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chitecture of Communion
우리는 ‘통제(Control)’를 능력이라 믿는다. 고삐를 죄고, 채찍을 휘두르며, 대상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강제로 이끄는 것을 리더십이라 착각한다. 특히 속도가 미덕인 세상에서 우리는 경주마의 눈에 ‘곁눈 가리개(Blinders)’를 씌운다. 앞만 보고 달리라고. 옆을 보는 호기심은 승리를 방해하는 불필요한 노이즈일 뿐이라고.
그러나 그 가리개는 말의 시야뿐만 아니라, 말의 ‘마음’을 가린다. 시야가 차단된 초식동물은 공포에 질리고, 그 공포는 폭주를 낳는다. 시스템은 효율을 위해 생명체의 본성을 거세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채찍 대신 ‘속삭임’으로 그 닫힌 마음을 여는 사람들이 있다. ‘호스 위스퍼러(Horse Whisperer)’. 그들은 말의 귀에 명령을 때려 박는 대신, 나직한 숨결을 불어넣어 ‘관계’의 아키텍처를 재설계한다.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진정한 복종은 공포가 아니라 ‘안심’에서 나오며, 가장 빠른 속도는 강제가 아니라 ‘교감’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것은 눈(Visual)이라는 가리개를 쓴 채 살아가는 한 남자가 말(Horse)이라는 거대한 타자(他者)를 만나, 비언어적 소통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게 된, 어느 흙냄새 짙은 오후의 기록이다.
1. 낯선 냄새, 그리고 진동
대구 달성군 가창면의 한적한 산자락. 김경훈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코를 킁킁거렸다. 도시의 매연이나 연구실의 종이 냄새와는 차원이 다른, 원초적이고 거친 냄새가 그를 덮쳤다. 건초 냄새, 톱밥 냄새, 그리고 거대한 짐승들이 내뿜는 땀과 배설물의 냄새.
“으, 냄새 강렬한데?” 보보가 코를 막으며 웃었다. 그녀는 오늘, 김경훈에게 ‘새로운 데이터’를 입력해 주겠다며 이곳 승마 클럽으로 그를 데려왔다.
“자기야, 여기 오니까 당신 눈빛이 달라지는데? ‘연구 모드’가 아니라 ‘야생 모드’야.”
김경훈은 웃으며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글쎄. 냄새는 좀 지독하지만, 소리는 좋네.”
그의 귀에는 말들이 푸르르 콧김을 내뿜는 소리, 말굽이 흙바닥을 다지는 둔탁한 진동,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선명하게 입력되고 있었다.
그의 곁에 있던 안내견 탱고는 평소와 달랐다. 녀석은 꼬리를 다리 사이로 살짝 말아 넣고, 김경훈의 다리에 몸을 딱 붙였다. 자신보다 열 배는 더 크고 낯선 짐승들의 기척에, 훈련된 안내견조차 본능적인 긴장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괜찮아, 탱고. 쫄지 마. 네가 더 귀여워.” 김경훈이 녀석의 등을 토닥였다.
그때, 마방 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발소리가 독특했다. 무겁지만 규칙적인, 가죽 부츠가 흙을 밟는 소리.
“어서 오십시오. 예약하신 김경훈 님 일행이시죠?”
목소리는 낮고 굵었지만, 거칠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첼로 현을 켜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재활 승마와 말 조련을 담당하고 있는 강준혁 코치입니다.”
2. 가리개, 혹은 시야의 차단
강 코치는 그들을 마방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검은색 털이 윤기 흐르는(보보의 설명에 따르면) 거대한 말 한 마리가 불안한 듯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이 녀석 이름은 ‘블랙’입니다. 경주마 출신이죠.” 강 코치가 말을 진정시키며 설명했다. “은퇴하고 여기로 왔는데, 아직도 트랙을 달릴 때의 습관이 남아서 예민합니다.”
김경훈은 ‘경주마’라는 단어에 귀를 기울였다.
“습관이라뇨?”
“곁눈 가리개요.” 강 코치가 씁쓸하게 말했다. “경주마들은 앞만 보고 달리게 하려고 눈가에 가죽 조각을 붙입니다. 말은 원래 시야가 350도나 되는 동물인데, 그걸 억지로 차단해 버리니… 세상이 안 보인다는 공포 때문에 미친 듯이 달리는 거죠. 일종의 ‘공포를 이용한 효율성’입니다.”
김경훈은 그 말에 전율했다. 시야의 차단. 그것은 그가 15세 때 겪었던 사건과 본질적으로 같았다. 하지만 차이가 있었다. 김경훈에게 시야 차단은 ‘사고’였지만, 이 말에게는 인간이 강요한 ‘시스템’이었다.
“저 녀석은 지금도 가끔, 가리개가 없는데도 세상이 좁아진 것처럼 불안해합니다. 호기심을 거세당한 대가죠.”
보보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너무 잔인하네요. 성과를 내려고 눈을 가리다니.”
그러자 김경훈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사람도 똑같아, 보보. ‘성공’이라는 목표만 보고 달리느라, 주변의 풍경이나 타인의 감정 같은 건 보지 못하게 스스로 ‘가리개’를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 민준 씨도 그랬고.”
3. 속삭임의 아키텍처
강 코치는 불안해하는 블랙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김경훈의 귀에도 들릴까 말까 한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것은 언어라기보다는 바람 소리나 콧노래에 가까웠다.
