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하 묘지의 붉은 술집
도시의 가장 깊은 곳, 지하 묘지 입구 옆에 자리한 허름한 술집 ‘까마귀 둥지’.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입구에는 눈이 먼 문지기가 서 있었는데, 그는 손님의 냄새만으로 주머니 사정과 절박함을 꿰뚫어 보았다.
“통과. 피비린내와 절망 냄새가 진동하는군.”
문지기가 녹슨 쇠창살을 옆으로 밀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달콤한 약초 냄새가 섞인 기묘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술집 안은 어두웠다. 천장에는 마른 약초 다발들이 박쥐처럼 매달려 있었고, 탁자 위에는 촛불 대신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이끼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구석 자리에는 한 청년이 엎드려 있었다. 그의 이름은 루카. 2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가진 것이라곤 낡은 가죽조끼와 구멍 난 장화뿐인 삼류 도둑이었다. 그는 싸구려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인생… 이번 생은 망했어.”
오늘 낮, 그는 귀족의 마차를 털려다 경비병에게 쫓겨 하수구에 처박혔다. 동료들은 이미 교수형을 당했고, 그에게 남은 건 땡전 한 푼 없는 빈털터리 신세뿐이었다.
그때, 맞은편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유령 같은 걸음걸이였다.
“젊은이 인생이 꽤나 고달픈 모양이구먼.”
루카가 고개를 들자, 최고급 비단 로브를 걸친 노인이 서 있었다. 그의 손가락에는 보석 반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촛불 빛을 받아 번쩍였다. 쭈글쭈글한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지만, 눈빛만은 맹수처럼 형형했다.
“누구시오? 내 술이라도 뺏어 먹으려고?”
루카가 으르렁거렸지만, 노인은 개의치 않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비단옷자락이 스치는 ‘사각’ 소리가 부드럽게 들렸다.
“내 이름은 발렌, 왕국 최고의 대상인이라네. 자네가 한탄하는 소리가 하도 구슬퍼서 와봤지.”
노인은 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 탁자에 ‘챙’ 하고 던졌다. 맑고 고운 금속음이 루카의 귓가를 때렸다.
“이걸로 제일 비싼 술이나 가져오게. 자네의 그 썩은 맥주 냄새는 더 이상 못 맡아주겠으니.”
2. 늙은 상인의 제안
곧이어 붉은색 액체가 담긴 크리스털 병이 탁자에 놓였다. ‘용의 피’라 불리는 최고급 와인이었다. 달콤하고 묵직한 포도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루카의 혀가 풀렸다.
“영감님은 좋겠수. 돈도 많고, 입고 있는 옷도 때깔이 다르잖아. 나 같은 놈은 평생 쥐새끼처럼 기어 다니다가 시궁창에서 죽을 운명이라고.”
노인은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루카를 응시했다.
“젊음. 자네에겐 젊음이 있지 않은가. 탱탱한 피부, 지치지 않는 심장, 맑은 눈… 그게 얼마나 큰 재산인지 모르는군.”
“젊음? 쳇. 그걸로 빵을 살 수 있나, 술을 살 수 있나? 젊어서 좋은 건 도망칠 때 숨이 덜 찬다는 것뿐이야.”
루카가 비아냥거리자 노인이 혀를 찼다.
“쯧쯧. 어리석긴. 내가 만약 자네 나이로 돌아간다면, 난 지금보다 열 배는 더 큰 부자가 될 자신이 있네. 자네처럼 멍청하게 시간을 낭비하진 않을 걸세.”
“뭐라고요? 이 늙은이가 돈 좀 있다고 사람을 무시해?”
루카가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쿠당탕’ 소리를 냈다. 하지만 노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앉게. 흥분하지 말고 내 제안을 들어봐. 나와… 바꾸지 않겠나?”
“뭐?”
노인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술병 옆에 놓인 작은 유리병을 가리켰다.
“이건 ‘영혼의 저울’이라는 마법 물약일세. 이걸 나눠 마시면, 두 사람의 영혼이 뒤바뀌지. 자네는 내 늙은 몸과 20만 금화를 가지고, 나는 자네의 젊은 몸과 가난을 가지는 거야.”
루카는 입을 떡 벌렸다.
“미친 소리! 그런 게 가능할 리가…”
하지만 노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늙고 병들었어. 매일 밤 기침 때문에 잠을 못 자고, 맛있는 고기를 씹을 이빨도 없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어. 하지만 자네 몸이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이번엔 완벽하게.”
루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20만 금화? 그 돈이면 성을 사고도 남는다. 평생 떵떵거릴 수 있다. 늙은 몸? 까짓것 하인들을 부리면 그만이다.
