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의 트레일, 내가 걸어봅니다

그레이트 글렌 웨이 첫날

by 마봉 드 포레

이제 내 스코틀랜드 여행의 심장이자 나를 떠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한 그레이트 글렌 웨이(Great Glen Way)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좀 해야겠다. 회사를 그만둘지 말지 갈등 때리고 있을 때, 뭘 찾아보다 나왔는지 몰라도 스코틀랜드의 트레일 - 걷기 여행 루트에 대한 정보를 어느 웹사이트에선가 발견하고 홀린 듯이 찾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여행을 가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마도 이 트레일을 걷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올레길 코스들이 있듯이 스코틀랜드처럼 풍경이 좋은 나라에는 당연히 걷기 좋은 코스들이 있다. 아래 링크에 들어가면 그 오피셜 루트들이 있다.

오피셜 말고 Skye Trail 같은 비공식 루트들도 있는데 비공식 루트들은 난이도가 조금 더 세다. 공식 루트들에서 난이도 상급별로 보자면 이렇다.


1. West Highland Way(154km): 글라스고 북쪽 밀른가비(Milngavie)에서 포트 윌리엄까지 저지대에서 시작해서 포트 윌리엄의 벤 네비스를 보며 도착한다. 로크 로몬드를 끼고 지나가는 구간이라 경치가 기가 맥히고 고도 변화가 크며 Rannoch Moor 구간은 특히 바람이 세고 험하다.

2. Southern Upland Way(344km): 포트패트릭(Portpatrick)에서 콕번스패스(Cockburnspath)까지. 최장 루트. 스코틀랜드 동서 횡단 구간. 난이도보다도 구간별 거리가 멀어서 체력 좀 되어야 가능.

3. Arran Costal Way(109km): 이너 헤브리디즈의 Isle of Arran을 한바퀴 도는 코스. 남동구간은 괜찮은데 북쪽 해안 구간이 난이도가 높음.


내가 다녀온 그레이트 글렌 웨이는 난이도 하에 속한다. 원래 풍경이 제일 좋다는 1번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를 가고 싶었는데 난이도가 중-상인걸 보고 깨끗이 포기했다. 사진을 보니 진짜 멋지긴 하더만... 대신에 나는 칼레도니안 운하를 따라 평지가 대부분인 길을 쭉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가장 쉬운 루트인 그레이트 글렌 웨이를 택했다. 후기들을 보니 유치원생도 데리고 완주했다고 쓰여있길래 아 이 정도면 나도 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레이트 글렌 웨이 중간에 있는 벤치인 듯 벤치 아닌 벤치 같은 나무

그런데 이 걷기 여행도 막 그냥 가서 걸으면 되는 게 아니다. 물론, 캠핑 좀 하는 사람들은 진짜 텐트니 뭐니 온갖 거 다 싸갖고 걷다가 텐트 치고 밥 해 먹고 자고 다시 걷기도 했다. 다니면서 그런 사람들을 꽤 봤으니까. 하지만 이 트레일 상품을 파는 여행사들은 구간 사이의 숙소와, 내가 A에서 B까지 걸어가는 동안 내 가방을 미리 B의 내가 묵을 숙소에 가져다 놓는 딜리버리 서비스를 예약해 준다. 그러면 나는 걸어가는 동안에 필요한 물건만 넣은 가벼운 배낭을 메고 즐겁게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나는 여행사 홈페이지들을 돌아다니며 7월이나 8월에 그레이트 글렌 웨이 예약 가능한 곳을 찾았다. 그러나 숙소들이 다 만실이라 예약 가능한 곳이 없었다. 여행사에서 온 메일은 다 똑같았다. 중간에 시골이라 방이 없는 구간들이 있어서 안되고 9월에나 가능하다는 거였다.


9월? 절대로 안된다. 9월이면 스코틀랜드는 이미 겨울이나 마찬가지다. 무조건 8월 초에 서부에서 동부로, 즉 포트 윌리엄에서 인버네스로 그레이트 글렌 웨이를 밟아야 했다. 나는 이번에는 틀린 건가, 하고 포기하려고 했다.


그때 한 여행사에서 메일이 왔다. 바로 여기다. 콘투어스 홀리데이 여행사. 나를 살려준 고마운 곳.

