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스러운 복수의 의뢰
왕국 수도의 은밀한 밀실. 뚱뚱한 귀족 피에르 남작이 씩씩대며 양피지 뭉치를 탁자에 내던졌다.
“이 건방진 음유시인 놈이! 감히 내 딸 ‘루나’ 영애를 두고 ‘멧돼지 같은 코 고는 소리’라고 노래를 불러? 내 이놈을 반드시 죽여버리겠소!”
피에르 남작의 앞에 앉은 검은 로브의 사내, ‘그림자’는 킬킬거리며 의뢰서를 집어 들었다.
“루나 영애에게 그런 모욕을 주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군요. 하지만 남작님, 세상 어느 아비가 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암살자 길드의 VIP 고객이 되겠습니까? 고작 노래 한 곡 때문에 말입니다. 흐흐.”
“고작 노래라니! 감수성 예민한 내 딸이 그 노래를 듣고 식음을 전폐했소! 당장 처리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비용은?”
남작은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내밀었다.
“금화 5,000닢이오. 현찰로 가져왔소. 확실하게 처리해 주시오!”
“걱정 마십시오. 제 솜씨 아시지 않습니까?”
‘그림자’는 금화 주머니를 챙겨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남작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 빨리 처리해야 다음 의뢰도 받을 거 아니냐.”
남작은 품속에서 수정구를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의뢰 비용은 8,000닢입니다. 선금 4,000닢, 완료 후 4,000닢.]
[알겠소. 그 건방진 음유시인을 죽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피에르 남작은 쾌재를 불렀다. 진짜 의뢰인에게서 8,000닢을 받고, 가짜 암살자 행세를 하며 하청을 줘서 3,000닢을 떼먹는 이 천재적인 사업! 그는 이미 이 ‘중간 브로커’ 짓으로 성 한 채 값을 벌어들인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이 꼬리 물기 식 하청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2. 첫 번째 하청업자: ‘그림자’의 정체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림자’는 곧바로 허름한 여관의 뒷방으로 들어갔다. 로브를 벗자 드러난 얼굴은 동네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평범한 중년 사내 한스였다.
“휴, 늙은 귀족 놈 비위 맞추기 힘들군.”
한스는 금화 주머니에서 2,000닢을 꺼내 자신의 금고에 넣었다. 그리고 남은 3,000닢을 들고 뒷골목의 도박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험상궂게 생긴 용병 ‘붉은 도끼’가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어이 도끼. 일이다. 금화 3,000닢짜리.”
“또 그 남작이냐? 징글징글하구만. 이번엔 또 누구야?”
“음유시인 놈이야. 아, 그리고 저번 의뢰 말인데, ‘가웨인’이라는 기사 놈 처리했어?”
“아, 그놈? 처리했지. 아주 깔끔하게.”
‘붉은 도끼’는 씩 웃으며 금화 주머니를 낚아채 갔다. 한스는 안도했다. 사실 그는 살인은커녕 닭 한 마리도 못 잡는 위인이었다. 우연히 남작의 의뢰 편지를 잘못 배달받은 것을 계기로, 이 위험한 ‘하청 놀이’에 발을 들인 것이었다.
3. 두 번째 하청업자: ‘붉은 도끼’의 진실
돈을 받은 ‘붉은 도끼’는 곧장 사창가로 달려갔다. 그는 품에 안긴 창녀에게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오빠가 오늘 큰 건 하나 물어왔다. 금화 3,000닢짜리!”
하지만 그가 술에 취해 잠들자, 창녀는 조용히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내 1,000닢을 챙기고, 나머지 2,000닢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기다리던 꼽추 노인에게 돈을 건넸다.
“영감, 일거리에요. 금화 2,000닢. 이번엔 음유시인이라는데.”
꼽추 노인은 돈 냄새를 맡으며 낄낄거렸다.
“알겠네, 알겠어. 내 독약이면 심장마비로 위장하는 건 일도 아니지.”
사실 ‘붉은 도끼’ 역시 겁쟁이였다. 덩치만 컸지 칼싸움은 질색이었다. 그는 의뢰를 받을 때마다 동네의 독살 전문가인 꼽추 노인에게 헐값에 일을 떠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4. 숲 속의 복수극
다음 날 아침. 피에르 남작은 마차를 타고 숲길을 달리고 있었다. ‘진짜’ 암살자를 만나 잔금을 치르기로 한 날이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검은 망토를 두른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작은 거만하게 차 문을 열었다.
“제 소문은 들으셨겠지만, 의뢰인은 얼굴을 보면 안 되오. 돈은 가져왔소?”
남작이 묻자, 여인은 망토 자락을 걷어 올렸다. 거기엔 돈 가방 대신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이 들려 있었다.
“이 쓰레기 같은 놈!”
