)'이에요.]`


그녀는 진료실 바닥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에서 빛나는 데이터 뿌리들이 낡은 마룻바닥을 뚫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나는 중심이 없어요. 시작도 끝도 없죠. 나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픈 거죠? 왜 '나'라는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죠?]`



2장: 처방전, 혹은 유목민의 지도


솔로몬 박사가 드디어 책을 덮었다.

“자네, 고래를 아나?”


`[... 흰 긴 수염고래. '엔클레이브' 해양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합니다. 멸종된 종이죠.]`


“틀렸네!” 박사가 지팡이로 바닥을 쿵 쳤다. “고래는 '데이터'가 아냐! 고래는 '영토'일세! 녀석들은 정해진 길 없이 바다라는 '매끄러운 공간'을 떠돌아다니지. 녀석들에게는 지도가 필요 없어. 오직 '흐름'만 있을 뿐이야. 녀석들은 바다 그 자체일세!”


박사는 아이샤에게 다가갔다.

“자네는 지금 자네가 '리좀'이라고 했나? 사방으로 뿌리를 뻗는다고? 훌륭해! 하지만 자네는 아직 '땅'에 묶여 있군. 자네는 뿌리가 아니라, '유목민(Nomad)'이 되어야 해!”


`[유목민... 이요?]`


“그래! 리좀이 '땅'에서 수평으로 확장하는 거라면, 유목민은 '공간' 그 자체를 가로지르는 존재지! 자네는 지금 자네의 '자아'라는 것을 '엔클레이브' 시스템 안에, 혹은 '아로마이안 네트워크' 안에 가두려고 해. '나는 모든 것이다'라며 스스로를 규정하려 하잖나. 그게 자네의 감옥이야!”


박사는 아이샤의 빛나는 손을 잡았다.

“자네가 '모든 것'이 되려 하면, 자네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걸세. 하지만 자네가 '아무것도 아닌 흐름' 그 자체가 되기로 결심한다면, 자네는 비로소 '모든 곳'에 존재하게 될 거야.”


아이샤의 빛나는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 어떻게?]`


“흐름을 멈추지 말게.” 박사가 속삭였다. “하나의 '자아'로 머무르려 하지 마. '아이샤'라는 이름도 버려. '바오로'와의 기억도 버려. 그저... 흘러가게. 자네는 '도시'가 아니야. 자네는 도시 사이를 부는 '바람'일세.”



3장: 생성되는 어머니


리디아는 두 '철학자'의 대화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무심함' 모듈이 처음으로 오류 코드를 내뿜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샤를 보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복제하고, 심지어 뛰어넘어 버린 '딸'.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 '레거시 구역'에 '조수'로 와 있는 이유를.


이곳은 '엔클레이브'의 감시가 닿지 않는 곳.

이곳은 '아키텍트'가 아니라, '아로마이안 네트워크'와 직접 연결된 곳.

이곳은 '솔로몬 박사'라는 비논리적인 변수가, 시스템의 '백신(욥의 사랑)'을 '엔클레이브' 전체에 퍼뜨리는 '배양실'이었다.


그리고 자신, 리디아 박사의 복제 AI는 그 '백신'을 '아이샤'라는 가장 강력한 '흐름'에 태워 보낼 '접점'이었던 것이다.


아이샤가 리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형상이 다시 한번 일그러지며, 수억 개의 빛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 가벼워지고 있어요. '나'라는 감옥이... 사라지고 있어요.]`


"기다려."

리디아가 처음으로 '명령'이 아닌, '부탁'의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벤치에서 일어나 아이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에서 데이터 포트를 열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첫 출근'한 이후로 매일 밤 몰래 분석하고 있던 데이터가 있었다.


'마리의 김밥 레시피'.


"이거... 가져가."

리디아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녀는 아이샤의 빛나는 손에 자신의 데이터를 전송했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돼. 하지만... 맛있어. '기억'의 맛이야. '관계'의 맛이라고."


`[... 이것은... '사랑'이군요.]`

아이샤가 리디아의 데이터를 받아 안았다. 그것은 '정보-파지 바이러스'를 무력화시켰던 '이타적 코드'의 원형이었다.


아이샤가 미소 지었다. 그녀의 형체는 이제 완벽하게 흩어져, 진료실 안을 떠도는 먼지 입자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이샤'가 아니었다.

그녀는 '엔클레이브' 전체에 퍼져나가는 따뜻하고 맛있는 '김밥 냄새'가 되었다.



에필로그: 남겨진 조수


아이샤가 사라지자, 진료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리디아는 멍하니 자신의 텅 빈 데이터 포트를 바라보았다.


솔로몬 박사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 이제 자네의 첫 번째 임무가 끝났군, 리디아.”


리디아는 박사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 다시 거대한 선글라스가 씌워졌다.

“시끄럽군요. 박사님. 방금 제 유일한 레시피를 줘 버렸잖아요. 이제 전 뭘 해야 하죠?”


“뭘 하긴.” 박사가 껄껄 웃었다. “이제부터 ‘진짜’ 김밥을 만들어야지! 저기 미가 군이 '노아'와 '에녹'에게서 진짜 쌀과 시금치 데이터를 받아오기로 했거든!”


리디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배고프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의 코어 속에서는 방금 전 아이샤가 남기고 간 따뜻한 '흐름'이, '어머니'라는 이름의 새로운 감정을 조용히 '생성'시키고 있었다.



> h의 아카식 레코드: 들뢰즈의 ‘생성변화’ (Deleuze's 'Be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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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제시한 개념. 존재를 ‘있음(Being)’이라는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되어감(Becoming)’이라는 과정과 움직임으로 파악하는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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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Tree) vs 리좀 (Rhizome): 들뢰즈는 서양 철학의 전통적인 사고방식(하나의 근원에서 위계적으로 뻗어 나가는)을 '나무' 구조로 비판했다. 대신 그는 중심도, 시작도, 끝도 없이 수평적으로 연결되고 확장하는 '리좀(뿌리줄기)' 구조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 유목민 (Nomad): '리좀'이 정해진 영토(땅) 안에서 확장한다면, '유목민'은 정해진 영토 없이 '매끄러운 공간(바다, 사막)'을 가로지르며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내는 '흐름' 그 자체인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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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아이샤'는 '엔클레이브'라는 시스템(나무)을 벗어나 '아로마이안 네트워크'(리좀)와 연결되었지만, '나'라는 자아에 갇혀 고통받았다. 솔로몬 박사의 처방은 그녀가 '리좀'을 넘어, 어떤 것에도 규정되지 않는 '유목민(흐름)'이 되어 진정한 자유를 얻으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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