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물의 기억, 그리고 바뀐 우산
오후 3시의 사무실은 건조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복사기가 돌아가는 윙윙거리는 소음, 간간이 터지는 기침 소리. 보영에게는 이 모든 소리가 마치 거대한 수조 속에서 듣는 것처럼 웅웅거리며 왜곡되어 들렸다.
보영은 책상 서랍을 열어 약통을 꺼냈다. 하얀 알약 두 개. 습관처럼 입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차가운 액체가 현실 감각을 잠시나마 되돌려주었다. 그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남들보다 조금 예민하고, 가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버릇이 있는 조용한 대리.
"보영 대리님, 잠깐 시간 괜찮아요?"
파티션 너머로 현우 과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단정한 인상에 사람 좋은 미소를 가진 그는 사내에서 평판이 좋았다. 보영에게도 그는 그저 일 잘하고 매너 좋은 상사일 뿐이었다. 아직까지는.
"네, 과장님. 무슨 일이세요?"
현우의 표정이 곤란한 듯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이런 부탁해서 정말 미안한데... 오늘 급한 미팅이 잡혀서 도저히 시간을 뺄 수가 없어서요. 혹시 퇴근길에 우리 민서 좀 픽업해 줄 수 있을까요? 유치원이 보영 대리님 집 가는 방향이거든요."
사적인 부탁이었다. 평소의 그 답지 않은 요청에 보영은 잠시 망설였지만, 현우의 눈 밑에 드리운 짙은 피로감이 거절을 막았다.
"아... 네, 그럴게요. 주소만 알려주세요."
"정말 고마워요. 나중에 밥 한번 살게요. 진짜로."
현우는 안도한 듯 깊은숨을 내쉬었다. 보영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엑셀 화면이 물결치듯 일렁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억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체육관 창고였다.
매트에서 나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보영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밖에서는 아이들의 환호성과 공 튀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보영의 귀에는 그 소리가 마치 날카로운 비명처럼 들렸다.
'쟤가 걔야? 귀신 본다는 애.'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