“히익!”
“네가 우리 오빠, ‘가웨인’ 기사를 죽였지?! 내가 다 알아!”
여인은 남작의 목에 칼을 겨눴다. 남작은 기겁하며 손을 저었다.
“자, 잠깐! 오해오! 나는 그냥 중간 브로커일 뿐이오! 진짜로 죽인 놈은 따로 있어! 나는 심부름꾼이라고!”
“닥쳐! 돈 받은 증거가 다 있는데 어디서 오리발이야?”
“아이고, 제발! 진짜 범인을 알려주겠소! 그놈은 ‘그림자’라는 놈이오! 지금 당장 그놈을 불러내겠소!”
남작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림자’ 한스에게 마법 통신을 보냈다.
그날 저녁, 숲 속의 폐가.
남작의 호출을 받고 신나서 달려온 한스는 들어서자마자 목에 칼이 들어왔다.
“너였구나! 우리 오빠를 죽인 놈이!”
“흐익! 살려주세요! 저는 그냥 빵 굽는 사람입니다! 진짜 범인은 ‘붉은 도끼’라는 용병이에요! 저는 그냥 중간에서 수수료만 챙긴 겁니다!”
한스 역시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었다. 여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이거 완전히 쓰레기 집합소구만. 좋아, 그 도끼란 놈도 불러.”
한 시간 뒤. ‘붉은 도끼’가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다가 기절초풍했다.
“으악! 이게 뭐야!”
“네가 내 오빠 가웨인을 죽였지? 죽어라!”
“자, 잠깐! 나 아니야! 나는 그냥 술값이나 벌려고 폼 잡은 거야! 진짜 범인은 저기 사는 꼽추 영감이라고! 그 영감이 독약으로 죽인 거야!”
세 남자가 줄줄이 무릎을 꿇고 있는 꼴은 가관이었다. 여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좋아. 그 영감탱이한테 연락해. 당장.”
‘붉은 도끼’는 덜덜 떨며 꼽추 노인에게 전령을 보냈다.
5. 마지막 연결고리
잠시 후, 꼽추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헐레벌떡 나타났다.
“아이구, 무슨 일이길래 이 야밤에… 헉!”
노인은 세 명의 덩치와 한 명의 여인이 자신을 노려보자 뒷걸음질 쳤다.
“영감! 당신이 가웨인을 독살했지? 빨리 말해! 안 그러면 우리 다 죽어!”
‘붉은 도끼’가 소리쳤다.
“무, 무슨 소리야! 난 독약을 만들 줄만 알지, 사람 죽일 담력은 없어! 난 그냥… 난 그냥 의뢰 들어오면 ‘마스터’한테 편지 보내는 게 다야!”
“뭐라고? 또 있어?”
여인은 이제 화를 낼 기력도 없었다.
“그럼 그 ‘마스터’라는 놈한테 연락해. 지금 당장.”
꼽추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작은 마법 피리를 꺼냈다.
“이 이걸 불면… 마스터가 나타납니다.”
노인이 피리를 ‘삐리리’ 불었다.
모두가 침을 삼키며 문쪽을 바라보았다. 진짜 살인마, 그 잔혹한 ‘마스터’는 누구일까?
띠링.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문 쪽이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칼을 들고 서 있던 여인의 허리춤이었다. 여인의 허리춤에 매달린 마법 통신구가 붉게 깜빡이고 있었다.
“어…?”
“어…?”
세 남자와 꼽추 노인이 입을 떡 벌렸다.
여인은 자신의 통신구를 내려다보았다.
[수신: 꼽추 영감 / 내용: 가웨인 건 처리 완료. 다음 타깃은 음유시인.]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며칠 전, 자신이 처리했던 ‘가웨인’이라는 기사. 그의 아내가 현장을 목격하고 비명을 질렀었다.
“당신… 살인 청부업자의 조수인가요? 남편만 죽여준다면 상관없어요.”
여인은 혀를 찼다.
“쳇. 이게 이렇게 돌아오나.”
그녀는 칼을 고쳐 쥐며 네 명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희 말이 맞아. 이 나라 유통 구조가 썩어빠졌어. 중간에서 얼마나 해처먹는 거야, 대체.”
그녀의 눈빛이 번뜩였다.
“다음부턴 직거래만 해야겠네. 수수료 떼먹는 기생충들부터 청소하고 말이야.”
어두운 폐가 안, 여인의 칼날이 달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그리고 곧, 네 남자의 비명소리가 숲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다음 날 아침, 광장 게시판]
[공지: 살인 청부업자 직거래 환영. 중간 마진 0%. 확실한 서비스 보장. - 마스터 -]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공지를 보며 수군거렸다.
“요즘은 암살자도 직거래가 대세인가 봐?”
“그러게. 물가가 너무 올랐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