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빙상장

by Hoon

산뜻한 하루 출발하고 계시온지. 난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젯밤 올림픽 쇼트트랙 경기를 보고 도무지 진정이 안 된다. 덕분에 잠도 설쳤다. 무척이나 찌뿌듯한 하루를 시작한다.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홈 어드밴티지가 작동함을 모르지 않다. 과거 우리나라 역시 우리가 주최한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 수혜자가 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간밤의 일은 해도 너무했다. 선수들만 동의한다면 남은 대회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귀국시켰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기울어진 운동장도 어느 정도껏이어야지. 현지 경기장 컨디션이 좋지 못하다고 들었다. 얼음의 품질, 즉 빙질이 좋지 못해 충돌 없이 나가떨어지는 선수가 속출했다. 그건 물리적 조건에 불과하다. 우리 선수들은 처음부터 깨어진 빙상장을 달렸는지 모른다.


몇 해 전 상급자와 인사평가 면담 중에 물었다. “본부장님, 아시겠지만 저희 팀은 업무 성격이 다소 패시브(passive)하고 잘해야 본전인 부서입니다. 이대로라면 계속 저는 잘해야 중간 등급, 한 번 삐끗하면 하위 등급을 받아야 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건 말 그대로 기울어진 운동장 아닙니까.” 돌아오는 본부장 대답에 사고가 멈추었다. “응, 기울어진 운동장 맞아. 그러니까 Hoon 팀장이 더 열심히 해야지.” 그다음 얘기는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어제 올림픽 중계방송을 보다가 그때 그 일이 떠올라서 더 갑갑하고 막막했다. 살을 에는 고통을 참아내며 준비한 경기에 임하는데, 애초에 나에겐 게임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음을 알게 됐을 때, 어차피 정해진 결과에 내가 하찮은 들러리에 불과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중계방송 말미 카메라에 편파 판정의 피해자가 된 우리 선수들이 잠시 잡혔다. 취재진이 있는 믹스드 존을 지나갔다. 마스크 위로 이글거리거나 벌게진 눈빛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아니었다. 찰나지만 담담한 모습이다. 의연한 자세가 무척이나 대견스럽고 그래서 더 안쓰러웠다. 그래 봤자 응원하는 입장인 타인이 이러한데 본인은 얼마나 억울하고 비통할까.


한 선수는 사회 관계망에 농구의 신, 마이클 조던의 격언을 남겼단다. “장애물이 당신을 멈추게 하지 마라. 벽에 부딪쳤다고 돌아서서 포기하지 말라. 그 벽을 오르고 뚫고 나가거나 우회할 방법은 없는지 생각하라.” 마인드 셋, 마음가짐이 이미 금메달 감이다.


살다 보면 정의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니며 악의 무리가 더 쉽게 정상에 오르는 것을 가만히 목도해야 하는 때가 있다. 그야말로 무기력한 순간이다. 그렇더라도 아직 우리의 삶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기에 통계의 최종적 판단을 유보한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사필귀정의 경구를 손에 다시 한번 꼭 쥐어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리 딸 장래희망은 캥거루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