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온 청구서

by 김경훈

1. 빗속의 수금원, 19세의 릭


왕국력 998년, ‘폭풍의 달’.

수도 외곽의 버려진 저택으로 향하는 길은 진흙탕이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릭의 낡은 후드를 뚫고 들어와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릭은 19살이었다. 그는 왕국 뒷골목의 하수구 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도박 빚에 쫓겨 ‘수정구 금융 사기단(보이스피싱 조직)’의 말단 수거책으로 일하고 있었다.


오늘의 임무는 간단했다.

조직의 ‘텔레마케터’가 낚은 호구 노인에게 가서 현금(금화 1만 닢)을 받아오는 것.


릭의 품속에 있는 낡은 수정구가 지이잉진동했다.


[야, 릭! 아직도 도착 안 했어? 노인네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튀어가!]


조직의 간부, 독사의 목소리였다.


“가고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거의 다 왔습니다.”


릭은 진흙탕에 미끄러지면서도 달렸다. 이번 건만 성공하면 빚을 갚고 새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는 맹세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2. 폐가의 노인


저택은 흉가였다. 창문은 깨져 있고,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릭은 문을 두드렸다.


쾅, 쾅!


“계십니까! 아드님 친구입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백발의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무릎에는 낡은 담요를 덮고 있었다.


“오오… 자네가 내 아들 친구인가?”


노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네, 어르신. 아드님이… 지금 사채업자들에게 잡혀 있어서 급하게 돈이 필요합니다. 제가 대신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릭은 연습한 대사를 읊었다. 죄책감이 가슴을 찔렀지만, 빚쟁이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꾹 참았다.


“그래… 내 아들… 불쌍한 녀석… 제발 살려주게.”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옆에 놓인 가죽 가방을 가리켰다.


“여기 있네. 내 전 재산이야. 금화 1만 닢… 아니, 조금 더 넣었네. 이자라고 생각하게.”


릭은 가방을 들었다. 묵직했다.

그는 가방을 열어 확인했다. 진짜 금화였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고대 왕국의 문양이 새겨진 희귀한 금화들이었다.


‘이게 다 얼마야? 빚 갚고도 남겠는데?’


릭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가방을 챙겨 들었다.


“감사합니다. 아드님은 무사히 돌려보내겠습니다.”


릭은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잠깐.”


노인이 릭을 불렀다.


“자네… 이름이 뭔가?”


“제 이름요? …릭입니다.”


“릭… 릭이라…”


노인은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슬픔과 회한, 그리고 알 수 없는 조소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래. 릭. 부디 그 돈을… 가치 있게 쓰게나.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네? 네. 그럼 이만.”


릭은 도망치듯 저택을 빠져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빗속을 달렸다.



3. 배신과 도주


저택을 나온 릭은 멈춰 섰다.

그는 조직의 아지트로 가는 길 대신, 항구로 가는 길을 택했다.


‘이 돈이면… 제국으로 도망갈 수 있어. 독사 따위 알 게 뭐야?’


릭은 배신을 선택했다. 그는 금화 가방을 품에 안고 항구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릭은 사라졌다. 조직은 발칵 뒤집혔지만, 릭은 이미 바다 건너 제국으로 떠난 뒤였다.


제국에 도착한 릭은 이름을 ‘리키’로 바꾸고, 훔친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타고난 사기꾼 기질을 발휘해 무역업, 고리대금업, 그리고 마도구 밀매업까지 손을 댔다.


돈이 돈을 불렀다. 릭은 10년 만에 제국 최고의 거부가 되었다.

그는 화려한 저택을 사고, 귀족 작위도 샀다. 아름다운 부인도 얻었다.

과거의 찌질했던 수거책 시절은 까마득한 옛날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늘 불안했다. 누군가 자신의 과거를 알까 봐, 조직이 복수하러 올까 봐.

그래서 그는 더 많은 돈, 더 강력한 권력을 탐했다.


그는 흑마법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불로장생을 위해, 그리고 절대적인 힘을 위해.



4. 마왕의 탄생


50년이 흘렀다.

릭은 이제 ‘대마왕 리키’라 불리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는 흑마법의 부작용으로 인간의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피부는 썩어 문드러졌고, 눈은 붉게 변했다. 그는 자신의 성 지하 깊은 곳에 은둔하며, 세상의 모든 부와 마력을 긁어모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타임 리미트(Time Limit)’.


흑마법 계약의 대가로, 그의 수명은 정확히 70세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으윽… 안 돼… 내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 내가 어떻게 쌓은 힘인데…!”


70세의 노인이 된 리키는 자신의 보물 창고 한가운데 있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의 몸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생명력이 바닥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앞에 놓인 최고급 수정구가 지이잉울렸다.


[경고: 생명력 고갈 임박. 연장 불가.]


“방법이 없을까? 시간을 돌릴 방법이…?”


리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는 평생 모은 마도서들을 뒤졌다. 그리고 찾아냈다.

[시공간 전이 통신 마법].


과거의 누군가와 통화할 수 있는 금지된 마법이었다.

하지만 과거를 바꾼다고 해서 현재의 자신이 사는 것은 아니었다. 타임 패러독스의 법칙 때문에.


그렇다면?

과거의 자신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하면?

아니다. 과거의 돈을 받아봤자 현재에선 쓸모가 없다.


그때, 리키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50년 전 그가 훔쳤던 ‘고대 금화 가방’.

그는 평생 그 금화를 쓰지 않고 간직해두었다. 일종의 부적처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19살 때 훔쳤던 그 돈. 그 돈의 출처가 어디였는지.


“아…!”


리키는 떨리는 손으로 수정구를 조작했다.

좌표는 왕국력 998년. 장소는 수도 외곽의 폐가.



