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부엌 한쪽 벽에는 식탁을 붙여 놓았다. 앉으면 눈높이쯤 되는 벽 중간에 창문 만 한 액자가 있다. 몇 해 전 어느 날 모친이 힘들게 가져오신 물건이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쓴 시에 그림을 보탠, 말하자면 시화(詩畵)다. 유명한 화가가 된 아버지 후배가 오래전 아버지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들었다.
겹겹이 쌓은 능선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산세가 거칠다. 강원도 산골 어디쯤일 테다. 골짜기 사이로 산 새 몇 마리가 날고 있다. 하늘 빈 곳에서 세로로 글자가 내려온다. 아버지가 어려서 자란 곳, 그때의 상념을 노래한 시다.
시어 중에 낯선 말이 보인다. 이울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감이 예뻤다. 이응 발음이 거푸 붙어서 동글동글 보드랍다. 인터넷 국어사전을 뒤졌다. 귀여운 어감과 달리 뜻은 무척 쓸쓸하다.
[이울다] 동사
1. 꽃이나 잎이 시들다.
2. 점점 쇠약하여지다.
3. 해나 달의 빛이 약해지거나 스러지다.
이울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이운다. 꽃이나 잎, 해와 달만 이울지 않는다.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 모두 이운다. 단단한 돌과 바위도 이윽고 풍화에 침식된다. 사람의 청춘은 그중 유독 빠르게 이운다. 사랑 역시 쉬 이우는 것 중 하나다. 남자와 여자의 용광로 같은 감정은 마음먹은 것에 아랑곳 않고 빨리 이운다. 전부 덧없이 이우는 것들뿐이다.
그러다 단 하나 이울지 않는 것을 생각해낸다. 자식을 향한 아비와 어미의 마음. 그것만은 결코 이울지 않는다. 점점 더 크게 솟고 단단해진다. 부모의 육신이 시들고 쇠약하여 마침내 지는 순간에도 자식을 향한 사랑만큼은 눈부시게 빛난다.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시와 그림을 벽에 걸었다. 처음에는 마뜩지 않았다. 퇴근하는 아내를 기다려 물었다. “이거 아버지가 주신 건데 어떻게 할까.” 아내는 이사 온 집을 조금 모던한 분위기로 꾸미고 싶어 했다. 아내가 답했다. “어디 걸어두지 않으면 아버님 섭섭해하시겠지. 오빠가 적당한 곳 찾아서 걸어줘.” 그렇게 두 사람이 골몰하여 찾은 자리가 부엌에 식탁 붙여놓은 한쪽 벽이다.
우리 집 부엌에는 영원히 이울지 않는 아버지의 마음이 걸려있다. 비록 자식 내외의 취향과 처음부터 맞아떨어진 것은 아니었대도. 자식이 이사 들어간 집이 혹시 휑해 보일까 싶어 수중에 아끼는 물건을 들려 보낸다. 그 마음을 나도, 아내도 알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했다. 이제는 제법 눈에 익어서 좋다. 별 볼 일 없는 우리 집에서 가장 그럴듯한 공간이다.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는 흔한 말. 그 안에 이울지 않는 만고의 진리가 숨었다. 오늘도 일터에서, 아버지에게 배운 이울지 않는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