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글렌 웨이 3일째
출발지: 라간(Laggan)
도착지: 포트 오거스터스(Fort Augustus)
숙소: 포트 오거스터스, 칼레도니안 하우스(Caledonian House)
걸은 거리: 17km
숙소 주인아줌마가 점심을 잔뜩 싸주는 바람에 배낭이 무거워졌다. 샌드위치와 주스, 과일, 포테이토칩에 초코바까지 아주 골고루 넣어줘서 너무 감사한데 고맙다는 말을 땡큐밖에 모른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너무 많이 걸어서 발 볼이 아픈 증상(발 볼이 불에 달군 것처럼 욱신거린다 - 이름하여 중족골통)은 많이 걷고 무게(...몸무게?)를 지속적으로 지탱하다 보니 생기는 건데 아무리 검색해 봐도 치료법은 많이 안 걷고 쉬는 것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안 걸으면 다음 목적지까지 못 가는 걸ㅜㅜ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발이 아프면 무조건 접이식 스툴을 펼쳐 앉았다. 걷다가 스툴 펴고 앉아 감자칩 먹고, 걷다가 스툴 펴고 앉아서 초코바 먹고...(대략 3보 1스툴)
같은 숙소에 묵었던, 다른 여행사를 통해 그레이트 글렌 웨이를 걷는 젊은 미국인 커플 역시 발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포트 오거스터스까지는 걷는 코스가 하나뿐이라(포트 오거스터스를 넘어가는 순간 길이 둘로 갈린다) 가다 보면 같은 사람을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마주치게 되는데, 자기들도 주저앉고 싶지만 앉을 곳이 없다며 내 스툴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내가 너무 자주 쉬는 바람에 그들의 모습도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1947년에 폐선된 인버개리 앤드 포트 오거스터스 철도(Invergarry and Fort Augustus Railway)의 종점인 인버개리 역을 지났다. 포트 오거스터스와 인버개리를 연결하여 하이랜드 내륙 교통망 확충을 목표로 1903년에 개통된 이 철도는 노선 길이도 16km로 너무 짧고 무엇보다도 수요가 너무 적어 1933년에 여객 운행이 중단되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곳이다. 지금은 이렇게 철도가 있었던 흔적만 남아 있다.
길은 다시 운하와 만났다. 어디선가 장엄한 배 소리가 들린다! 배 이름은 무시무시하고 어마어마하고 존엄이 가득하다. 무려 'Lord of the Glens'. 배를 본 순간 갑자기 눈을 깔아야 할 것 같고 배가 지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엎드려 고개를 들면 안 될 것 같았다. 검색해 보니 오반(Oban), 스카이 섬 등을 거쳐 칼레도니안 운하를 지나 인버네스까지,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다니는 크루즈선이었다.
배가 운하를 지나가는 모습을 설명하기 전에, 운하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자. 그레이트 글렌 웨이는 칼레도니안 운하(Caledonian Canal)를 따라 걷는 코스다. 이 운하는 어쩌다가 만들어졌을까?
서쪽의 대서양(포트 윌리엄)부터 동쪽의 북해(인버네스)까지 하이랜드를 가로로 통과하는 운하이다. 길이는 약 96km. 그러나 이 운하는 완전히 물길을 새로 판 게 아니라 이미 있는 자연 호수들을 연결한 구조이다.
연결되는 대표 호수들
Loch Ness(괴물이 나온다는 그 네스호)
Loch Oich
Loch Lochy
운하 완공은 1822년. 와우.
원래는 나폴레옹 전쟁 때 스코틀랜드 북쪽을 돌아서 항해하는 것이 날씨며 폭풍 등으로 너무 위험해서 안전하게 내륙을 통과해서 배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운하를 설계한 사람은 토머스 텔포드(Thomas Telford)라는 스코틀랜드 토목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이 사람이 얼매나 유명한가 하면 그레이트 글렌 웨이뿐 아니라 나중에 가본 스코틀랜드 동쪽의 다른 소도시 등 여기저기에서 텔포드의 이름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이랜드는 지형 자체가 산 너머 산이다 보니 각기 다른 고도의 호수들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수위 차이를 인공적으로 조절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갑문이 필수다. 위의 사진을 보면 갑문을 사이에 두고 양쪽의 수위가 다르다. 배가 지나갈 때마다 갑문과 갑문 사이의 수위를 올렸다 내렸다 해서 양쪽의 물 높이를 동일하게 한 다음, 문 열어주고, 배 지나가면 다시 그 구간 물 빼고... 이런 식으로 배가 지나가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가 첫날 지나온 '해신의 계단'을 통해 대서양으로 빠져나가게 된다(네스호의 괴물도 갑문 안 열어주면 바다로 못 나간다).