5. 과거와의 통화


수정구가 연결되었다.

화면에는 빗속을 뚫고 달려오는 한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후드를 쓴, 젖은 생쥐 꼴을 한 19살의 릭.


리키는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저 멍청한 놈… 저 때 멈췄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미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기 시작했다.

리키는 변조 마법을 걸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 그대로 말했다.


[여보세요?]


19살의 릭이 전화를 받았다.


“네! 아드님 친구입니다!”


리키는 피식 웃었다. 아들 친구라니. 뻔한 거짓말.


“그래… 내 아들… 불쌍한 녀석… 제발 살려주게.”


리키는 50년 전 그 노인이 했던 대사를 그대로 읊었다. 아니, 읊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노인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그는 50년 전, 폐가에서 만난 노인이 낯설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 노인은 미래에서 타임 루프에 갇혀버린 자기 자신이었다.



6. 영원한 굴레


리키는 자신의 전 재산, 금화 1만 닢(이자 포함)을 가방에 담았다.

그리고 휠체어를 끌고 현관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고, 19살의 릭이 들어왔다.

탐욕에 번들거리는 눈빛. 젖은 옷에서 나는 비린내.


“오오… 자네가 내 아들 친구인가?”


리키는 연기를 했다. 아니, 이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넘겨주는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여기 있네. 내 전 재산이야. 부디… 가치 있게 쓰게나.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리키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제발 이 돈을 가지고 도망치지 마라. 정직하게 살아라. 흑마법에 손대지 마라.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19살의 릭은 이 돈을 가지고 제국으로 튈 것이다.

그리고 악당이 되어 평생을 불안에 떨며 살다가 결국 70살이 되어 이 폐가로 돌아올 것이다.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였다.

리키는 죽기 직전에 과거의 자신에게 돈을 넘겨주고, 그 돈을 받은 과거의 릭은 다시 리키가 되어 죽기 직전에 또 돈을 넘겨주는.

영원히 순환하는 탐욕의 지옥.


19살의 릭은 가방을 챙겨 들고 도망치듯 나갔다.


“릭…!”


리키가 불렀다.

청년이 멈춰 섰다.


“이름이 뭔가?”


“제 이름요? …릭입니다.”


리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릭. 잘 가게.”


문이 닫혔다. 쾅.

빗소리가 멀어졌다.



7. 텅 빈 가방


19살의 릭이 떠나고, 70살의 리키는 텅 빈 거실에 홀로 남았다.

그의 생명력이 꺼져가고 있었다.


“하하… 결국 이렇게 끝나는군. 내 인생은… 그저 돈 배달부였어. 과거의 나에게서 미래의 나에게로…”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때.

책상 위에 놓인 또 다른 수정구가 지이잉울렸다.


이것은 ‘타임 패러독스’를 감시하는 [시간 관리국]의 긴급 통신이었다.


[경고. 불법 타임 루프 감지. 인과율 계산 중…]


[오류 발견. 당신이 방금 넘겨준 가방 속의 금화는… ‘위조지폐(가짜 금화)’입니다.]


“뭐… 뭐라고?”


리키는 눈을 번쩍 떴다.


[50년 전, 당신이 훔쳤던 그 가방. 기억나십니까? 당신은 그 가방을 열어보고 진짜 금화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건 강력한 ‘환영 마법’이 걸린 돌덩이였습니다.]


리키의 머릿속에 50년 전의 기억이 스쳤다.

그는 가방을 열어보고 금빛에 눈이 멀어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국으로 도망쳐서 그 돈을 쓰려고 했을 때…


아, 맞다.

그는 그 돈을 종잣돈으로 쓴 게 아니었다.

그는 제국에 도착하자마자 사기꾼에게 속아 그 가방을 통째로 날렸었다.

그리고 빈털터리가 된 분노로 악착같이 돈을 벌어 거부가 된 것이었다.


즉, 그 금화 가방은 애초에 가짜였고, 그의 성공은 그 가짜 돈 덕분이 아니라 그의 독기 때문이었다.


“하… 하하하!”


리키는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럼 뭐야. 나는 평생 가짜 돈을 진짜라고 믿고… 과거의 나에게 사기를 친 거야? 내 전 재산을 털어서 만든 진짜 금화를, 과거의 나한테 주는 척하면서 환영 마법으로 돌덩이로 바꿔치기해서 줬다고?”


그렇다.

70살의 리키는 무의식 중에 돈이 아까워서 과거의 자신에게 줄 금화 가방에 ‘가짜’를 넣었던 것이다. (그는 사기꾼이니까.)

그리고 19살의 릭은 그 가짜를 받고 좋아라 튀었고.


결국 이 거대한 타임 루프는 사기꾼이 사기꾼(자기 자신)을 등쳐먹는 촌극이었다.



8. 마지막 배달


리키의 몸이 먼지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나를 속인 거였어. 평생을.”


그는 마지막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봐, 19살의 나여. 그 가방 열어보면… 돌멩이밖에 없을 거다. 엿 먹어라, 이 자식아.”


리키는 낄낄거리며 소멸했다.

폐가에는 낡은 휠체어와,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몇 개만이 남았다.


멀리서 19살의 릭이 빗속을 뚫고 항구로 달리고 있었다.

그는 품속의 가방을 꽉 껴안으며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 돈이면… 난 왕이 될 수 있어!”


그는 아직 몰랐다.

그 가방 속에 든 것이 미래의 자신이 보낸 ‘빅 엿(Big Fuck)’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배신감으로 인해, 그가 진짜 악마가 되리라는 사실을.


그렇게, 어리석은 뫼비우스의 띠는 또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영원히 멈추지 않는 탐욕의 수레바퀴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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