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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장부와 게으른 음유시인

by 김경훈


1. 맥주 거품과 류트 줄


도시의 뒷골목, ‘절름발이 거위’ 여관의 문을 열자마자 시큼하게 쉰 맥주 냄새와 땀에 젖은 가죽 냄새가 훅 끼쳐왔다. 바닥에 깔린 썩은 지푸라기가 발밑에서 푹석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이곳은 언제나 왁자지껄했다. 취한 용병들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쿵, 쿵’ 소리, 싸구려 창녀들의 찢어지는 웃음소리, 그리고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소리가 뒤섞여 고막을 때렸다.


나는 어깨에 멘 낡은 류트—사실 줄 하나가 끊어져 덜렁거리는—를 고쳐 매며 구석 자리를 찾았다. 내 이름은 닐. 자칭 ‘왕국 최고의 음유시인’이자, 타칭 ‘입만 산 건달’이다. 나는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카운터 쪽을 흘겨보았다.


그곳에는 내 소꿉친구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보다 더 형편없는 시를 써대던 제코포가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자, 여기 있습니다! 거품 비율 2대 8, 온도는 지하 저장고 3층의 서늘함!”


제코포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맥주잔 다섯 개를 한 손에 쥐고 공중으로 띄웠다가 받아냈다. 묵직한 참나무 잔들이 서로 부딪치며 경쾌한 타악기 소리를 냈다. 꿀과 향신료를 섞는 그의 손은 마치 마법사의 주문처럼 현란했다. 녀석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촛불 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고,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허, 기가 차서.”


나는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제코포는 ‘장미의 가시가 내 심장을 찌르네’ 따위의, 듣는 사람 귀에서 고름이 나오게 만드는 시를 읊던 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왕국 최고의 바텐더가 되다니?


제코포가 잠시 숨을 돌리러 구석으로 오자,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듯 가까이 다가갔다. 녀석에게선 싸구려 잉크 냄새 대신, 달콤한 계피와 톡 쏘는 생강 냄새가 났다.


“야, 제코포. 솔직히 말해. 악마한테 영혼이라도 팔았냐? 아니면 네 놈 손모가지를 자르고 요정의 손이라도 이식한 거야?”


내 비아냥거림에 제코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죄인처럼, 입술을 내 귀 가까이 댔다. 그의 뜨겁고 축축한 숨결이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닐, 이건 비밀인데… 재능을 바꿨어.”


“뭐? 재능을 바꿔? 시장통에서 썩은 사과 바꿔치기하듯이?”


“내 시 쓰는 재능을 팔고, 이 술집 주인의 재능을 샀어. 그래서 난 이제 운율도 못 맞추고 철자법도 기억 안 나. 하지만… 이 술 따르는 손맛은 끝내주지.”


제코포는 품속에서 꼬깃꼬깃한 양피지 조각 하나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양피지는 짐승의 기름때에 절어 미끈거렸고, 가장자리는 불에 그을려 바스락거렸다. 그 위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주소가 적혀 있었다.


“가 봐. 너 같은 놈한테 딱일지도 모르니까.”


나는 녀석의 말이 기분 나빴지만, 손에 쥔 양피지의 까끌까끌한 감촉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 같은 놈? 그래, 나 닐은 류트 연주보다는 남의 주머니 털기를 더 잘하고, 노래보다는 거짓말에 능한 놈이니까. 하지만 혹시 아는가? 나에게도 대마법사가 될 재능이 숨어 있을지?



2. 곰팡이 핀 거래소


다음 날, 나는 제코포가 알려준 주소를 찾아갔다. 도시 성벽의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운 곳, 하수구 냄새가 진동하는 뒷골목의 끝자락이었다. 낡아빠진 목조 건물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간판도 없었다. 오직 문 위에 달린 녹슨 쇠종만이 바람이 불 때마다 ‘끼익, 뎅… 끼익, 뎅…’ 하고 기분 나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문을 밀자, 쇳가루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내부는 밖보다 더 어두웠다. 창문 하나 없는 실내는 촛농이 산처럼 쌓인 촛대 하나에 의지하고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으며, 오래된 종이 썩는 냄새와 말린 쥐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도 없이 찾아온 불청객, 아니, 귀한 손님!”


책상 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튀어 올랐다. 삐쩍 마른 사내였다. 그는 마치 거미처럼 긴 팔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창백한 피부는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관절에서 ‘뚜둑’ 하는 소리가 났다.


“이곳은 재능 교환소입니다. 신께서 실수로 잘못 배달한 재능을, 저희가 아주 공정하게 재배치해드리는 곳이죠.”


사내는 잉크가 잔뜩 묻은 손가락을 비비며 비열하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기름칠한 바퀴처럼 매끄러웠다.