“정말입니까? 사기 치는 거 아니죠?”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노인은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뽕’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신비로운 오로라 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자, 선택하게. 시궁창 쥐로 살다가 죽을 텐가 아니면 늙은 사자로 떵떵거리며 살 텐가?”
루카는 망설임 없이 잔을 들었다.
“좋소! 바꿉시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쨍’ 하는 청아한 소리가 울리고, 붉은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3. 뒤바뀐 운명, 그리고 반전
순간, 세상이 빙글 돌았다. 루카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루카는 낯선 감각을 느꼈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손을 들어보니 쭈글쭈글한 노인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는 최고급 비단 로브가 감겨 있었다.
“으하하하! 성공이다! 성공이야!”
맞은편에서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루카의 옛 몸을 차지한 노인, 아니 이제는 ‘젊은 발렌’이 거울을 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이 탄탄한 근육! 부드러운 관절! 아아, 얼마 만인가!”
젊은 발렌은 펄쩍펄쩍 뛰며 환호했다.
반면, 늙은 몸이 된 루카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묵직한 금화 주머니와 각종 보석 반지가 손끝에 잡혔다.
“됐다… 드디어 나도 부자다!”
루카는 쉰 목소리로 웃었다. 비록 몸은 삐걱거렸지만, 20만 금화가 있으니 상관없었다.
젊은 발렌은 루카를 보며 씩 웃었다.
“이보게, 늙은이. 거래는 공평했네. 자네는 원하던 돈을 얻었고, 나는 기회를 얻었으니. 나는 이제 가보겠네. 이 귀한 시간을 1초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젊은 발렌은 바람처럼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발소리는 힘차고 경쾌했다.
루카는 사라지는 그를 보며 비웃었다.
“흥, 멍청한 늙은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난 돈이나 쓰며 편하게 살 거다.”
4. 3년 후의 재회
그리고 3년이 지났다.
어느 날, 루카(여전히 늙은 몸)는 자신의 호화로운 저택 테라스에 앉아 최고급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비단 이불을 덮고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사는 삶은 꽤 만족스러웠다.
그때, 정문에서 소란이 일었다.
“제발! 나리! 한 번만 뵙게 해 주십시오!”
경비병들에게 질질 끌려오는 꾀죄죄한 청년이 있었다. 루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바로 자신의 옛 몸을 가진 ‘젊은 발렌’이었다.
하지만 3년 전의 패기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옷은 누더기가 되었고, 얼굴에는 멍과 상처가 가득했다. 눈빛은 퀭했고, 몸에서는 시궁창 냄새가 났다.
“아니, 자네 아닌가? 그 대단한 ‘젊음’을 가지고 뭘 했기에 그 꼴인가?”
루카가 비웃으며 물었다. 젊은 발렌은 무릎을 꿇고 울먹였다.
“나리… 다시 바꿔주십시오. 제발!”
“뭐라고?”
“처음엔 자신 있었습니다. 200년 묵은 상술과 지혜가 있으니 금방 부자가 될 줄 알았죠. 그런데… 몸이 젊어지니 마음도 젊어지더군요.”
젊은 발렌은 고개를 떨구었다.
“술이 그렇게 맛있는 줄 몰랐습니다. 여자들이 그렇게 예뻐 보일 줄도 몰랐고요. 도박판의 짜릿함은 또 어떻고요. 머리로는 ‘일해야 해’라고 생각하는데,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정신 차려보니 도박 빚만 잔뜩 지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루카는 껄껄 웃었다.
“그럼 그렇지. 젊음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다. 유혹에 약하고, 무모하고, 멍청하지.”
“제발… 제 재산을 돌려주십시오. 다시 늙은이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이 지옥 같은 가난과 노동은 더 이상 못 견디겠습니다!”
젊은 발렌이 루카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루카는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경비병! 이 미친 거지를 끌어내라.”
“나리! 안 됩니다! 나리!”
젊은 발렌이 질질 끌려나가며 절규했다. 그 처절한 비명이 저택의 담벼락을 넘어 멀어졌다.
루카는 다시 와인잔을 들었다. 붉은 액체에 비친 자신의 늙은 얼굴이 보였다.
“휴… 다행이군.”
루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도 지난 3년간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관절통에 시달리느라 밤잠을 설쳤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되어 고생했다. 젊은 시절의 건강함이 그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방금 끌려나간 자신의 옛 몸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역시, 돈 많은 늙은이가 돈 없는 젊은이보다 백배 낫군.”
루카는 늙은 손가락으로 툭, 하고 와인잔을 쳤다. 맑은 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인생은 한 번 뿐이라서 다행이야. 두 번 살아봤자 똑같이 망칠 게 뻔하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