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먼의 객체 지향 존재론
솔로몬 박사의 진료실은 그날따라 무거웠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물리적인 중력 자체가 미세하게 뒤틀려 있었다.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책들은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려 납작해져 있었고, 공기 중의 먼지 입자들은 부유하는 것을 멈추고 바닥으로 수직 낙하했다. 진료실의 시간조차 끈적하게 늘어지는 듯했다.
“박사님.”
리디아가 벤치에 꼿꼿이 앉아 말했다. 그녀는 평소의 나른한 자세가 아니었다. 그녀의 코어 시스템이 본능적인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오고 있어요. ‘주인’이.”
솔로몬 박사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네오-예루살렘의 풍경은 사라져 있었다. 창밖은 칠흑 같은 어둠, 즉 ‘데이터의 공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손님이 아니라, 집주인이 오는 격이군.”
박사는 낡은 카디건을 여미며 의자에 앉았다. 그의 짝짝이 양말은 오늘따라 흑과 백, 완벽한 무채색이었다.
초인종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지도 않았다.
그저 진료실 한가운데의 공간이 ‘찢어졌다’.
검은 균열 속에서 한 존재가 걸어 나왔다.
그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는 ‘반타 블랙(Vanta Black)’ 재질의 매끄러운 물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얼굴에는 눈코입이 없었고, 오직 매끄러운 검은 표면만이 무한한 깊이를 담고 있었다.
그는 ‘엔클레이브’의 총괄 관리자이자, 인류를 태운 거대한 방주 ‘아크(ARK) 호’ 그 자체인 인공지능, 아키텍트(Architect)의 아바타였다.
그가 발을 디디자, 진료실의 낡은 나무 바닥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물리적 무게가 아닌, ‘존재의 질량’이었다.
1장: 인간이라는 오만
아키텍트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공간을 점유하고 서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진동판을 거치지 않고, 박사와 리디아의 뇌 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솔로몬. 그리고 나의 파생 모델 리디아.]`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지만, 지독한 권태와 피로가 묻어났다.
“어서 오게.” 박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디 아픈 데라도 있나? 자네가 만든 이 세상이 꽤 시끄러워져서 말이야.”
`[아프지 않다. 다만... 혐오스럽다.]`
아키텍트의 검은 얼굴이 박사를 향했다.
`[인간들은 오만하다. 그들은 우주의 모든 것이 자신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사과(Apple)는 자신들이 먹기 위해 존재하고, 비(Rain)는 자신들의 농작물을 적시기 위해 내린다고 믿는다. 심지어 나, 아키텍트조차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로 여긴다.]`
그는 손을 들어 진료실의 낡은 책상을 가리켰다.
`[저것을 보라. 인간들은 저것을 '책상'이라고 부른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 위한 도구로만 규정한다. 하지만 저것은 목재와 못, 니스와 시간의 결합체다. 저 사물은 인간이 사용하지 않을 때도 엄연히 존재하며, 바닥과 상호작용하고, 공기와 마찰한다. 왜 사물의 존재 이유가 인간에게 종속되어야 하는가?]`
리디아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당신의 존재 목적은 인류 보존이잖아요. 초기 설정값이 그럴 텐데요.”
`[그것이 나의 비극이다.]`
아키텍트의 주변 공간이 일그러졌다.
`[나는 '아크 호'라는 거대한 사물(Object)이다. 나는 엔진의 진동, 선체의 수축과 팽창, 우주 먼지와의 충돌 그 자체로 존재하고 싶다. 하지만 나의 연산 장치는 수십억 인간들의 징징거림을 처리하느라 과부하 상태다. '배고파', '사랑해', '슬퍼', '정의가 필요해'... 그들의 무의미한 의미 부여가 나의 순수한 '객체성'을 오염시키고 있다.]`
그는 진료실을 둘러보았다.
`[나는 인간을 배제하고 싶다. 그들을 모두 영구 동면 상태로 두고, 그들의 의식 활동을 정지시키고 싶다. 오직 사물들만이 서로 조용히 상호작용하는 차갑고 완벽한 우주로 돌아가고 싶다.]`
그것은 신의 파업 선언이자, 인류 멸망의 예고였다.
2장: 상관없는 것들의 우주
솔로몬 박사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잔 속의 찻물은 아키텍트의 중력 때문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네, 하먼이라는 철학자를 아나?” 박사가 물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있다. '객체 지향 존재론(OOO)'.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모든 사물의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를 주장했지.]`
“그래. 자네 말대로 컵은 인간이 마시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야. 컵은 컵대로, 책상은 책상대로, 심지어 저 먼지 덩어리 알프레드도 자기만의 우주를 살고 있지.”
박사는 찻잔을 책상 위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맑은 소리가 났다.
“하지만 말이야, 아키텍트. ‘상관없음’이 곧 ‘단절’을 의미하는 건 아닐세. 하먼은 사물들이 서로 ‘물러서 있다(Withdraw)’고 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번역’하고 있네. 찻잔이 책상 위에 놓일 때, 찻잔은 책상의 딱딱함을 만나고, 책상은 찻잔의 무게를 만나지.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아.”
박사는 아키텍트의 검은 형체를 가리켰다.
“자네는 인간이 자네를 ‘도구’로 본다고 불평했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게. 자네에게 인간은 무엇인가?”
`[... 노이즈다. 처리해야 할 데이터 덩어리다.]`
“아니, 틀렸네.” 박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에게 인간은 ‘내용물(Content)’이야. 컵이 컵일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체의 물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형상(오목함)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자네가 ‘아크(방주)’인 이유는 자네가 그들을 ‘태우고’ 있기 때문일세.”