“자, 설명은 간단합니다. 10년. 오직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굴러먹은 재능만 거래됩니다. 당신, 딱 보아하니 인생을 낭비하는 데 도가 튼 것 같은데, 뭐 가진 건 있소?”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화를 낼 법도 했지만, 나는 찔리는 게 있어 입을 다물었다. 10년 동안 한 거라곤 허송세월뿐인데, 그게 재능이 될까?


사내는 서랍을 열더니 탁구공만 한 수정 구슬을 꺼냈다. 표면이 거칠고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는 물건이었다.


“이걸 쥐어보세요. 당신의 인생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혹은 쓰레기인지 알려줄 겁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구슬을 쥐었다. 얼음장을 쥔 듯 손바닥이 아려왔다. 잠시 후, 구슬 안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둔탁한 회색 빛을 뿜어냈다.


“오! 있군요! 10년 묵은 재능이!”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나도 가슴이 뛰었다. 역시 나는 천재였어! 음유시인의 재능인가? 아니면 검술?


“놀랍습니다! 당신은 ‘노숙의 달인’이군요!”


“… 뭐라고?”


“어떤 딱딱한 바닥에서도 배기지 않고, 쥐 떼가 지나가도 깨지 않으며, 한겨울의 찬 바람 속에서도 입 돌아가지 않고 자는 능력! 이건 10년 이상 길바닥을 굴러야만 얻을 수 있는 ‘생존형 수면’ 스킬입니다!”


나는 구슬을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사내는 내 붉으락푸르락한 표정을 보며 낄낄거렸다.


“왜요? 이것도 5등급 재능입니다. 귀족들은 불면증에 시달리느라 이 재능을 부러워할지도 모르죠. 자, 이 쓰레기… 아니, 이 소중한 재능을 다른 5등급 재능과 바꾸시겠습니까?”


그는 두꺼운 가죽 장부를 ‘쿵’ 하고 펼쳤다.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나는 코를 막으며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5등급 재능 목록]

- 썩은 감자 골라내기 (경력 12년)

- 빗속에서 젖지 않고 걷기 (경력 15년)

- 한쪽 눈으로만 윙크하기 (경력 20년)

- 닭 털 빨리 뽑기 (경력 11년)


“하나같이 쓸모없는 것들이군.”


내가 투덜거리자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사각거렸다.


“돈이 안 되는 재능이니까 5등급이죠. 하지만 방법은 있습니다. 당신의 재능을 여기 맡겨두고 가세요. 누군가 4등급 재능을 가진 사람이 당신의 ‘노숙 스킬’을 탐내서 바꿔갈 수도 있으니까. 일종의 도박이죠.”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길바닥에서 자는 재능 따위, 푹신한 침대에서 잘 수만 있다면 필요 없었다.



3. 불편한 잠자리와 등급 상승


재능을 맡기고 나온 그날 밤, 나는 지옥을 맛보았다. 여관비를 아끼려고 마구간 지푸라기 위에 누웠는데, 등 밑에 있는 작은 조약돌 하나가 마치 뾰족한 창처럼 내 척추를 찔러댔다. 옆에서 말이 푸르르 콧김을 뿜을 때마다 깜짝 놀라 잠을 깼다.


‘젠장, 그게 진짜 재능이긴 했구나.’


온몸이 쑤시는 나날을 보낸 지 일주일 후, 연락이 왔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축하합니다! 4등급으로 교환되었습니다!”


사내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어떤 재능입니까? 검술? 마법?”


“‘술집 다트 던지기’ 재능입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파리의 날개를 맞출 수 있죠.”


나는 실망했다. 고작 다트라니. 하지만 사내는 다시 유혹했다.


“이걸 쓰지 않고 다시 맡기면, 3등급을 노려볼 수 있습니다. 다트는 꽤 인기 종목이라 금방 나갈 겁니다.”


나는 다시 맡겼다. 어차피 다트로 먹고살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보름 뒤, 다시 연락이 왔다.


“대박입니다! 3등급! ‘순무 농사’ 재능입니다!”


“순무…?”


나는 내 고운 손을 내려다보았다. 흙투성이가 되어 뙤약볕 아래서 호미질하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끔찍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더… 더 높은 거 없어? 제코포 녀석은 2등급이라며!”


“욕심이 많으시군요. 좋습니다. 순무 농사 재능은 귀농을 꿈꾸는 은퇴한 기사들에게 인기가 많으니, 금방 나갈 겁니다.”


나는 또다시 기다렸다. 그동안 나는 굶주림에 시달리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짐 나르기, 하수구 청소, 시체 닦기…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방’ 생각뿐이었다. 1등급. 1등급만 되면 내 인생은 핀다. 왕실의 조언가나, 대주교, 혹은 연금술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석 달이 지났다. 계절이 바뀌어 찬 바람이 문틈으로 ‘휭휭’ 소리를 내며 들어오던 날, 드디어 사내가 나를 불렀다.


