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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의 우상론과 정보 접근성의 함정

by 김경훈

근대 경험론의 아버지 프랜시스 베이컨은 올바른 지식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부숴야 할 네 가지 우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제시한 이 우상론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 속에 갇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한 진단서이다.

이 400년 전의 진단은 오늘날 정보 기술과 접근성을 고민하는 연구자들에게 여전히 서늘한 현실로 다가온다.


여기 의욕 넘치는 개발팀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혁신적인 쇼핑 도우미 앱을 만들기로 한 가상 이야기가 있다.

그들의 목표는 선의에 가득 차 있고 기술력도 뛰어나다.

하지만 그들은 베이컨이 경고한 네 가지 우상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첫 번째로 그들은 종족의 우상에 빠진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 중심적 사고 즉 인간 자신의 감각과 기준으로만 세상을 해석하는 편견을 말한다.

이 개발팀 역시 자신들의 시각 중심적 사고로 시각장애인의 세계를 상상한다.

그들은 시각장애인이 상품의 이미지를 보지 못해 불편할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앱의 핵심 기능을 상품 이미지를 카메라로 비추면 인공지능이 장황하게 설명해주는 것으로 정했다.


두 번째로 그들은 동굴의 우상에 갇힌다.

동굴의 우상은 개인이나 집단의 한정된 경험과 사고방식 안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편견이다.

개발팀은 자신들이 비장애인이라는 편안한 동굴 안에서 시각장애인의 삶을 상상만으로 재단했다.

그들은 실제 시각장애인 사용자를 만나 그들의 진짜 필요를 확인하는 경험적 단계를 생략했다.

만약 그들이 동굴 밖으로 나와 사용자들에게 직접 물었다면 사용자들은 복잡한 이미지 설명 기능보다 그래서 파스타 코너가 몇 번째 통로인가요라는 단순한 안내가 더 절실하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로 개발팀은 시장의 우상과 극장의 우상에 기대었다.

시장의 우상은 언어의 모호함과 소통 과정의 오류에서 비롯되는 편견이다.

그들은 직관적인 사용자 환경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 직관이 누구에게 직관적인지 명시하지 않았다.

극장의 우상은 기존의 이론이나 권위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편견이다.

개발팀 역시 기존 접근성 가이드라인의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면서 실제 사용 환경에서의 검증과 적용은 소홀히 했다.


베이컨은 이러한 우상들을 부수는 도구로 귀납법을 제시했다.

그는 보편적인 이론에서 출발하는 연역법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례를 면밀히 관찰한 뒤 그것을 종합하여 보편적 원리를 찾아가는 귀납적 방법을 강조했다.

개발팀이 걸어야 했던 길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시각장애인은 이럴 것이다라는 섣부른 보편 명제에서 출발하는 대신 개별 사용자의 구체적인 경험과 필요라는 특수 명제들을 먼저 수집하고 관찰했어야 했다.


결국 정보학 특히 접근성 연구는 베이컨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굴을 탐사하는 일이다.

개발자들의 동굴 디자이너들의 동굴 정책 입안자들의 동굴을 방문하며 그들이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알려야 한다.

자신도 모르게 갇혀 있는 편견이라는 우상을 부수고 관찰과 경험이라는 빛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모두를 위한 진정한 정보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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