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주사위 왕국의 어느 평범한 하루

by 김경훈


1. 연금술사의 수상한 물항아리


“으으… 벼룩이 또 물었나.”


소년 한스, 아니 ‘똥손 한스’는 짚단 속에 파묻혀 있던 몸을 일으켰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평소라면 닭이 울자마자 어머니의 고함이 들려왔을 텐데, 웬일인지 밖이 소란스러웠다.


한스가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고 나가자, 거실, 아니 흙바닥뿐인 오두막 한가운데에 낯선 사내가 서 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그는 낡은 수레에 가득 실린 항아리들을 가리키며 침을 튀기고 있었다.


“부인! 이 ‘성녀의 눈물’ 항아리로 말할 것 같으면, 동방의 현자가 만든 정화의 돌이 들어 있습니다! 만약 부인께서 이 붉은 제비를 뽑으신다면, 평생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마법 항아리를 공짜로! 게다가 1년에 세 번, 현자가 직접 와서 이끼를 닦아주는 서비스까지!”


어머니의 눈이 화덕의 불씨처럼 타올랐다. 사내는 가죽 주머니를 흔들었다. 안에서 ‘잘그락, 잘그락’ 하며 나무 제비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확률은 3퍼센트! 자, 붉은 제비가 아니더라도 푸른 제비를 뽑으신다면, 이끼 제거 서비스는 없지만, 물맛 하나는 끝내주는 항아리를 드립니다!”


사내에게서 나는 짙은 향신료 냄새와 어머니의 땀 냄새가 좁은 방 안에 뒤섞였다. 어머니는 치마 속에 숨겨둔 쌈짓돈, 묵직한 은화 두 닢을 꺼내 사내의 손바닥에 ‘탁’ 하고 얹었다.


“좋아요. 내 운을 믿어보죠.”


어머니가 가죽 주머니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거친 가죽 안감을 스치는 소리가 ‘스윽, 스윽’ 긴장감을 자아냈다.


“제발! 붉은색! 마법 항아리!”


어머니가 숨을 멈추고 손을 쑥 뺐다. 꽉 쥔 주먹을 펴자, 그곳엔… 칠이 다 벗겨진 하얀 나무토막이 놓여 있었다.


“악! 꽝이잖아!”


“허허, 이런. 흰 제비군요. 그래도 걱정 마십시오. 작년에 유행했던 ‘그냥 항아리’를 드립니다. 물은 직접 길어 오셔야 하지만 아주 튼튼하죠.”


어머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사내를 붙잡고 물었다.


“이거 무르고 다시 뽑을 수 있소?”


“물론이죠. 은화 한 닢만 더 내시면.”


어머니는 잠시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기어이 은화를 하나 더 꺼냈다. 그러곤 문가에 서 있던 한스를 획 돌아보았다.


“한스! 네가 뽑아봐! 네 아비보단 낫겠지!”


한스는 얼떨결에 불려 나갔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자 차갑고 딱딱한 나무토막들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는 가장 매끄럽게 느껴지는 녀석을 골라 힘차게 꺼냈다.


“에이… 또 흰색이네.”


“아이고! 내 팔자야!”


어머니는 한스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결국 오두막 한구석에는 금이 가서 물이 샐 것 같은 낡은 항아리 하나가 덩그러니 놓이게 되었다. 은화 세 닢짜리 치고는 몹시 초라한 몰골이었다.



2. 귀족의 마차와 돼지 여물통


어머니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한스는 등교… 아니, 도제 수업을 받으러 길을 나섰다. 마을 광장에는 성(Castle)으로 향하는 공용 짐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스는 마부에게 동전 한 닢을 던져주고는 마차 옆에 달린 거대한 ‘운명의 룰렛’을 바라보았다. 녹슨 쇠바늘이 ‘끼릭, 끼릭’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딸깍!]


바늘이 멈춘 곳은 황금색, ‘1등’ 칸이었다.


“오오! 1등이다!”


마부가 껄껄 웃으며 마차의 가장 상석, 벨벳 쿠션이 깔린 자리의 문을 열어주었다. 한스는 푹신한 쿠션에 몸을 파묻고 다리를 쭉 뻗었다. 엉덩이에 와닿는 부드러운 감촉이 황홀했다.


잠시 후, 꼬부랑 할아버지가 룰렛을 돌렸다.


[텅!]


바늘은 검은색, ‘짐칸’을 가리켰다. 할아버지는 닭장과 돼지 여물통이 실린 마차 뒤편 짐칸에 위태롭게 매달려야 했다.


“어이 한스! 자네 1등인가? 부럽구만!”


다음 정거장에서 탄 친구가 한스의 맞은편, 역시나 1등석에 앉으며 침을 튀겼다.


“운이 좋았어. 헤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짐칸에서는 돼지의 비명과 할아버지의 곡소리가 들려왔지만, 벨벳 쿠션 위에서는 그저 자장가처럼 들릴 뿐이었다.



3. 수도원의 점심 식사


수업을 마친 한스는 수도원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의 배급 또한 ‘신의 뜻’이라 불리는 뽑기로 결정되었다.


한스는 구리 동전을 통에 넣고, 벽에 달린 레버를 ‘끼이익’ 당겼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배급구 뚜껑이 열렸다.


“젠장! 또 딱딱한 빵이야? 이빨 부러지겠네!”