메일에서 이 여행사는 "중간에 빈 방이 없는 곳이 있어서 루트에서 좀 떨어진 곳에 가서 묵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어떤 구간은 A에서 B로 걸어갔다가 다시 A로 돌아와 하룻밤 다시 묵고 다음날 B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 수도 있다. 물론 숙소 주인이 태워다 줄 거다."라는 거였다.


아 당연히 OK 지! 뭐라도 상관없었다. 여행사는 내가 수락하자 바로 방을 알아보더니 내가 원하는 일정에 예약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카드를 신나게 긋고 그제야 진짜로! 스코틀랜드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나머지 여행 일정들은 이 트레일 앞뒤로 붙인 것들일 뿐. 진짜배기는 이거다.

포트 윌리엄의 첫 숙소의 현관에서 바라본 풍경
여행사에서 온 우편물을 읽으며 아침밥을 먹었다. 태티 스콘(소시지 옆)이 들어있으니 이건 스코티시 브렉퍼스트다.

[ 8월 4일, 여행 22일째, 그레이트 글렌 웨이 1일 ]

출발지: 포트 윌리엄

도착지: 게얼로키(Gairlocky, Gair = small, Locky = 호수)

숙소: Spean Bridge Inverlochy Haut의 The Heathers

걸은 거리: 17km


숙소 히터가 밤중에 꺼졌는지 방이 너무 추워서 감기기운도 살짝 있는 상태로 일어났다. 어느 정도 추웠냐면 이불 밖에 나온 손이 꽁꽁 얼 것 같아서 온몸을 이불속에 말아 넣고 잤다. 나만 그런 게 아닌지 조식 먹을 때 여기저기 코 훌쩍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유난히 추운 아침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포트 윌리엄에서 인버네스까지 장장 125km를 걷는 그레이트 글렌 웨이 출발이다. 변변한 운동 한번 해본 적도 없고 체력은 자타공인 80대 노인 체력이며 웬만한 지병은 다 가진 사내 공식 종합병원이었던 내가, 그나마 제일 쉬운 코스로 고르긴 했어도 긴 거리임에 틀림없는 걷기 코스를 떠난다.


카올(Caol)이라는 작은 마을을 지났다. 나는 이 마을을 지나면서 꼭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이런 작은 시골 마을에 차이니즈 테이크어웨이 식당이 있었던 것. 나는 여기서 점심거리를 사가려고 일부러 포트 윌리엄에서 먹을 것을 사지 않았다.


그러나! 식당에 들어가 보니 오후 4시에 연다고 했다. 중국인 주인장은 손가락을 네 개 펴며 "쓰리(3)"라고 했다. 내가 쓰리여 포여? 하고 다시 물어보니 다시 "포"라고 대답했다. 쓰리랑 포도 헛갈리면서 용케 영국에서 살고 있네. 어쩔 수 없이 우체국 옆에 붙은 조그만 가게에 들어가 참치 샐러드 통조림, 초코바 두 개, 정체불명의 고기가 든 따뜻한 패스트리 빵과 정체불명의 '아시아'라고 쓰인 컵라면을 하나 샀다(좀 많아 보이지만 저녁에는 음식이 많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넵튠의 계단. 수문들이 이어져 있다.

넵튠의 계단(Neptune's Staircase). 해신의 계단이다. 포트 윌리엄과 인버네스 사이의 호수들을 연결해서 스코틀랜드를 동서로 배를 타고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든 칼레도니안 운하(Caledonian Canal)의 포트 윌리엄 쪽 바다로 통하는 거의 마지막 관문이다. 층층이 높이가 다른 수문들이 겹겹이 쌓여 마치 넵튠(포세이돈)이 바다에서 계단 타고 올라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양반 삼지창 들고 바다에서 올라오는 순간 인간 세상 멸망할 것 같지만 아무튼 그렇다.

꽃과 풀이 우거진 하천변과 칼레도니안 운하

첫날 코스가 가장 쉽다더니 운하 옆길 따라 잘 포장된 길을 걷기만 하면 되었다. 이렇게 쉽다니 내가 너무 난이도를 낮게 선택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물론 며칠 후에 이 생각은 쓸데없는 생각이었음이 밝혀졌다). 운하를 따라 걷는 길은 아주 편하고 평화롭고 아름답고 그 산에 그 물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훌륭한 코스였다. 1800년대에 만들어진 이 운하는 인공적인 운하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그냥 동네 자연 하천처럼 꽃과 풀이 우거진 강둑 옆을 흐르고 있었다.


