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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머리, 그리고 영혼의 지식iN

by 김경훈


1. 줄을 서시오, 무지한 양들이여


왕국 수도의 중앙 광장, 가장 목 좋은 곳에는 기괴한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거대한 황동으로 만든 돔 형태의 건물, 그 입구에는 [무엇이든 물어보살 - 현자의 머리]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곳은 왕국 최고의 핫플레이스였다. 아침 해가 뜨기도 전부터 수백 명의 사람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행색은 다양했다. 논문을 쓰기 귀찮은 아카데미 학생,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주부, 연애편지를 대신 써달라는 기사, 그리고 정적을 제거할 독약 레시피를 묻는 귀족까지.


이 건물의 주인이자, ‘현자의 머리’ 관리자인 바르톨은 매표소에 앉아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자자, 밀지 마시오! 질문 하나당 은화 10닢! 심화 질문은 금화 1닢! 창작(시, 소설, 연애편지) 요청은 금화 5닢이오!”


바르톨은 뚱뚱한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돈을 셌다. 촤르륵, 찰그랑. 동전들이 부딪치는 소리는 그에게 천상의 음악이었다.


“다음 손님!”


쭈뼛거리는 시골 청년이 들어왔다. 청년은 손에 든 꼬깃꼬깃한 양피지를 내밀었다.


“저… 옆집 처녀 엘자한테 고백하고 싶은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좀… 있어 보이게 써주실 수 있나요?”


바르톨은 귀찮다는 듯 하품을 하며, 청년의 양피지를 낚아채 옆에 있는 거대한 기계 장치의 투입구에 넣었다.


이 기계 장치의 핵심은 단상 위에 놓인 ‘거대한 청동 머리’였다. 눈은 루비로 되어 있고, 입은 벌려져 있는 이 기괴한 두상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위잉… 덜컹, 덜컹.


바르톨이 레버를 당기자, 청동 머리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내부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취이익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청동 머리의 입에서 길게 이어진 양피지 띠가 찌지직 소리를 내며 토해져 나왔다. 바르톨은 그 종이를 찢어 청년에게 건넸다.


“자, 여기. 대륙 최고의 음유시인 스타일로 뽑혔군.”


청년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종이를 읽었다.


[오, 나의 엘자여. 그대의 눈동자는 마치 아침 이슬을 머금은… (중략) … 오늘 밤 나와 함께 감자 수프를 먹지 않겠소?]


“우와! 대단해요! 감자 수프라니, 엘자가 감자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


청년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바르톨은 콧방귀를 뀌었다.


“어떻게 알긴. 이 동네 여자들은 다 감자 좋아하니까 대충 찍은 거지. 다음!”



2. 지하실의 유령 대학원생들


손님들은 ‘현자의 머리’가 고대 마법과 최첨단 연금술의 결정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청동상 아래, 지하 깊은 곳에는 추악한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지하실의 공기는 탁했다. 썩은 종이 냄새, 잉크의 비릿한 향, 그리고 수백 명의 존재가 내뿜는 한숨 섞인 냉기가 가득했다.


그곳은 거대한 도서관이자 감옥이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긴 책들이 꽂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 놓인 책상에는 반투명한 영혼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미친 듯이 깃펜을 놀리고 있었다.


그들은 ‘지식의 망령들’이었다.

살아생전 지식에 목말라했거나,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다가 저주를 받아 죽은 학자, 마법사, 그리고 논문을 못 마치고 과로사한 대학원생들의 영혼이었다.


“야! 3번 테이블! 연애편지 주문 들어왔잖아! 빨리 안 써?”


지하실의 관리자이자, 바르톨의 하수인인 임프(Imp) ‘고블’이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은 영혼을 타격할 수 있는 마법 채찍이었다.


짜악!


“아악! 쓰고 있어요! 쓰고 있다고요!”


3번 테이블의 망령, 필립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생전에 왕립 아카데미 문학과 수석이었으나, 졸업 논문 심사를 앞두고 심장마비로 죽은 비운의 천재였다.


“제발 좀 참신한 것 좀 써봐! 맨날 ‘아침 이슬’, ‘장미꽃’… 지겹지도 않냐? 고객 만족도가 떨어지잖아!”


고블이 소리쳤다.


“아니, 하루에 연애편지만 500통을 쓰는데 어떻게 매번 참신해요! 저도 소재 고갈이라고요!”


필립이 울먹이며 깃펜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깃펜은 마법으로 다시 그의 손에 들러붙었다.


이곳의 시스템은 잔혹했다.

지상의 투입구로 질문이 들어오면, 지하의 망령들이 실시간으로 책을 뒤지고 머리를 짜내어 답을 작성한다. 그리고 그 답을 파이프를 통해 청동 머리로 올려 보내는 것이다. 일명 ‘수동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아니 ‘조상님 지능(Ancestral Intelligence)’이었다.


하지만 망령들이 이 짓을 하는 이유는 채찍 때문만은 아니었다.


벽면에는 거대한 마법 전광판이 걸려 있었고, 그곳에는 망령들의 [채택 순위]가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이번 달 채택 왕]

1위: 대마법사 멀린 (채택수: 10,432건) - 보상: 이승 1분 관람권

2위: 연금술사 파라켈 (채택수: 9,800건) - 보상: 최고급 잉크

999위: 대학원생 필립 (채택수: 3건) - 보상: 채찍질 100대


“채택! 채택을 받아야 해!”


구석에 있던 한 망령이 중얼거렸다. 그는 질문이 내려오기도 전에 미리 답안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질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건 케이스 바이 케이스입니다’라고 써놓으면 절반은 먹고 들어가!”


이곳은 지옥의 ‘지식iN’이었다. 망령들은 ‘성불(천국행)’이라는 희미한 희망, 혹은 ‘내공(채택 포인트)’을 모아 등급을 올리려는 헛된 욕망 때문에, 서로를 짓밟으며 답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3. 왕의 질문과 할루시네이션(환각)


어느 날 오후, 바르톨에게 비상이 걸렸다.

가게 문이 쾅 열리더니, 왕실 근위대가 들이닥친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화려한 망토를 두른 국왕이 직접 행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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