접시 위에는 돌덩이처럼 딱딱하고 곰팡이가 핀 검은 빵 한 조각과 맹물 같은 수프가 놓여 있었다. 한스가 빵을 식탁에 내리치자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우와아아! 통구이다! 아기 돼지 통구이!”


한 귀족 자제의 접시에는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아기 돼지 통구이가 입에 사과를 문 채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다. 고소한 기름 냄새와 향긋한 로즈마리 향이 식당을 가득 채웠다.


한스는 딱딱한 빵을 씹으며 그 냄새를 반찬 삼아야 했다.


“야, 한 번 더 돌려보지 그래?”


옆 친구가 꼬드겼지만, 한스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짝사랑하는 방앗간 집 딸, 세레나의 생일 선물을 사려면 돈을 아껴야 했다. 뱃속에 들어가면 돼지나 빵이나 다 똑같은 거름이 될 뿐이라고, 한스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4. 동방의 비단 상자


시내, 아니 성 아랫마을 장터는 시끄러웠다. 한스는 세레나를 위해 미리 봐둔 ‘동방의 신비한 상자’ 가게로 향했다.


운이 좋으면 이국적인 비단 스카프나 보석이 박힌 단검이 나오겠지만, 보통은 짚신 한 짝이나 헝겊 조각이 나올 터였다. 그래도 한스는 상상했다. 자신의 키만 한 곰 가죽 인형을 뽑아 낑낑거리며 세레나에게 안겨주는 모습을.


그때, 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왕실 납품용 향수가 단돈 은화 다섯 닢?”


귀족 부인들이나 쓴다는 최고급 향수 뽑기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병 하나에 성 한 채 값이라는 그 향수였다. 확률은 0.005퍼센트라지만, 그 아래 등급인 장미수만 뽑아도 본전은 뽑는 장사였다.


‘향수라면 세레나가 기절초풍하겠지? 내가 만약 1등을 뽑으면…’


한스는 홀린 듯 다가갔다. 은화를 넣고 레버를 돌렸다.


[달그락, 툭.]


나온 것은 손바닥만 한 작은 삼베 주머니였다. 떨리는 손으로 열어보니, 향수병 모양이 그려진 ‘종이 쪼가리’가 나왔다.


“으아악! 꽝!”


한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남은 돈을 털어 다시 돌렸다. 또 종이 쪼가리. 마지막 비상금까지 털어 넣었다.


“제발…!”


[달그락, 툭.]


또다시 종이 쪼가리.


한스는 빈털터리가 되어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주머니 속에는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 세 장만 바스락거렸다. 세레나의 선물은커녕, 당장 내일 마차비도 없었다.



5. 아버지의 전리품


집에 돌아온 한스는 어머니에게 용돈을 구걸해 볼까 했지만, 어머니는 목욕통에서 막 나오던 참이라 기분이 예민해 보였다.


그때, 문이 쾅 열리며 아버지가 들어왔다. 땀 냄새와 술 냄새, 그리고 묘하게 기분 좋은 금속 냄새를 풍기며.


“여보! 오늘 용병 대장이 전리품 분배를 했는데, 내가 대박을 쳤어!”


“정말이요? 얼마나?”


“평소의 세 배야!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뽑았다고! 우리 소대에서 나만 뽑았어, 나만!”


아버지가 묵직한 주머니를 흔들자 ‘찰그랑, 찰그랑’ 청아한 금화 부딪치는 소리가 오두막을 가득 채웠다. 어머니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해졌다.


“세상에! 맨날 녹슨 칼이나 주워오던 양반이 웬일이래?”


“허허, 운이 트이려나 봐!”


집안 분위기가 잔치판으로 변하자, 한스는 슬쩍 끼어들었다.


“어머니, 저 용돈 좀… 세레나 선물을 사야 하는데…”


평소라면 등짝을 맞았겠지만, 금화 소리에 취한 어머니는 흔쾌히 지갑을 열었다.


“옛다! 오늘 네 아비가 한 건 했으니 주는 거야. 대신 그 종이 쪼가리들은 땔감으로 쓰게 이리 내놔.”


한스는 잽싸게 돈을 받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번엔 기필코 곰 가죽 인형을 뽑으리라. 하지만 발걸음은 자꾸만 향수 뽑기 기계 쪽으로 휘어지려고 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혀를 찼다.


“쯧쯧, 누굴 닮아서 도박을 좋아하는지.”


“누구긴 누구야. 당신이지. 하하하.”


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자 어머니가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당신이 그때 ‘자식 뽑기’만 제대로 했어도 말이야! ‘현자’나 ‘기사’가 나올 확률이 10퍼센트나 됐는데, 굳이 ‘백수’ 카드를 뽑아서 이 고생이잖아요!”


“아이 거참. 자식 뽑기가 마음대로 되나. 그래도 오늘은 금화 뽑았으니 좀 봐줘.”


어머니는 툴툴거리면서도 금화 주머니를 품에 안았다.


“흥! 둘째는 내가 뽑을 거야. 성전(Holy Temple)에 가서 내 손으로 직접 뽑을 거라고! 난 ‘대마법사’를 뽑을 자신 있어!”


밤바람이 창문 틈으로 들어와, 탁자 위의 촛불을 위태롭게 흔들었다. 이 주사위 같은 세상에서 내일은 또 어떤 숫자가 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밤이었다.


<끝>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악마의 장부와 게으른 음유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