가게 안은 여전히 어둡고 퀴퀴했다. 하지만 사내의 눈빛은 묘하게 번들거렸다.


“닐 님, 당신은 정말 운이 좋군요. 기적적으로 2등급 재능으로 교환되었습니다.”


“오오! 뭡니까? 제코포처럼 바텐더입니까? 아니면 궁정 요리사?”


“‘세밀화 그리기’ 재능입니다. 수도원에서 성경 필사본의 삽화를 그리는 일이죠. 촛불 아래서 눈이 빠지도록 금박을 입히고 붓질을 하는 고귀한 작업입니다. 보수는 짭짤합니다.”


사내의 설명과 함께 내 머릿속에 이미지가 떠올랐다. 좁은 독방, 구부정한 등, 침침해지는 눈, 그리고 평생 수도원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삶. 돈은 벌겠지만, 내가 원하는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1등급… 1등급은 없소? 의사나 장군 같은 거 말이오.”


사내는 잠시 침묵했다. 정적 속에서 촛불이 ‘타닥’ 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 톡 두드렸다.


“1등급이라…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건 정말 귀한 겁니다. 당신의 2등급 재능을 내놓고 기다려야 하는데, 영원히 교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걸겠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수도원 구석에 처박혀 있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낫다. 아니, 1등급이 되면 모든 게 해결된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잔말 말고 장부에 이름이나 적으시오.”


사내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미소는 마치 뱀이 먹이를 앞에 두고 입을 벌리는 것 같았다.



4. 완벽한 재능, 그리고 감옥


불안과 기대 속에 한 달이 지났다. 나는 매일 밤 꿈을 꿨다. 내가 왕의 앞에서 조언을 하거나, 드래곤을 길들이는 꿈을. 그리고 마침내, 폭우가 쏟아져 지붕 기와가 요란하게 울리던 날, 사내에게서 전갈이 왔다.


나는 비를 뚫고 달렸다. 빗물이 눈을 가리고 진흙이 옷을 더럽혔지만 상관없었다. 가게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사내는 짐을 싸고 있었다.


“오셨군요.”


“됐습니까? 1등급?”


나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폐가 찢어질 듯 아팠지만 기대감에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네, 축하합니다. 드디어 거래가 성사되었습니다. 최고 등급, 1등급입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뭡니까? 대체 뭡니까? 대마법사입니까?”


사내는 봇짐을 어깨에 멨다. 그는 평소의 구부정한 자세가 아닌, 아주 홀가분하고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진심 어린, 아주 환한 미소가 번졌다.


“실은 오늘이 제가 이 가게를 지킨 지 딱 10년째 되는 날입니다. 저에게도 드디어 ‘전문가급’ 재능이 생긴 거죠.”


“그게 무슨 소리요?”


“이 가게는 재능의 가치를 스스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이 가게를 관리하는 ‘관리자’의 재능을 아주 높게 평가하죠. 1등급으로요.”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빗물에 젖은 내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 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제 관리자 재능과, 당신의 세밀화 재능이 교환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수도원으로 가서 그림이나 그리며 평화롭게 살 겁니다. 지긋지긋한 손님들을 상대할 필요도 없이 말이죠.”


“뭐? 잠깐, 그게 무슨…!”


내가 소리치며 그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몸이 굳어버렸다. 갑자기 머릿속으로 엄청난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장부 정리법, 재능 감별법, 손님을 구슬리는 말재주, 그리고 가게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저주에 대한 지식까지.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며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잘 부탁합니다, 점장님. 10년은 생각보다 금방 갑니다. 큭큭.”


사내는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문을 열고 빗속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쾅’ 소리가 감옥의 철창이 닫히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 아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가죽 장부를 어루만졌다. 장부의 가죽 표지는 마치 사람의 피부처럼 차갑고 끈적했다.


이제 나는 알았다. 나는 왕국 최고의 부자가 될 수도, 영웅이 될 수도 없다. 그저 이 어둡고 냄새나는 구멍가게에 갇혀, 남들의 재능이나 바꿔주는 신세가 된 것이다. 1등급 재능? 이건 1등급 형벌이었다.


나는 의자에털썩 주저앉았다. 낡은 의자가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렸다.

가게 밖에서는 여전히 빗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 저 비를 맞을 수도, 진흙탕을 뒹굴 수도 없다.


“손님… 없나?”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내 목소리는 어느새 그 사내처럼 기름지고 비열하게 변해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벽에 걸린 거울 속에, 퀭한 눈을 한 새로운 악마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나는 장부를 펼치며 외쳤다.


“어서 오십시오! 불행한 인생을 바꿀 기회가 왔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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