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chitecture of Laphroaig
토요일 밤. 대구 삼덕동의 공기는 차갑고 건조하다.
나는 오클리 아이자켓 선글라스를 고쳐 쓴다. 밤에도 선글라스를 끼냐고? 이건 패션이 아니라 나의 갑옷(Armor)이다. 세상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반사해 버리는 반사판이자, 나의 포커페이스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
내 옆에는 코드네임 'Bobo', 나의 약혼녀이자 물주가 서 있다. 그리고 내 발치에는 34kg의 생체 병기, 탱고가 대기 중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위스키 바.
가난한 연구원에게 위스키란 사치(Luxury)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맛을 보지 않으면 연구할 맛도 안 나는 법. 오늘 밤, 나는 내 감각을 무기로 자본주의의 심장부를 해킹하러 간다.
[장면 1. 자본주의의 냄새]
바의 문을 열자마자 묵직한 오크통 냄새와 가죽 소파 냄새가 훅 끼쳐온다.
재즈 선율이 낮게 깔린다. 베이스 소리가 바닥을 타고 내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분위기는 합격(Pass). 하지만 가격이 문제다.
"어서 오세요. 두 분이신가요?"
바텐더의 목소리. 정중하지만 날카롭다. 그는 내 선글라스와 탱고를 보고 0.5초간 멈칫했다.
나는 [B급 하드보일드] 모드로 쿨하게 대꾸했다.
"세 명입니다. 저와, 레이디, 그리고 털북숭이 보디가드."
우리는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보보가 메뉴판을 펼치는 소리가 들린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무겁다. 종이 재질이 두껍다는 건, 메뉴 가격에 '0'이 많이 붙어 있다는 신호(Signal)다.
"자기야, 여기 글렌피딕 15년 산이 2만 5천 원인데?"
보보의 속삭임.
내 심박수가 빨라진다. 내 시급보다 비싸다. 하지만 티를 내선 안 된다. 나는 고독한 미식가 아니 고독한 연구원이니까.
"괜찮아. 오늘은 기분 내는 날이니까. 내가 쏠게. (마음속으로는 할부 3개월을 계산한다.)"
[장면 2. 블라인드 해킹 (Blind Hacking)]
"주문하시겠습니까?"
바텐더가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서 희미한 시트러스 향과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
"추천해 주시죠. 아주 독하고, 복잡한 녀석으로."
나의 허세에 바텐더가 흥미롭다는 듯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럼, 블라인드 테스트 어떠십니까? 제가 드리는 술의 브랜드를 맞히시면, 이 잔은 서비스로 드리죠."
도전장(Challenge).
이것은 단순한 술자리가 아니다. 내 지갑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다.
보보가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자기야, 그냥 사 마셔.'라는 신호다. 하지만 남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Deal. 받겠습니다."
잠시 후, 묵직한 온더락 잔이 내 앞에 놓였다.
나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보이지 않지만 폼이다), 잔을 들어 올렸다.
오직 감각 데이터만으로 이 녀석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
[블라인드 해킹 가동 (Blind Hacking Initiated)]
Step 1. 후각 데이터 수집 (Olfactory Scan)
코를 잔에 박는다.
첫 향은 강렬한 소독약 냄새(Iodine). 병원 응급실 냄새다.
그 뒤로 따라오는 젖은 흙냄새와 해초 냄새. 그리고 훈제 베이컨 향.
-> 분석: 피트(Peat) 향이 강하다. 스코틀랜드 아일라(Islay) 지역 출신이다.
Step 2. 청각 데이터 수집 (Auditory Scan)
잔을 가볍게 흔든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묵직하다. 점성이 높다(High Viscosity).
알코올 도수가 40도를 넘는다. 43도 이상 추정.
Step 3. 미각 데이터 수집 (Gustatory Scan)
한 모금 머금는다.
혀끝을 때리는 스파이시함. 목 넘김 후 올라오는 달콤한 바닐라 향.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스모키한 여운(Finish).
이 독보적인 소독약 맛.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 맛.
[해킹 완료 (Decoding Complete)]
나는 잔을 내려놓고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았다. 그리고 낮고 깔끔한 목소리로 정답을 선언했다.
"라프로익(Laphroaig) 10년. 아일라의 괴물."
[장면 3. 승리의 대가]
바 안의 공기가 2초간 정지했다.
바텐더가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정확합니다. 손님, 후각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약속대로 이 잔은 서비스입니다."
보보가 내 어깨를 감싸며 속삭였다.
"오~ 김 박사. 오늘 좀 섹시한데? 돈 굳었네?"
"훗. 이게 바로 생존형 미각이라는 거야."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남은 위스키를 털어 넣었다.
공짜 술이라 그런지 더 달다. 이것이 승리의 맛(Taste of Victory).
탱고가 내 발등에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녀석, 자기도 한 입 달라는 건가. 미안하지만 이건 성인용 연료다.
[에필로그]
바를 나서는 길. 대구의 밤바람이 술기운 오른뺨을 때린다.
보보는 대리기사를 부르고, 나는 탱고의 리드줄을 잡고 폼을 잡고 서 있다.
오늘의 미션 성공. 2만 원을 아꼈다.
하지만 안주로 시킨 치즈 플레이트가 3만 원이었다는 건 함정.
결국 마이너스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나보다 한 수 위다.
"가자, 탱고.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자."
나의 화려한 외출은 결국 라면 엔딩이다. 이것이 B급 하드보일드 라이프.
그래도 보보의 자동차 조수석은 따뜻하겠지. 그거면 됐다.
[주석: 음성 메모]
위스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냄새나는 대로 맛이 난다.
하지만 세상은 냄새나는 것들이 향기로운 척을 한다.
오늘 내 [블라인드 해킹]은 성공적이었다.
다만, 내 지갑 사정은 해킹하지 말 것. 보안 등급 'Top Secret'이다. 너무 비참하니까.
보보가 손을 잡는다. 그녀의 손은 라프로익보다 따뜻하고 중독성 있다.
오늘 밤은 이걸로 충분하다. O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