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환과 소연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두 사람 앞에는 값비싼 싱글 몰트 위스키가 담긴 잔이 놓여 있었다. 지환은 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찌르듯 훅 끼쳐오는 피트 향 뒤로 씁쓸하고 축축한 흙냄새가 났다. 마치 다 타버린 장작에 찬물을 부었을 때 나는 냄새 같았다. 지금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향은 없었다.
내일모레면 두 사람이 가입한 연애 보험 정확히는 상해 및 이별 위로금 특약의 만기일이었다.
2096년 사랑은 변수를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금융 상품이 되었다. 사람들은 연애를 시작할 때 이별 보험에 가입했다. 감정 소모와 시간 낭비 그리고 이별 후의 상실감을 돈으로 보상받기 위해서였다. 보장 내역은 세분되어 있었다. 단순 변심에 의한 합의 이별은 원금 수준의 환급에 그쳤지만 일방적인 잠수 환승 이별 혹은 심각한 폭언이 오간 파국일 경우 수령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뛰었다.
두 사람은 원래 다음 달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웅장하고 성스러운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서 영원을 맹세하기 위해 식장 예약금까지 걸어둔 상태였다. 하지만 지난 삼 년간 그들의 사랑은 위스키의 첫맛처럼 강렬했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미지근한 물비린내만 남은 상태였다. 서로를 향한 설렘은 증발했고 남은 것은 지독한 권태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합의했다. 어설프게 결혼해서 평생을 낭비하느니 완벽하게 헤어지고 위자료나 두둑하게 챙기자고 말이다.
문제는 이별 보험의 심사 과정이었다. 인공지능 손해사정사는 두 사람의 생체 데이터와 메신저 대화 기록 그리고 이별 당시의 스트레스 지수를 분석해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했다. 가짜로 헤어지는 척만 해서는 심사를 통과할 수 없었다. 진짜로 상처받고 진짜로 혐오해야만 최고 등급의 보험금을 탈 수 있었다.
소연이 먼저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지금부터 서로가 가진 최악의 단점 절대 꺼내지 않았던 밑바닥을 하나씩 끄집어내자. 심박수가 치솟고 스트레스 호르몬이 폭발할 때까지.
소연의 입에서 날 선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환의 무능함 이기적인 태도 지환의 부모님에 대한 경멸까지. 처음에는 연기라고 생각했다. 보험금을 타기 위한 잘 짜인 대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환의 뇌파를 측정하는 스마트 워치는 이미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지환도 지지 않았다. 소연의 허영심 과거 연인들과의 비교 그리고 그녀가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는 의심까지 모두 토해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삼 년 동안 성당의 성스러운 종소리를 기대하며 서로의 입을 막고 억눌러왔던 진짜 혐오의 파편들이었다. 그들은 돈을 위해 억지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돈이라는 명분을 빌려 비로소 서로에게 진심을 쏟아내고 있었다.
언성이 높아지고 유리잔이 벽에 부딪혀 깨졌다. 파편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지환은 숨을 몰아쉬며 소연을 노려보았다. 소연의 눈에도 독기가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고 있었다. 완벽한 파국이었다.
두 사람의 스마트폰이 동시에 울렸다. 인공지능 손해사정사의 심사 결과 알림이었다.
귀하의 이별 심사가 최고 등급으로 승인되었습니다. 청구하신 이별 위로금 5억 원이 각자의 계좌로 입금될 예정입니다.
지환은 알림 메시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계좌에는 평생 만져보지 못할 거액이 찍혀 있었다. 성공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보험금을 타냈다.
그런데 왜일까. 지환은 방금 깨진 위스키 잔의 파편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돈을 얻었지만 방금 전 소연이 뱉었던 날카로운 말들은 지워지지 않는 칼자국이 되어 가슴에 남았다. 그 상처는 5억 원으로도 꿰맬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소연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쳤다. 현관문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멀어 보였다.
문이 닫히고 지환은 텅 빈 거실에 홀로 남았다. 공기 중에는 여전히 독한 위스키의 스모키한 잔향이 떠돌고 있었다. 그들은 돈을 잃지 않기 위해 가장 완벽한 이별을 연기했지만 결국 그 연기 속에서 서로의 진짜 바닥을 보고 완벽하게 파괴되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가입했던 이별 보험이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