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온 글렌 웨이

by 김경훈

https://brunch.co.kr/@mabon-de-foret/299

마봉 드 포레 작가님의 '그레이트 글렌 웨이 1일'을 SF 스타일로 오마주한 소설입니다.



마봉드포레는 홀로그램 지도를 껐다. 2099년의 스코틀랜드는 더 이상 푸른 초원과 맑은 호수의 나라가 아니었다. 기후 재앙 이후 돔으로 뒤덮인 ‘네온 하이랜드’는 인공 강우와 합성 태양광으로 유지되는 거대한 테마파크였다.


그는 회사를 때려치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업무였던 ‘기억 데이터 마이닝’ 작업이 AI에게 완전히 대체되면서 권고사직을 당했다. 퇴직금으로 받은 크레딧을 털어 그가 선택한 것은 ‘그레이트 글렌 웨이(Great Glen Way)’ 종주였다.


과거에는 걷기 여행 코스였지만, 지금은 사이버네틱스 신체를 테스트하는 극한의 레이싱 구간으로 변모해 있었다. 포트 윌리엄에서 인버네스까지 125km. 이 구간을 완주하면 ‘진짜 위스키’ 한 병을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합성 알코올이 아닌, 21세기 초반에 증류되어 타임캡슐에 보관된 전설의 ‘글렌피딕 30년산’.


“출발하시겠습니까?”


안드로이드 가이드가 물었다. 마봉드포레는 강화 외골격 슈트의 부츠 끈을 조였다. 그의 다리는 낡은 생체 근육이었기에, 이 슈트 없이는 10km도 걷지 못할 게 뻔했다.


첫 번째 코스는 ‘넵튠의 계단’이었다. 과거에는 배가 다니던 운하의 수문이었지만, 지금은 거대한 정수 필터 타워들이 계단처럼 늘어서 있었다. 타워 꼭대기에서는 오염된 빗물을 정화해 인공 운하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마봉드포레는 타워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하늘은 보랏빛 네온 사인으로 뒤덮여 있었고, 드론들이 광고 전단을 뿌리며 날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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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저으며 묵묵히 걸었다. 그의 배낭에는 3D 푸드 프린터로 뽑아낸 ‘참치 맛 큐브’와 ‘초코바 맛 젤리’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장비, 접이식 티타늄 의자.


걷다가 지치면 그는 의자를 펴고 앉았다. 지나가는 사이보그 러너들이 그를 비웃으며 지나갔다.


“어이, 영감님! 그렇게 걷다간 내년에 도착하겠수!”


제트 추진기를 달고 날아가는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봉드포레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속도가 아니라, ‘걷는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온 것이니까. 발바닥에 전해지는 인조 잔디의 감촉, 슈트의 유압 장치가 삐걱거리는 진동. 그것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오후가 되자 인공 태양이 붉게 변하며 노을 모드를 연출했다. 그는 예약해 둔 숙소인 ‘더 헤더스(The Heathers)’ 캡슐 호텔에 도착했다. 주인장인 낡은 구형 안드로이드는 삐걱거리는 관절을 움직이며 그를 맞이했다.


“환영합니다. 마봉드포레 님. 오늘의 날씨는 ‘쾌청’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방은 좁았지만, 창문 밖으로 홀로그램 호수가 보였다. 그는 배낭에서 비상식량을 꺼냈다. ‘카올(Caol)’ 구역의 암시장에서 구한 컵라면이었다. ‘아시아’라고 적힌 낡은 포장지. 유통기한은 50년이 지났지만, 진공 포장 덕분에 먹을 수 있을 터였다.


그는 라면을 먹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호수 위로 네온 사인이 비쳐 물결이 무지개색으로 일렁였다.


그때, 문득 옛날 기록 영상에서 본 21세기의 스코틀랜드가 떠올랐다. 진짜 비가 내리고, 진짜 바람이 불던 그곳. 사람들은 고어텍스 재킷을 입고 진흙탕을 걸었다지.


마봉드포레는 품에서 작은 금속 병을 꺼냈다. 출발 전, 암시장에서 전 재산을 털어 산 ‘글렌피딕’ 샘플이었다. 딱 한 모금 분량.


뚜껑을 열자, 오크통의 묵직한 향기가 좁은 캡슐 방을 채웠다. 배 냄새, 꿀 냄새,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흙 냄새.


그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털어 넣었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작열감. 그리고 뒤이어 올라오는 달콤한 피니시.


“크으… 이거지.”


그는 눈을 감았다. 네온 사인이 꺼지고, 인공 강우 소리가 진짜 빗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혀끝에서 100년 전의 하이랜드가 되살아났다.


내일은 17km를 더 걸어야 했다. 발바닥에는 물집이 잡힐 것이고, 슈트의 배터리는 방전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 위스키 한 방울의 기억이 그를 인버네스까지 이끌 테니까.


그는 접이식 의자를 펴고 그 위에 앉아, 가짜 호수의 진짜 같은 물결을 바라보았다. 2099년의 그레이트 글렌 웨이, 첫날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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