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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슬라임의 비명과 개미들의 장송곡

by 김경훈


1. 은밀한 지하실의 속삭임


왕국 수도의 번화가 뒷골목, 간판도 없는 허름한 여관 지하. 이곳은 선택받은 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다는 비밀 클럽 ‘미다스의 눈’의 회합 장소였다.


두꺼운 참나무 문을 밀고 들어가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기묘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싸구려 향수 냄새가 섞인 땀 냄새, 촛농 타는 냄새,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내뿜는 비릿한 쇠 냄새였다.


지하실은 어두웠지만, 수십 개의 촛불이 일렁이며 사람들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비췄다. 그곳에는 빚에 쪼들리는 몰락 귀족, 대박을 꿈꾸는 상인, 그리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농부들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 있었다.


단상 위에는 보랏빛 벨벳 로브를 걸친 사내, 자칭 ‘왕국 최고의 경제 연금술사’ 제논이 서 있었다. 그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했다.


“여러분, 아직도 땀 흘려 밭을 갈고, 목숨 걸고 몬스터를 잡아서 돈을 버십니까? 그건 하수나 하는 짓입니다!”


제논이 지팡이로 바닥을 ‘쿵’ 내리쳤다. 둔탁한 진동이 지하실 바닥을 타고 발바닥에 전해졌다.


“이제는 ‘돈이 돈을 버는’ 시대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께만 공개할 특급 정보, 바로 ‘황금 슬라임 증권’입니다!”



2. 차트 대신 수정구슬


제논은 단상 위에 놓인 거대한 수정구슬을 어루만졌다. 수정구슬 안에서는 금빛 가루가 회오리치며 화려한 그래프… 아니, 빛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보십시오! 동방 대륙에서 발견된 이 희귀한 ‘황금 슬라임’은 흙을 먹고 순도 99%의 황금을 배설합니다. 현재 마리당 가치는 금화 10닢. 하지만 다음 달, 슬라임이 분열(번식)을 시작하면 가치는 100배, 아니 1,000배로 뛸 것입니다!”


좌중에서 “오오!”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구석에 앉아 있던 피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는 평생 빵집에서 밀가루 반죽이나 하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옆집 찰스가 이 투자로 마차를 샀다는 소문에, 부모님이 물려주신 빵집 문서까지 저당 잡히고 이곳에 왔다.


그때, 제논이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아무나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직 저, 제논을 믿고 따르는 ‘리딩(Reading)’ 회원님들에게만 기회를 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 제가 신호를 보내면 매수하십시오. 자, 지금입니다! 매수!”



3. 광기의 매수 주문


“저요! 제가 사겠습니다!”

“여기 금화 500닢이오! 전 재산이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주머니를 열었다. 금화가 탁자에 쏟아지는 ‘좌르르’ 소리가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서로 먼저 사겠다며 어깨를 부딪치고, 고함을 지르는 통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피터도 질 수 없었다. 그는 품속에 고이 모셔둔 전 재산, 금화 100닢이 든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단상 위로 던졌다.


“저도! 저도 껴주시오!”


제논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돈주머니를 챙기고, 대신 손바닥만 한 양피지 조각을 나눠주었다.


[황금 슬라임 10마리 지분 증서]

발행인: 대연금술사 제논


양피지는 빳빳하고 매끄러웠다. 피터는 그 종이를 보물처럼 가슴에 품었다. 종이에서 나는 잉크 냄새가 마치 돈 냄새처럼 향긋하게 느껴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부자입니다! 존버(존중하며 버티기)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4. 떡상의 환각


그날 이후, 피터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그는 더 이상 빵 반죽을 치대지 않았다. 대신 매일 아침 광장 게시판에 붙는 ‘슬라임 시세표’를 확인하는 게 일과가 되었다.


“어이 피터! 오늘 슬라임 가격 봤어? 또 올랐어! 어제보다 30%나 올랐다고!”


친구 찰스가 흥분해서 달려왔다.