점심 먹을 시간이다. 당연하지만 코스 중간에 식당 따위는 없다. 점심은 자기가 직접 준비하던가 아니면 숙소 주인에게 부탁해서 도시락을 싸달라고 하기도 한다. 먹을 곳이 어디 있냐고? 그냥 가다가 아무 데나 앉아서 먹는다. 나는 내 체력을 잘 알기 때문에 이것을 준비했다. 포트 윌리엄에서 산 의자.

나는 이걸 배낭에 접어서 넣고 다니다가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이걸 펴고 앉아 쉬고 또 걸었다. 사람들이 그거 뭐냐고 너무 잘 샀다고 부러워했다. 물론 돌이나 나무 위에 앉아도 되지만 여기는 하이랜드다. 잔디밭 속에는 깔따구가 있다. 이 깔따구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얘기하겠다. 너무 무서운 얘기니까.

유람선이 지나간다. 사람들이 손을 흔든다. 시원해 보인다.

아름다운 산과 물을 바라보며(마침 비도 안 왔다) 의자를 펴고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빵을 먹었다. 운하에서 유람선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개 산책시키러 나온 사람들이나 나처럼 코스를 걷는 사람들도 마주치면 다 하이~ 하고 인사했다. 싹퉁머리 없는 인간들만 사는 런던 같은 데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산과 물이 참 좋구나. 요트가 떠 있는 칼레도니안 운하 곁의 마을.

오늘 묵을 숙소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도착 예정 시간을 미리 숙소 주인에게 알려주면 시간 맞춰 픽업을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근데 내가 몇 시에 도착할지 어떻게 가늠을 하겠는가. 이런 거리를 걸어 봤어야지. 처음에는 기세 좋게 걸었으나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오후 4시면 떡을 치겠지 하고 주인장한테 전화를 해놨는데 시계를 보니 4시까지 도착 못 할 것 같았다. 막판에는 아픈 발로 경보를 해서 겨우 시간 맞춰 도착했다. 주인장 차 앞에 도착한 시간은 3:58. 하루 동안 걸어서 출발지까지 돌아온 만큼의 땅을 가지게 되는 남자가 결국 자기 무덤만큼만의 땅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왜인지 갑자기 생각나며 4시까지 도착 못 하면 주인이 죽인다고 한 것도 아니고 돈을 더 내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시간 맞춰 도착하고 말았다.


나처럼 한 명만 걷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B&B 방이 대부분 트윈이나 더블룸이어서인지, 나는 혼자 방을 쓰지만 싱글룸 차지에 추가 비용을 내면서 다녔다. 그래도 좋은 방에 아침밥까지 주는데 10박 숙박비에 가방도 옮겨주는 서비스까지 다 포함해서 천 파운드밖에 안 됐다. 이게 왜 '밖에'라고 생각이 드냐면 스코틀랜드 가기 직전에 내가 하와이를 다녀와서일지도 모른다. 미친 하와이 물가를 겪고 오니 영국 물가가 우스워 보이는 부작용이 생겼다. 거기는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은 그지 같은 방도 1박에 30만 원이나 하는데 여긴 흰 장갑 검사 해도 티끌하나 안 나올 방에 아침밥까지 주면서 1박에 겨우 13만 원 수준이라 나는 이 돈 내고 이런 방 혼자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황송했다.

주인이 깨끗함 병에 걸려 모든 침구를 매일 삶는다는 B&B
숙소 창문에서 바라본 풍경. 절경이로세.

저녁밥을 먹을 데가 없기 때문에 카올에서 사 온 컵누들과 스테이크 파이를 먹었다. 먹을 게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아니면 주인장한테 또 읍내에 태워다 달라고 해야 하는데(게다가 다 먹으면 또 데리러 오라고 해야 하고) 내가 이럴 줄 알고 먹을 것을 넉넉하게 사 왔지. 우아한 방에서 혼자 앉아 차를 마시며 대충 저녁을 때웠다. 처음으로 하루에 17km나 걸었더니 발이 너무 아프다.


1일 차 기록 끗.


김탱고 작가님의 오마주 SF 버전 네온 글렌 웨이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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