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서 집에 온 아내가 딸아이를 데리고 들어가 같이 씻는다. 모녀가 알몸으로 일과를 공유한다. ‘쏴’ 샤워기 물줄기 소리와 함께 엄마 있잖아 오늘 이랬어, 저랬어, 정말? 재밌었겠네, 힘들었겠네, 말소리가 섞인다.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거실로 넘친다. 소파에 기울어져 그 소리를 듣노라면 묘한 안도감이 든다. 오늘 하루도 평안히. 우리 세 식구가 무탈하게 하루를 살아냈다는 명징한 시그널이다.
문이 열리고 후끈한 수증기가 쏟아져 나온다. 아내가 큼지막한 수건으로 아이를 닦아준다. 그러면서 나를 부른다. “오빠, 얘 장래희망이 뭔지 들었어?” 말 사이로 쿡쿡 웃음소리가 샌다. “아니, 만날 바뀌잖아. 요즘 거는 못 들었는데.” 아내가 말을 잇는다. “글쎄, 캥거루족이래. 자기는 이다음에 커서 캥거루족 될 거래. 이를 어째.”
빵 터졌다. 캥거루족이라면 독립할 나이가 되어서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고 의식주를 다 부모에게 의탁하는 청년들을 빗댄 말 아닌가. 우리 딸 장래희망이 설마 그거라고?! 아이에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물었다. 아이가 사전적 의미를 정확하게 내놓는다. 나도 아내처럼 한바탕 웃는다. 기상천외함과 어처구니없음, 여러 감정이 섞여서 웃음으로 화한다.
자기는 어른 돼서도 엄마 아빠랑 같이 살 거란다. 그러면 힘들게 돈 안 벌어도 되고, 지금처럼 밥도 해줄 거고, 맛있는 외식도 시켜주지 않겠냔다. 무엇보다 혼자 살아서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을 테니까 좋단다. “그럼 엄마랑 아빠는 파파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텐데 그때까지 일해서 너 벌어 먹이라고? 생각만 해도 힘들..” 까지 말하는데 아이가 소파 위로 뛰어오른다. 내 입을 틀어막는다.
일전에 아이에게 빨리 어른 되고 싶지 않은지 물었다. “난 지금이 제일 좋아. 적당히 공부하고 남는 시간에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고. 어른 되면 힘들게 일해서 돈 벌어야 되잖아. 친구도 잘 못 만나고 참아야 하는 것도 많잖아.” 완전히 뜻밖의 대답이다. 나는 어려서 같은 질문에 강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아야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진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어른들 허락받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어른이 되면 운전면허부터 딸 테다. 아버지 차를 빌려 이곳저곳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었다.
한 번은 아내가 아이에게 너 이제 중학교 가면 지금처럼 놀러 다닐 시간도 없어, 말하는 걸 엿들었다. 아이 얼굴이 단번에 찡그려진다. “힝, 내가 그래서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는 거 싫어. 불편한 교복도 입어야 하고 학원 수업도 늦게까지 들어야 하잖아. 보나 마나 독서실까지 다녀야 할 것 같은데 싫어 싫어.” 아이에게 성장이란 것은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대상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안 가봐도 빤한 고생길이다.
이를 어쩐다. 사태의 원인을 두 가지쯤으로 좁힌다. 먼저, 아이는 눈치가 빠르다. 뭐든 빨리 익히는 편이다. 우리 딸만 그런 게 아니라 요즘 아이들이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스마트폰이나 IT기기 다루는 것 보면 어른들을 능가한다. 손가락이 안 보인다. 넘치는 정보, 준비된 학습 능력으로 어른의 삶은 고된 것이라고 먼저 배워버렸다. 나 어릴 때는 좀처럼 선명한 것이 없었다. 어른의 삶도 상상의 영역이었다. 불투명한 미래는 역설적으로 기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온갖 미디어가 귀띔해주는 어른의 일상이 아이에겐 영 재미없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다음, 엄마 아빠의 탓도 크다. 너 하나 키우려고 엄마랑 아빠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아이 앞에서 너무 앓는 소리를 한 건 아닐까. 고생만 하는 것 같은 엄마 아빠, 어른의 삶이 아이에겐 하나도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아내가 달라져야 한다. TV에 자주 나오는 육아, 반려견 전문가의 코칭을 종합하면 결국 부모, 보호자 탓이다. 이제부터 다르게 하겠다.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도 네가 좋아하는 것 할 시간이 얼마든지 있고, 무엇이든 너 하기에 달렸다, 라고 말하련다. 아이한테 고되다, 힘들다는 소리도 삼가야겠다. 어른의 삶이 고단하지만은 않다고 알려주어야 하겠다. 분명 책임은 따른다. 다만 지킬 것만 잘 지키면 그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다.
캥거루족은 실체적 근거가 있는 말이다. 주말 나른한 시간에 방영하는 오래된 동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실제로 보았다. 다 큰 캥거루 새끼가 엄마 젖을 끊지 못하고 비좁은 육아낭에 억지로 파고든다. 어미는 어쩌지 못하고 힘겹게 몸을 가눈다. 그것이 아내와 나의 미래여서는 안 될 텐데. 딸아, 캥거루가 들판을 뛸 때 봤니? 근육질 다리로 펄쩍펄쩍 차고 나아가거든. 엄마 아빠는 우리 딸이 진정한 캥거루족이 되길 바란다. 그런 뜻에서 캥거루족이 장래희망이라면 얼마든지 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