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만년필 닙 끝에 맺힌 잉크 방울을 내려다보았다. 2060년의 서울에서 액체 잉크를 사용하는 사람은 서예가거나,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졸부거나, 지훈 같은 ‘대필가’ 뿐이었다.
“종이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지훈이 물었다.
그의 작업실인 ‘아날로그 서신소’는 습도 50%를 철저히 유지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이보리색 펄프 종이부터, 거친 질감의 한지, 두툼한 양피지까지 다양한 샘플이 펼쳐져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의뢰인은 홀로그램 넥타이를 맨 젊은 남자였다. 그는 불안한 듯 스마트 렌즈가 삽입된 눈동자를 굴렸다.
“가장… 비싼 걸로 해주세요. 거칠고, 손이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걸로.”
“코튼 100% 최고급지를 추천합니다. 잉크가 번질 때의 불규칙한 패턴이 아주 감성적이죠.”
지훈은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장당 5만 원. 태블릿 화면 100개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내용은 준비해 오셨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뇌파와 연동된 스마트 렌즈가 지훈의 태블릿으로 텍스트 파일을 전송했다. 내용은 평범했다. [사랑해. 우리가 헤어져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다시 시작하자.]
고작 이 세 문장을 전하기 위해 남자는 200만 원을 지불했다.
“단순한 텍스트 전송은 0.1초면 갑니다. 수신 확인도 바로 뜨고요. 그런데 굳이 이 비싼 자필 편지를 쓰시는 이유가 뭡니까?” 지훈이 펜을 고르며 물었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차단당했거든요. 뇌파 메신저, 홀로그램 통화, 다 막혔어요. 하지만… 물리적인 우편물은 차단할 수 없잖아요. 집 앞 우편함에 꽂아두면, 적어도 손으로는 만져볼 테니까요.”
“아, ‘물리적 강제성’을 구매하시는 거군요.”
지훈은 씁쓸하게 웃으며 몽블랑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사각, 사각.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쓰기’를 잊었다. 생각만 하면 뇌파가 텍스트로 변환되어 전송되는 세상에서 손 근육을 움직여 글자를 적는 행위는 비효율의 극치였다. 그래서 그들은 지훈을 찾았다. 지훈은 그들의 찌질한 미련이나 구차한 변명을 우아한 필기체로 포장해 주는 기술자였다.
지훈은 일부러 ‘ㄹ’ 받침을 조금 길게 뺐다. 약간의 번짐 효과도 넣었다. 그것이 ‘인간적인 떨림’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완벽하면 가짜 같으니까.
“다 됐습니다. 봉투에 넣어드릴까요, 아니면 실링 왁스로 마감해 드릴까요?”
“왁스로 해주세요. 붉은색으로. 뜯을 때 부서지는 느낌이 들게.”
지훈은 붉은 양초를 녹여 봉투 입구에 떨어뜨리고, 가문의 인장 대신 ‘Analog’라고 적힌 도장을 꾹 눌렀다. 타닥, 타닥. 심지가 타들어 가는 냄새가 작업실에 퍼졌다.
배달은 드론이 아니라 지훈이 직접 가기로 했다. ‘프리미엄 인편 배달’ 옵션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전 여자 친구가 사는 곳은 한남동의 고급 맨션이었다. 보안 시스템은 홍채와 지문을 요구했지만, 우편함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로비 한구석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박혀 있었다.
지훈은 103호 우편함에 두툼한 편지 봉투를 꽂아 넣었다.
그때, 로비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의뢰인이 보여준 사진 속의 여자였다. 그녀는 지훈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더니, 우편함에 꽂힌 붉은색 봉투를 발견했다.
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또 쓰레기를 보냈네.”
그녀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지훈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남자가 원했던 대로, 그녀는 그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칠고, 무겁고, 베일 듯한 그 ‘물리적 실체’를.
하지만 감동적인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여자는 귀찮다는 듯 봉투를 찢었다. 실링 왁스가 바닥에 부서져 내렸다. 그녀는 편지를 꺼내더니, 내용을 읽는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 주위로 푸른 빛이 돌았다.
그녀는 편지를 읽고 있는 게 아니었다. ‘스캔’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신경에 내장된 AR 기능이 삐뚤빼뚤한 손글씨를 순식간에 디지털 텍스트로 변환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해. 우리가 헤어져야 할...]이라는 텍스트가 그녀의 망막 허공에 굴림체나 고딕체로 떠올랐을 것이다.
그녀에게 종이의 질감이나 잉크의 농담 따위는 그저 OCR(광학 문자 인식) 인식을 방해하는 노이즈일 뿐이었다.
“스팸 처리해.”
여자가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편지는 구겨지기도 전에 로비의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지훈은 여자가 엘리베이터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쓰레기통에는 200만 원짜리 진심이 아니 200만 원짜리 펄프 덩어리가 처박혀 있었다.
그는 작업실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캔커피를 샀다. 계산대 점원이 바코드를 찍었다. 삑.
“영수증 드릴까요?”
“아니요, 버려주세요.”
지훈은 대답했다. 세상은 편리했다. 남기지 않으면 쓰레기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쓰레기를 만들고, 상처를 확인하고, 거절당하는 수고를 샀다.
그는 잉크가 묻은 손가락을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남았다. 디지털은 흔적 없이 삭제되지만, 아날로그는 지저분한 얼룩을 남긴다. 어쩌면 그게 사람들이 이 비효율적인 종이 쪼가리에 집착하는 유일한 이유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