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던 시대에 단 하나의 확실한 진리를 찾아 헤맨 철학자이다.
그가 택한 방법은 바로 방법적 회의였다.
이것은 마치 낡고 불안정한 건물을 완전히 허물고 가장 튼튼한 주춧돌 하나를 찾아 그 위에 새로운 집을 짓는 과정과 같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방법을 한 시각장애인 연구자의 일상에 적용해보자.
그는 최신 인공지능 앱의 도움을 받아 낯선 길을 걷고 있다.
앱은 그의 귀에 이렇게 속삭인다.
전방에 장애물이 없습니다 직진하세요.
이 감각 지식과도 같은 기술의 음성을 과연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데카르트의 의심이 시작된다.
첫 번째 질문은 이 앱의 감각은 완벽한가이다.
답은 분명히 아니다.
과거에 이 앱은 길가의 소화전을 사람으로 잘못 인식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앱이 제공하는 정보는 언제든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두 번째 질문은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하는가이다.
앱이 지난 백 번 동안 올바른 길을 안내했다 해도 그것이 백한 번째의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귀납법적으로 얻어진 지식은 항상 불확실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마지막으로 가장 극단적인 의심인 악마의 존재를 가정한다.
어쩌면 이 앱의 프로그램 안에 나를 속이려는 악의적인 코드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혹은 인공지능이 사용하는 세계 인식 모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구조일 수도 있다.
모든 외부 정보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을 때 과연 무엇이 남을까.
깊고 어두운 의심의 바다 끝에서 데카르트는 단 하나의 붙잡을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이다.
나는 이 앱의 정보를 의심하고 있다.
의심하고 있다는 이 생각을 하는 주체인 나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이 깨달음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합리론의 제1 원리이다.
외부 세계의 모든 확실성이 무너진 자리에서 내면의 이성적 자아만이 유일하고 확실한 진리로 남는다.
정보학을 연구하는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데카르트의 이 사유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기술에 의존하여 세상을 인지할수록 그 기술이 제공하는 정보의 한계와 오류 가능성에 대해 더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정보는 인간의 감각에서 오든 기계의 센서에서 오든 인식론적 주체인 나의 이성적 판단을 반드시 거쳐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데카르트의 위대함은 신이나 세계를 증명한 데 있지 않다.
그가 인간의 이성을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위대한 업적이다.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나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판단을 대신하려는 오늘날 나는 생각한다는 이 오래된 명제는 기술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금 일깨워준다.
그 주인은 언제나 의심하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이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