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감각의 다양성과 칸트의 관념론

by 김경훈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책상이 있고, 하늘이 있고, 커피 한 잔의 온기와 향기가 실재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철학자 칸트는 이 상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 기관이 수집한 정보를 뇌가 일정한 형식에 따라 해석해 만들어낸 ‘현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관념론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진짜가 아니라, 감각과 사고가 빚어낸 하나의 가상현실인 셈이다.


이 주장은 특히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이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통찰로 다가온다.

한 시각장애인이 새로 출시된 복잡한 커피 머신 앞에 섰다고 하자.

그의 친구는 기계의 형태와 색상, 버튼의 아이콘을 시각으로 인식하고 머릿속에 ‘커피 머신의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정적이고 평면적이며,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기계를 이해한다.

손끝으로 외형을 더듬고, 버튼의 위치를 하나하나 익히며, 음성 피드백을 통해 기능을 파악한다.

그의 머릿속에는 ‘소리와 감촉으로 구성된 커피 머신의 지도’가 형성된다.

두 사람은 동일한 기계를 경험하지만, 각자의 감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이 말한 박쥐의 비유가 등장한다.

인간이 눈으로 사과를 보듯, 박쥐는 초음파를 통해 사과를 ‘듣는다’.

그러면 인간이 본 사과와 박쥐가 들은 사과 중 어느 것이 진짜 사과일까.

칸트의 대답은 분명하다. 둘 다 진짜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물자체가 아니라, 자신만의 감각 장치를 통해 구성한 ‘현상’에 불과하다.


시각장애인은 바로 그 박쥐와 같다.

눈 대신 귀와 손이라는 입력 장치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가 경험하는 세상은 소리의 명암과 촉각의 윤곽으로 구성된다.

그 세계는 비정상적이거나 결핍된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주관적 세계에 갇혀 소통이 불가능한 것일까.

칸트는 여기서 또 하나의 철학적 전환을 제안한다.

그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감성과 지성이라는 공통된 구조가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마치 각기 다른 입력 장치를 사용하더라도 동일한 운영체제를 탑재한 기계들이 서로 호환되는 것처럼, 인간은 서로 다른 감각 세계 속에서도 보편적인 질서를 공유할 수 있다.

이것이 칸트가 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정보학을 연구하는 시각에서 볼 때, 이 철학은 유니버설 디자인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정보 접근성이란, 하나의 감각에 의존해 설계된 정보를 다른 감각을 통해 경험할 수 있도록 ‘번역’해주는 작업이다.

시각 중심의 정보가 청각과 촉각의 언어로 재구성될 때,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동등한 ‘현상’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기술이 감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진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칸트는 감각의 위계를 해체하고, 누구의 감각도 결코 우열이 없다고 말한다.

그의 철학은 단지 이론적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존엄과 이해를 제공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적 기반이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떻게 보는가’보다 ‘어떻게 경험하는가’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모두가 각자의 감각으로 동등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정보 접근성과 칸트의 알고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