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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의 저울과 소수자의 권리

by 김경훈

윤리학의 세계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간결하고 매력적인 구호를 내세우는 공리주의가 있다.

이 목적론적 윤리 이론은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그 결과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가로 판단한다.

이는 복잡한 문제도 행복이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계산하여 해결하는 매우 효율적인 시스템처럼 보인다.


이 효율성의 저울을 도시의 공공 정보 키오스크 설치 문제에 적용해보자.

한 도시의 시의회가 한정된 예산을 두고 두 가지 안을 논의한다.

첫 번째 안은 시민의 99퍼센트를 차지하는 비장애인을 위한 화려한 삼차원 지도 기능을 추가하는 것이다.

두 번째 안은 단지 1퍼센트에 불과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낭독 기능을 추가하는 것이다.


이때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를 신봉하는 관리가 계산기를 꺼내 든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다수의 작은 기쁨이 소수의 필수적인 필요보다 더 큰 행복의 총합을 만든다.

그에게는 99명이 느끼는 작은 편리함과 즐거움이 1명이 느끼는 기본적인 정보 접근의 권리보다 우선한다.

바로 이 지점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구호의 위험성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소수자의 권리는 다수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언제든 쉽게 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존 스튜어트 밀의 질적 공리주의를 지지하는 또 다른 관리가 반론을 제기한다.

밀은 모든 행복과 고통이 결코 같은 질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삼차원 지도가 주는 편리함이나 일시적인 즐거움은 부차적이며 가벼운 쾌락이다.

하지만 공공 정보에서 배제되는 시각장애인이 느끼는 고통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무게를 지닌다.

이 고통은 단순한 불편함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고립과 박탈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밀의 관점에서 보면 다수가 누리는 작은 즐거움의 총합은 결코 한 사람이 겪는 존엄성 훼손이라는 큰 고통의 무게를 넘어설 수 없다.

결국 키오스크에 정보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은 소수자만을 위한 시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고통을 줄이고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호하는 더욱 수준 높은 윤리적 선택이다.


정보학을 연구하는 시각장애인의 시선에서 볼 때 이 두 가지 공리주의의 대립은 단지 철학적 논쟁이 아니라 매일 겪는 현실이다.

사회는 너무나 자주 벤담의 계산기를 두드리며 효율성과 다수의 편의를 앞세운다.

하지만 진정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는 밀의 저울을 사용하여 소수의 고통과 인간의 존엄성을 섬세하게 잴 줄 알아야 한다.

행복이란 단순히 더하고 빼는 숫자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까지 함께 헤아릴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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