놀랍게도, 발을 구르던 말이 서서히 진정하기 시작했다. 뻣뻣했던 목 근육이 풀리고,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방금… 뭐 하신 겁니까?” 김경훈이 놀라 물었다. “주문을 외우셨나요?”
“비슷합니다.” 강 코치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쪽 업계에서는 ‘호스 위스퍼링(Horse Whispering)’이라고 하죠. 말에게 속삭이는 겁니다. 큰 소리로 명령하면 말은 ‘복종’하지만, 속삭이면 말은 ‘경청’합니다. ‘너를 해치지 않아. 우리는 연결되어 있어’라는 신호를, 소리의 진동과 호흡으로 전달하는 거죠.”
김경훈은 이 ‘속삭임의 아키텍처’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것은 그가 연구하는 ‘정보 접근성’의 본질과 닿아 있었다.
시스템(인간)이 사용자(말)에게 일방적으로 정보를 주입(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불안을 이해하고 그 주파수에 맞춰 데이터를 전송(속삭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인터페이스였다.
“박사님도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강 코치가 제안했다.
“제가요? 전… 앞이 안 보이는데요. 말이 놀라지 않을까요?”
“오히려 더 잘하실 겁니다. 말은 시각보다 촉각과 청각에 더 예민하니까요. 박사님의 그 ‘다른 눈’을, 이 녀석도 알아볼 겁니다.”
김경훈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탱고에게 “기다려”라고 속삭인 뒤, 강 코치의 도움을 받아 말의 목덜미에 손을 댔다.
따뜻했다. 그리고 거대했다.
그의 손바닥을 통해, 말의 굵은 혈관에서 뛰는 맥박과, 근육의 미세한 떨림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의 압도적인 ‘실존’이었다.
그는 말의 귀에 대고, 평소 탱고에게 하듯, 그리고 보보에게 하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 안녕, 블랙. 나도 너처럼, 앞이 잘 안 보여. 우린 꽤 닮았네. 무서워하지 마. 나도 너 안 무서워할게.”
그의 목소리에는 익살 대신, 깊은 공명(Resonance)이 담겨 있었다. 말이 고개를 숙여, 김경훈의 어깨에 콧김을 불어넣었다. 뜨겁고 축축한 바람. 그것은 말의 대답이었다. ‘접속’이 완료되었다.
4. 탱고, 나의 위스퍼러
체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차 안은 조용했다. 김경훈은 아직 손끝에 남아있는 말의 체온을 되새기고 있었다.
“자기야.” 보보가 운전대를 잡으며 말했다. “아까 보니까, 당신 진짜 소질 있더라. 나중에 연구소 잘리면 가창에 와서 말이나 키워. ‘블라인드 호스 위스퍼러’. 영화 제목 같지 않아?”
“하하, 그럴까.” 김경훈이 웃었다. 그는 뒷좌석에서 코를 골며 자는 탱고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보보. 오늘 강 코치님을 보면서 깨달은 게 있어.”
“뭔데?”
“나는 내가 탱고를 ‘인도’한다고 생각했어. 내가 명령하고, 탱고가 따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반대였어.”
그는 탱고의 부드러운 털을 만지작거렸다.
“탱고가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던 거야. 하네스를 통해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 멈칫거리는 움직임, 내 다리에 몸을 비비는 압력. 녀석은 끊임없이 나에게 ‘앞에 계단이 있어’, ‘사람이 많아’, ‘천천히 가자’고 속삭이고 있었어. 탱고야말로, 나의 ‘가이드 위스퍼러’였던 거지.”
그는 자신이 썼던 ‘마음의 가리개’를 생각했다. 장애라는 공포 때문에, 스스로 세상을 보지 않으려 했던 시간들. 하지만 탱고는 그 가리개를 씌우지 않았다. 탱고는 김경훈이 보지 못하는 360도의 세상을 대신 봐주고, 그것을 안전한 신호로 바꿔 속삭여주었다.
“그리고 당신도.” 그가 보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도 나한테 속삭여주잖아. 내 귀에 대고 세상의 풍경을, 저녁 메뉴를, 그리고 사랑을. 당신들의 그 속삭임 덕분에, 내 좁은 세상이… 무인도가 아니라 ‘대륙’이 되는 거야.”
보보가 피식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알면 됐어. 그러니까 앞으로 내 말 잘 들어. 안 그러면 나도 가리개 씌울 거야.”
“어이구, 무서워라.”
5. 주석: 교감의 아키텍처
‘제목: 교감(交感)의 아키텍처, 혹은 곁눈 가리개를 벗는 법.
경주마는 가리개를 쓰고 앞만 보지만, 그 대가로 심리적 안정을 잃는다. 효율은 영혼을 잠식한다.
호스 위스퍼러는 ‘명령(Command)’이 아닌 ‘속삭임(Whisper)’으로 말의 마음을 연다. 그것은 상대를 통제의 대상이 아닌, 소통의 주체로 인정하는 행위다.
나의 장애는 ‘시각적 가리개’였다. 하지만 탱고와 보보의 속삭임은 그 가리개 너머의 세상을 내게 연결해 주었다.
결론: 진정한 소통의 아키텍처는 ‘큰 소리’로 지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작고 은밀한 소리,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만 들리는 ‘진심’으로 지어진다.
… 내일은 탱고에게, “앉아”, “기다려” 같은 명령어 대신, 귓가에 대고 “고마워”라고 속삭여줘야겠다. 녀석이 알아듣고 꼬리를 칠지, 아니면 간식이나 내놓으라고 짖을지 궁금하다. 아마 후자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