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의 산길에서 밥 먹는 거지

그레이트 글렌 웨이 2일째

by 마봉 드 포레

[ 8월 5일, 여행 23일째, 그레이트 글렌 웨이 2일 ]

출발지: 게얼로키

도착지: 라간(Laggan)

숙소: South Laggan, Forest Lodge

걸은 거리: 19km


헤더스(The Heathers)라는 우아한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은 이안과 쉴라라는 이름의 부부였다. 주인아저씨인 이안은 자기네 나라 브렉시트 걱정(이때만 해도 브렉시트가 온갖 뉴스며 신문마다 다 화두였다)은 안 하고 남의 나라 미국의 도람푸가 대선후보가 되었다며 그렇다고 클린턴이 괜찮은 것도 아닌데 그 인구 많은 미국에서 대선 후보로 선출할 사람이 저런 미친놈들 뿐이라며 걱정하며 차를 몰았다(그런데 여행하는 동안 만난 많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도람푸가 대통령 되면 어떡하냐면서 걱정을 많이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그가 2선이나 해 먹고 있긴 한데 그때(2016년)만 해도 어느 정도까지 도른 짓을 할지는 아마 그들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내가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니까 어휴 너네는 정으니 때문에 어뜨카니~ 라며 걱정도 해주었다.


게스트하우스는 정말 한 점의 티끌도 없이 깨끗했다.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집인가 했는데 방에 있는 책자를 보니 1800년대부터 있던 건물이 벼락을 맞아 모두 타 버리고 1999년에 새로 지어 지금 주인 부부가 운영하는 것이었다. 20년이나 되어가는 집인데도 벽이며 가구며 침구며 어느 것 하나 얼룩 한 점 없었다. 아저씨가 "마누라가 청소에 까다롭다."라고 했는데 엄청 신경 쓰지 않으면 맨날 사람들이 드나드는 게스트하우스를 이렇게 깨끗하게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엘레강스한 침실과는 달리 욕실은 번쩍번쩍 빛나는 새 샤워와 냉온수가 한 수도꼭지로 조절되는 세면대(영국의 전통 세면대는 작아서 양말 한 짝 빨 공간도 안 되며 수도꼭지는 멍청하게 뜨거운 물 찬물 양쪽으로 나뉘어 있어 물을 받아놓고 세수하지 않으면 왼쪽은 얼음지옥, 오른쪽은 불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옷과 타월을 걸어놓을 수 있는 행거가 있고 포트 윌리엄에서 본 하이랜드 소프(Highland Soap)의 천연 재료로 만든 샤워젤과 핸드워시가 갖춰져 있었다.


안내 책자의 식사 메뉴 설명에는 '집에서 구운 빵과 스콘, 그리고 로컬 잼 경연 대회에서 우승한 쉴라의 마멀레이드'에 대한 설명이 있길래 왠지 빵 굽는 통통한 아줌마를 상상했는데, 실제로 보니 쉴라는 깡마르고 안경 쓰고 키는 남편보다 더 큰, 이따위 날씨에도 단정하게 다린 블라우스와 각 잡힌 면바지를 입은, 백 미터 밖에서 봐도 영국 아줌마, 아니 오히려 기숙학교 사감 선생님 같은 여자였다. 이런 아줌마라면 내가 방 쓰다가 벽에 칠이라도 조금 벗겨지게 하거나 침대에 뭐라도 흘리면 디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무서워서 체크아웃하기 전에 세 번 방을 점검하고 나왔다.


아줌마는 실제로도 짜증이 많은 성격에 틀림없었다. 이 근처에는 식당이나 가게가 없기 때문에 다음날 먹을 점심을 숙소 주인장에게 싸달라고 할 수 있는데(물론 돈 주고), 이 여자는 처음부터 기분이 뭔가 안 좋아 보였다.


○ 아침 메뉴 설명할 때

이안: 여보 이 메뉴에 있는 케저리(Kedgeree)가 뭔지 이 손님한테 설명 좀 해 줘요.

쉴라: 왜 내가요? 당신도 케저리 뭔지 알잖아요.


○ 내일 도시락 싸가는 얘기 할 때

쉴라: 뭘 만들 수 있지? 아무것도 없는데(아저씨 왈 매주 금요일에 포트 윌리엄에 가서 장을 보는데 오늘은 목요일 저녁이라 집에 식량(?)이 다 떨어져서 싸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 다음 날 도착지까지 가는 길에 식당이나 카페가 있는지 물어보자

쉴라: 난 그 길 가본 적 없어서 몰라요.


나한테 직접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인데도 아줌마(나랑 나이차이 별로 안 날 텐데?)는 남편에게 대고 대답을 했다(나한테 대답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말을 해도 다 저런 모양새라 나도 별로 말을 섞기 싫었다. 남편 양반은 농담도 많이 하고 손님들하고 얘기도 많이 하는 반면 부인은 다음날 아침에도 다른 손님들에게도 꼭 필요한 말 이상은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아저씨가 평소에 집에서 하는 농담은 거의 들어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쉴라 아줌마의 아침밥 케저리(훈제 대구살 볶음밥)

하지만 아줌마가 구운 빵과 마멀레이드는 진짜 맛있긴 했다. 케저리라는 것은 볶음밥이었다. 훈제 대구의 두툼한 살과 야채를 넣고 볶은 후에 수란을 위에 얹고 방울토마토를 반쪽씩 쪼개서 접시 주위에 두르고 쪽파를 썰어 뿌리는 등 그냥 아침식사인데도 장식까지 해서 갖다 주었다. 옆방에 묵는 가족과 큰 테이블에서 같이 밥을 먹었는데, 숲길을 걸을 거라고 하니 깔따구(Midge) 조심하라는 얘기만 열 번도 넘게 했다.