“정말? 그럼 내 100닢이 벌써 130닢이 된 거야?”


“그렇다니까! 제논 님의 리딩은 틀리는 법이 없어. 들리는 소문에는 왕실에서도 투자하려고 줄을 섰다더라.”


피터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는 빵집 간판을 떼어내고, 상상 속에서 자신만의 성을 쌓아 올렸다. 최고급 비단옷의 감촉, 기름진 스테이크의 맛, 하인들의 깍듯한 인사…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했다.


거리에는 온통 ‘황금 슬라임’ 이야기뿐이었다. 대장장이도 망치질을 멈추고 슬라임 이야기를 했고, 시장의 아주머니들도 채소값 대신 슬라임 시세를 논했다.


“이거, 안 사면 바보라니까?”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도시는 휘감았다. 욕망의 거품은 한껏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팽팽해졌다.



5. 파멸의 날


운명의 날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제논이 예언했던 ‘대분열의 날’. 피터는 새벽같이 회합 장소인 지하실로 달려갔다. 배당금을 받아 떵떵거리며 살 생각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하지만 지하실 입구에는 이미 수백 명의 사람이 몰려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기대에 찬 웅성거림이 아니었다. 비명과 욕설, 그리고 절망적인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피터가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땀 냄새와 섞인 공포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단상 위에는 제논이 없었다. 대신, 깨진 수정구슬 조각만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수정구슬 파편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 바스락’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벽에는 붉은색 페인트로 갈겨쓴 글씨가 보였다.


[슬라임이… 녹아버렸습니다.]


“녹아? 슬라임이 녹다니?”


그때, 누군가가 구석에 놓인 상자를 발로 찼다. 상자가 넘어지면서 안에서 끈적한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철퍼덕.


그것은 황금이 아니었다. 누런색 물감을 섞은 진흙 반죽이었다. 시큼하고 역겨운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이거… 그냥 진흙이잖아! 똥 냄새나는 진흙!”


누군가 절규했다.


“제논 놈은 어디 갔어! 내 돈! 내 돈 내놔!”


사람들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탁자가 부서지고, 의자가 날아다녔다. 피터는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지분 증서’ 양피지가 땀에 젖어 눅눅해졌다.


그때, 옆에 있던 노인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제… 어제 제논 놈이 ‘긴급 매수 신호’를 보냈어. 자기 물량을 우리한테 다 떠넘기고 도망간 거야. 설거지… 우리가 설거지를 당한 거라고!”



6. 차가운 현실


소동이 끝나고, 지하실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남은 건 깨진 꿈의 파편과 진흙 범벅이 된 바닥뿐이었다.


피터는 터덜터덜 밖으로 나왔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지만, 그의 눈에는 세상이 잿빛으로 보였다. 주머니에는 땡전 한 푼 없었다. 빵집은 넘어갔고, 빚쟁이들이 곧 들이닥칠 것이다.


그때, 멀리서 음유시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욕망은 달콤한 꿀과 같아서~ 멍청한 파리들이 꼬여드네~ 윙윙거리는 날갯짓 소리에~ 거미는 조용히 미소 짓네~”


피터는 주머니 속의 눅눅해진 양피지 조각을 꺼냈다. 잉크가 번져 ‘황금’이라는 글자가 ‘황천’처럼 보였다.


그는 양피지를 구겨 바닥에 던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만큼 젖어버린 종이 뭉치는 길가의 말똥 옆에 처박혔다.


“배고프다…”


피터의 꼬르륵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스테이크를 꿈꾸던 배속에서 이제는 쓰린 위액만이 요동치고 있었다.


[왕국 뉴스 속보]

[사기꾼 연금술사 제논, 옆 나라로 순간이동 도주 성공… ‘개미 투자자’들 집단 공황 상태.]


바람이 불어와 길가에 버려진 양피지 조각을 굴렸다. 그것은 마치 낙엽처럼 굴러가다 하수구 구멍으로 쏙 빠져 사라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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