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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보다 깊은 정서적 '과잉 생산'

by 김경훈

최근 빌보드 차트를 훑어보다 보면 귀를 때리는 비트와는 대조적으로 가사는 온통 잿빛인 경우를 자주 본다. 데이터기업 뮤직스매치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히트곡 가사 속 ‘불안’은 13%포인트 증가했고, ‘절망’과 ‘상심’은 2020년 이후 가파른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1970년대 이후 노래들은 꾸준히 밝음을 잃고 어둠을 수집해온 셈이다.


이 현상을 보고 있자니 경제학적 '수요 법칙'과 철학적 '실존의 공허'가 교차하는 지점이 선명해진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시장은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을 집중한다. 과거 라디오 시대의 대중음악이 '보편적인 즐거움'이라는 공공재 성격이 강했다면, 지금의 스트리밍 시대는 '개인화된 취향'이라는 사적 재화의 영역이다.


알고리즘은 무섭도록 정확하게 우리의 내면을 파고든다. 우울한 청년이 우울한 노래를 반복 재생할 때, 스트리밍 플랫폼은 이를 '효용 극대화'로 판단하고 유사한 감정의 선율을 끊임없이 배달한다. 결국 '슬픔의 한계 효용'이 체감하기는커녕, 알고리즘에 의해 가속화되는 구조다. 이제 우울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 반복 재생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가장 효율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된 듯하다.



철학적으로 노래 가사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니체는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고 했다. 가사 속 부정성의 증가는 우리가 타인과 연결되는 방식이 '환희'보다는 '결핍의 공유'로 변했음을 시사한다.


정보 접근성을 연구하는 내 관점에서 볼 때, 기술은 세상 모든 정보에 닿게 해주었지만, 정작 우리 마음의 '정서적 접근성'은 우울이라는 외길로 좁혀진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가장 고독한 가사를 공유하며 역설적인 유대감을 느낀다. 풍요 속의 빈곤이 아니라, 연결 속의 고립이 가사라는 텍스트로 박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처럼 우울한 노래가 차트를 점령하는 현상은 어쩌면 현대인의 기괴한 생존 전략일지도 모른다. 소득의 증감과는 상관없이 영혼의 허기를 느끼는 청년들에게, 우울한 노래는 "너만 아픈 게 아니야"라고 속삭이는 가장 저렴한 진통제다.


하지만 연구자로서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데이터가 쌓일수록 알고리즘이 우리를 특정 감정의 '에코 체임버(Echo Chamber)'에 가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슬픔에 잠길 권리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나, 시스템이 그 슬픔을 학습해 다시 우리에게 되팔고 있다면 그것은 과연 자발적인 감상일까, 아니면 설계된 침잠일까.



내 곁을 묵묵히 지키는 안내견 탱고의 숨소리를 들으며, 가끔은 이어폰을 빼고 소음 가득한 세상의 날것 그대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차트 1위의 세련된 절망보다는 투박하더라도 곁에 있는 존재가 내는 온기 섞인 소리가 더 큰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우리는 어쩌면 더 많은 '상심'이 아니라, 그 상심을 뚫고 나올 한 줄기 '의지'의 선율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번 빌보드 차트에는 알고리즘도 예측하지 못한, 생의 찬미가 섞인 비트가 13%쯤 섞여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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