주인아저씨는 갑자기 나한테 그림책을 가지고 와서 읽으라고 했다. 구름처럼 날아다니는 벌레들에게 쫓기고 물리는 사람들의 그림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깔따구의 습성과 생활환경, 그리고 역사적으로 깔따구에 얽힌 일화들이 실린 책의 제목은 『Midges - The Terror of Highland』였다. 그 와중에 아저씨들은 "깔따구는 남자만 문다고 하더라고!" "그럼 여장을 합시다!" "당신 곰돌이 같은 그 수염은 어쩔껴?" 따위의 얘기나 하고 있었다.

호수가 보이는 숲 속을 걸어요. 쓰러진 통나무 위에 이끼가 가득하다.

10시 반에 어제 주인아저씨가 픽업한 장소부터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어제와는 달리 숲길(!)부터 시작이었다. 발이 아파서 아주 천천히 걸으며 사진도 찍고 간식도 먹고(어제 카올에서 사 온 간식들이다), 중간에 비 맞아 젖은 옷은 운하 위에 떠 있는 진짜 배를 개조해서 만든 카페인 Eagle the Inn Barge에 들어가서 말리고 차를 한 잔 마셨다.

운하 옆길을 따라 걷는 길. 요트와 배들이 정박된 운하 가장자리. 하늘 보면 날씨 대충 짐작. 계속 비 뿌림.

라간(Laggan)의 숙소 포레스트 로지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6시였다. 19km를 걷는 데 8시간 반이나 걸렸다. 무엇보다도 이 트레일은 중간에 공공 화장실 같은 것이 없다. 어느 풀숲에 들어가야(?) 지나가는 자전거 눈에 안 띄고 볼일을 볼 수 있을까 고민했으나 다행히 나는 전생에 모래쥐였기 때문에 물을 잘 안 마신다. 그래서 카페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7시간을 화장실 안 가고 잘 버텼다.

오늘의 코스는 이 호수를 끼고 호수가 보이다 안 보이다 하는 숲길을 걸었다


오늘의 코스

누구네 집 양들일까... 당당하게 길을 걸어간다. 주인은 어딨니?

○ 길 상태: 숲 속에서 중간중간 질척한 곳 빼고는 상태가 좋았다. 국도와 겹치는 부분에서는 차 피하기가 좀 귀찮았다. 양 엉덩이를 바라보면서 걸어가는 구간도 있었다(위의 사진).

수종을 보면 딱 봐도 북쪽 나라 같아 보인다. 이때는 해가 쨍쨍 비쳤는데...(데... 데...)

○ 날씨: 중간에 해가 비치기도 했지만 막판에 4분의 1쯤 남은 지점부터는 비가 엄청 쏟아졌다. 우산, 방수 재킷, 방수 등산화와 배낭 방수 커버로 무장한지라 바지만 좀 젖고 괜찮은 상태로 숙소에 도착했다. 이 정도라면 나머지 코스도 괜찮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누가 베어 놨을까... 저 위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호수를 바라보며 거지처럼...
스코틀랜드 산길의 거지

○ 점심: 호수가 바라다보이는 통나무 위에 앉아 남은 빵과 초코바를 먹었다. 카올에서 먹을 거 충분히 사 오길 진짜 잘한 듯.


○ 깔따구: 3분의 1 남은 지점부터 꽤 많이 나타났지만 물리지는 않았다. 들고 있던 옷이나 우산 등을 마구 휘둘러 쫓아버렸다.

아이고 나무가 쓰러져서 호수에 잠겨 있네~

○ 만난 사람/생물들: 나는 그냥 걸어만 가도 힘든 길을 6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 두 명이 마라톤 복장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고 운동부족인 나 자신을 탓하며 걸었다. 그 외 인도 가족 세 명도 만났다. 나는 라간까지 19km를 가는데 이 사람들은 십 대 딸까지 데리고 나보다 3km 더 걸어 인버개리까지 간다고 했다. 그리고 폭우 속을 으아아아아! 하고 소리치며 자전거로 달려가는 반팔 입은 여자도 만났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자전거족들과 그보다 더더더 많은 양 떼들도 만났다.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호숫가... 저런 길 계속 걸어갔다

○ 숙소: 역시 주변에 아무것도 없지만 첫 숙소 헤더스와 달리 완전 웰컴하는 분위기에 추울까 봐 방에 미리 히터까지 틀어놓고 반겨 주었다. 셀프 바에 차와 건포도 넣은 케이크도 알아서 먹으라고 내놓아져 있었고 음료수와 과자, 초코바도 양심바구니와 함께 놓여 있어 잔돈을 털어 과자도 먹고 내일 먹을 초코바도 샀다. 게다가 주인아줌마(나보다 젊지만)는 내일 점심밥은 뭘 싸줄까? 하고 아주 당연한 듯이 물어보았다.

호숫가의 언덕이 주름진 것처럼 생겼다

발(특히 발 볼 부분)이 너무 아파서 내일도 쉬엄쉬엄 걸어야 할 것 같다. 내일 코스는 아주 쉬운 길이라고 하고 게다가 중간에 식당이랑 카페도 있다! 내일 도착할 포트 오거스터스(Fort Augustus)는 관광객이 많은 동네라 식당이랑 카페랑 가게들이 많다고 해서 기대가 된다.

계속 이런 풍경이다. 근데 물가 구경하는 거 좋아해서 안 질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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