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의 기억

by 김경훈

박 씨는 무 껍질을 벗겼다. 사각, 사각. 칼날이 거친 표면을 긁어내자 흙 냄새가 훅 끼쳐왔다. 2070년의 서울에서 ‘흙’은 위생법 위반 물질이자, 박멸해야 할 오염원이었다. 하지만 박 씨의 식당, ‘구식 부엌’에서는 그 냄새가 최고급 향수보다 비쌌다.


“어서 오세요.”


자동문이 열리고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은색 점프슈트를 입은 그는 코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냄새죠? 환기 시스템 고장 났나요?”


“마늘과 된장 냄새입니다. 자연스러운 발효취죠.”


박 씨는 무덤덤하게 대답하며 칼을 도마에 내려놓았다.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방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가스레인지 위에서 펄펄 끓고 있는 뚝배기에 머물렀다.


“저건가요? 그… ‘리얼 푸드’라는 게?”


“네. 된장찌개입니다. 합성 단백질 큐브나 비타민 젤리가 아닙니다. 콩을 썩혀서 아니 발효시켜서 만든 진짜 요리죠.”


남자는 자리에 앉으며 태블릿 메뉴판을 밀어냈다.


“메뉴는 필요 없어요. 가장 ‘비효율적이고’, ‘불균형한’ 걸로 주세요. 영양소 밸런스가 완전히 깨진 걸로.”


“알겠습니다. 청양고추를 듬뿍 썰어 넣죠.”


박 씨는 냉장고에서 쭈글쭈글한 고추 두 개를 꺼냈다. 요즘 사람들은 캡사이신 추출액을 혀에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으로 매운맛을 즐겼다. 하지만 진짜 고추는 다르다. 씨가 씹히고, 풋내가 나고, 먹고 나면 속이 쓰리다. 그 ‘고통’이 바로 요리의 일부였다.


주방에는 3D 푸드 프린터가 없었다. 대신 낡은 무쇠 칼과 도마, 그리고 위험천만한 가스 불이 있었다. 박 씨가 파를 썰자 눈이 매워왔다.


“주방장님, 우시는 겁니까?” 남자가 놀라서 물었다.


“아니요. 파 때문입니다. 휘발성 성분이 눈물샘을 자극하거든요.”


“세상에. 요리가 사람을 공격하다니.”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스마트 렌즈로 그 광경을 녹화했다.


박 씨는 보글보글 끓는 찌개에 두부를 숭덩숭덩 잘라 넣었다. 두부는 공장에서 찍어낸 정사각형이 아니었다. 손으로 으깨진 듯 투박하고 못생긴 모양이었다.


“다 됐습니다.”


박 씨는 뚝배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뚝배기 받침은 그을려 있었고, 국물은 뚝배기 가장자리에 넘쳐 눌어붙어 있었다. 위생 점수 0점짜리 비주얼이었다.


남자는 숟가락을 들고 망설였다.


“데이터 분석 결과, 나트륨 함량이 권장량의 300%를 초과하는데요. 이거 먹고 안 죽나요?”


“안 죽습니다. 기껏해야 물을 좀 많이 마시게 될 뿐이죠.”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국물을 한 숟가락 떴다. 그리고 입에 넣었다.


“윽!”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짜요! 그리고… 뜨거워요! 혀가 데일 것 같아요!”


“그게 ‘온도’입니다. 정수기에서 나오는 미지근한 영양 유동식이 아니라, 불이 만든 온도죠.”


남자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하지만 숟가락을 놓지는 않았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혀를 내두르면서도 계속 국물을 퍼먹었다.


“이상해요. 데이터상으로는 ‘불쾌함’으로 분류되는데… 멈출 수가 없어요.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은데, 기분이… 살아있는 것 같아요.”


남자는 두부를 씹었다. 콩 비린내와 고소함이 섞인 복합적인 맛이었다.


“씹어야 하네요? 그냥 삼키면 안 넘어가요.”


“네. 턱 근육을 써야 합니다. 소화 기관도 일을 해야 하고요. 그게 먹는 겁니다. 에너지를 얻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행위죠.”


남자는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의 은색 점프슈트에는 붉은 국물 자국이 튀어 있었다. 그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완벽하지 않아서… 충격적이네요. 매일 먹던 ‘완전 균형식’이 갑자기 사료처럼 느껴져요.”


남자는 계산을 하고 나갔다. 꽤 큰 액수가 결제되었다. 박 씨는 빈 뚝배기를 치우며 생각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배가 고파서 오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결핍이 고파서 왔다. 모든 것이 매끄럽고, 완벽하고, 예측 가능한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유일한 것. 맵고, 짜고, 뜨거워서 나를 괴롭히는 그 ‘무질서’를 맛보기 위해 오는 것이다.


박 씨는 남은 밥에 찌개 국물을 붓고 쓱쓱 비볐다.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우지끈.


무언가 씹혔다. 해감이 덜 된 조개 속 모래였다.


박 씨는 인상을 찌푸리며 모래를 뱉어냈다. 기분 나쁜 식감이었다. 하지만 그는 피식 웃었다.


그래, 이게 사는 맛이지. 씹다가 돌도 좀 씹고, 뱉어내기도 하고.


박 씨는 숭늉을 들이켰다. 구수한 탄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2070년의 서울은 여전히 멸균실처럼 하얗고 깨끗했지만, 박 씨의 부엌만큼은 인간적인 얼룩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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