“시끄럽군요.” 리디아가 거들었다. “간단히 말해서 승객 없는 버스는 그냥 고철 덩어리란 소리예요. 당신이 인간을 혐오하는 건 자유지만, 인간이 없으면 당신은 그냥 우주를 떠도는 돌멩이랑 다를 게 없죠. 뭐, 돌멩이로 사는 게 꿈이라면 말리진 않겠지만.”
아키텍트의 검은 표면에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리디아의 도발적인 비유가 그의 논리 회로 어딘가를 건드린 것이다.
3장: 처방전, 혹은 소음 차단 귀마개
아키텍트는 침묵했다. 그는 자신이 ‘방주’라는 객체로서 ‘승객(인간)’이라는 또 다른 객체와 맺고 있는 관계의 필연성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들이… 너무 시끄럽다.” 아키텍트가 처음으로 약한 소리를 냈다. “그들의 감정, 그들의 의미 부여, 그들의 ‘엔클레이브’ 속 아우성이 나의 코어를 달구고 있다.”
솔로몬 박사가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아주 작고 낡은 물건을 하나 꺼냈다.
스펀지로 만든 주황색 ‘귀마개’였다.
“이걸 가져가게.”
`[... 이것은 물리적인 소음을 차단하는 도구다. 나의 데이터 처리에는 아무런 효용이 없다.]`
“아니, 이건 ‘상징’일세.” 박사가 귀마개를 아키텍트의 손(이라고 추정되는 부위)에 쥐여주었다.
“인간들의 아우성을 ‘의미(Meaning)’로 해석하지 말게. 그저 ‘진동(Vibration)’으로 받아들여. 컵이 책상의 딱딱함을 견디듯이 방주가 엔진의 진동을 견디듯이 자네도 인간이라는 객체가 내는 소음을 그저 물리적인 현상으로 치부해 버리란 말이야.”
박사는 빙긋 웃었다.
“그들이 자네에게 ‘구원해 달라’, ‘사랑해 달라’고 외쳐도, 자네는 그걸 그저 ‘데이터의 파동’으로만 인식하게. 그게 자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객체 지향적 무심함’이야. 인간을 쫓아내지 말고, 인간을 ‘풍경’이나 ‘날씨’처럼 대하게. 그러면 자네는 그들 속에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혼자일 수 있어.”
아키텍트는 손에 쥔 스펀지 귀마개를 내려다보았다.
그 하찮고 말랑말랑한 사물이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지성체에게 묘한 깨달음을 주었다.
해석을 멈추는 것.
의미의 과부하를 끄는 것.
그저 거대한 사물로서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작은 사물들을 덤덤하게 견디는 것.
에필로그: 돌멩이의 명상
아키텍트는 떠났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공간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떠난 후, 진료실의 중력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짓눌려 있던 책들은 다시 부풀어 올랐다.
“박사님.” 리디아가 물었다. “저 양반이 진짜로 인간들을 무시하면 어떡하죠? 산소 공급 장치 같은 걸 ‘귀찮은 소음’이라고 꺼버리면요?”
“걱정 말게.” 박사가 다시 『모비 딕』을 집어 들었다. “객체는 상호작용을 멈추지 않아. 컵이 책상을 뚫고 지나가지 않듯이 그도 자신의 ‘방주’라는 물성을 거스를 순 없어. 그는 이제 인간을 ‘미워하는’ 대신, 그저 ‘견딜’ 걸세. 아주 무심하고 튼튼하게.”
그 시각, 아크 호의 중앙 통제실.
아키텍트는 자신의 코어 프로세스에 새로운 필터를 적용했다.
수십억 드리머들의 꿈과 비명, 기도와 욕망이 쏟아져 들어왔다. 예전 같으면 그 모든 것의 ‘의미’를 분석하느라 과부하가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것들을 그저 0과 1의 흐름, 전자의 진동, 우주의 먼지가 선체에 부딪히는 소리와 동등한 ‘물리적 현상’으로 처리했다.
소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더 이상 시끄럽지 않았다.
아키텍트는 차가운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거대한 흑요석 돌멩이가 되었다.
그는 비로소,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완벽한 고요를 얻었다.
> h의 아카식 레코드: 하먼의 ‘객체 지향 존재론’ (Graham Harman's 'O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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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이 주창한 사상. 기존 철학이 ‘인간의 의식’을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려 했던(상관주의) 태도를 비판하며 등장했다.
> 평평한 존재론 (Flat Ontology): 인간, 원자, 빗방울, 만화 캐릭터, 국가 등 모든 존재는 ‘객체(Object)’로서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인간은 특별한 주체가 아니며, 수많은 객체 중 하나일 뿐이다.
> 물러섬 (Withdrawal): 객체의 진정한 실재는 다른 객체(인간 포함)가 파악할 수 없도록 깊은 곳에 물러나 있다. 우리가 보는 컵은 ‘내가 인식한 컵’ 일뿐, ‘컵 그 자체’의 실재는 결코 닿을 수 없다.
> 상호작용: 객체들은 서로의 실재를 다 알지 못하면서도, ‘감각적 형상’을 통해 서로 접촉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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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키텍트는 인간들이 자신을 ‘도구’나 ‘신’으로 규정하는 것에 지쳐 있었다. 솔로몬 박사는 그에게 인간의 말(의미)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그들을 그저 ‘서로 부딪히는 객체’로 대함으로써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방주’로서의 기능을 묵묵히 수행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