자 이제 우리 아는 거 나왔다. 덴마크 복병을 찔러 아야하게 해서 들키는 바람에 스코틀랜드를 구했다는 스코틀랜드의 상징 엉겅퀴다. 이 엉겅퀴가 가득 찬 들판과 운하 옆의 반듯한 길을 지나자 결국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아예 퍼붓는데도 노인네들도 어린애들도 우산 받는 이 하나 없었다(나만 우산 폈다 - 조금 분함).
바람이 거세어졌다. 오늘 밤부터 내일 밤까지는 강풍 예보가 있다. 가는 길도 점점 바람에 밀릴 정도로(나 정도의 무게조차!) 강풍이 불기 시작했다.
가다가 어제 만난 인도인 가족들 중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제대로 자전거 라이더 복장을 하고 반대 방향으로 자전거를 달리는 중이었다. 인버개리로 '차를 가지러' 가는 중이라고 했다. 뉴캐슬에서 온 이 가족은 한 지점에서 다음 지점까지 셋이 같이 걸어간 다음,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출발지로 도로 가서(평균 17-22km) 차를 숙소까지 가지고 오는 짓을 에브리데이 하고 있었다. 그 집 딸이 어제 그 아줌마 오늘은 안 보이는데 괜찮은 건지 걱정했다고 한다ㅜㅜ(그렇게 부실해 보이나...)
자기네 가족은 이미 예저녁에 포트 오거스터스에 도착해서 차 마시고 있다고 나에게 힘내라고 하고는 인도인 아버지는 퍼붓는 빗속을 자전거로 달려가 버렸다. 정말 대단들 하구나... 숨만 쉬며 살아온 이 부실한 체력을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있으니 한국인으로서 부끄럽다.
포트 오거스터스는 관광객이 어찌나 많은지 카페도 식당도 빈 테이블 찾기가 어려웠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아예 버스 여러 대를 타고 와서 온 동네 식당과 카페들을 다 점령 중이었다. 신기한 것은 이 중국인들은 중국 본토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이미 영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이었다. 나 1995-1996년에 영국에 있을 때만 해도(라떼는 말이야 또 나옴) 중국인은 홍콩 아니면 대만 사람뿐이었고 유일하게 본토 애는 공산당 간부 아들 한 명 본 게 전부였는데, 20년 후 스코틀랜드 여행하면서 본 중국인들은 다 '이민 온' 중국인이었다.
그레이트 글렌 웨이의 딱 중간 지점인 이 마을은 괴물로 유명한 네스 호의 입구에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바로 이 괴물 모형이다. 선물가게마다 타탄 모자를 씌우거나 킬트를 입은 귀여운 괴물 인형, 괴물 그림, 괴물 카드, 괴물 티타월, 괴물 열쇠고리... 아주 그냥 사골국마냥 괴물을 우려먹고 있었다.
숙소에 찾아가니 담배 냄새나는 엄청 쾌활한 아줌마가 걸걸거리는 웃음소리로 맞이했다.
"우리 스위트피, 내일 아침으로 뭐 줄까?"(아줌마, 저 마흔이에요...ㅜㅜ)
이 걸걸한 아줌마네 집에서 나는 2박을 하게 된다. 코스 중간에 여기랑 다른 동네에서 각각 Additional night 1박씩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며 바람이 더욱 더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창문 바로 앞이 큰 나무인데(약 4-5층 높이) 나무가 휘어지듯 흔들리는 그림자를 보니 저 나무가 부러지면 내 방 창문을 뚫고 들어올 것 같았다. 진심으로 나무가 쓰러져서 내 방 창문을 깨고 들어올 것 같아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람 소리는 저 밖의 운하에 네스호의 괴물이 어찌어찌 수문을 뚫고 들어오다가 몸이 끼는 바람에 울부짖는 소리라고 해도 믿을 만큼 엄청났다.
중간에 아무 데서나 추가 숙박 신청해도 되는데 굳이 포트 오거스터스를 고른 것은 여기쯤 오면 내가 발이 아플 것을 예상해서가 아니라 그냥 동네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정말 순수하게 100% 이름 보고 골랐다.
그러나, 정말, 여기서 하루 안 쉬었다면 나는 나머지 코스를 어떻게 걸었을지...
방은 아늑하고 좋았지만 히터를 틀어도 너무너무 추웠다. 창틈을 통해 거센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8월 초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내일은 안 걷고 그냥 푹 쉬고 동네 구경만 하면 된다. 다행히도 이제까지 지나 온 동네들처럼 허허벌판에 숙소 하나 있는 곳이 아니다 보니 구경할 것은 좀 있어 보였다. 이렇게 번화(?)한 곳에서 묵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겨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