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연예인은 못 보지만

by Hoon

모교 선배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은 공대를 졸업하고 S전자에 입사했다. 몇 년 잘 다니다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었다. 모은 돈으로 2년 여 시간 동안 지구 반대편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히피 같은 행색으로 귀국해서는 치열한 준비 끝에 요리주점을 창업했다. 그렇게 시작한 점포가 어느덧 다섯 군데다. 직원이 마흔 명 남짓. 어엿한 중견 기업 대표가 되었다.


몇 호점 매니저가 가게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자신이 드라마 프로듀서라고 신분을 밝혔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금명간 새로 방영하는 드라마가 있다, 형네 식당을 빌려 하루 촬영을 하고 싶단다. 당연히 공짜를 바라지 않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촬영하는 조건으로 사용료 얼마. 자세한 건 레스토랑 대표와 직접 만나서 협의하고 싶어했다. 형은 내가 그쪽 계통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잘 알겠지 싶어 연락해왔다.


음, 번지수를 잘 찾으신 건가. 그러고 보니 일전에도 형이 비슷한 문의를 해왔다. 그때는 어떻게 결정했냐고 내가 반문했다. 당시는 비교적 소규모 촬영이어서 시간이 길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간단하게 끝났다는 답이다. 이번엔 대강 들어도 훨씬 대규모일 것 같다. 하긴, 방송사 프라임 타임 드라마라니 그야말로 본격적인 촬영 현장일 것이다.


평상시 나는 타인의 삶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단 내가 아끼는 이들에게는 오지랖을 자처한다. “형, 일단 그 정도 시간 촬영에 대관료 조건이면 나쁜 가격은 아니야. 통상 시장가를 웃도는 수준. 식당 업계 레벨을 감안한 거겠지. 한데 그게 다가 아니고 미리 따져 봐야 할 것이 많아. 모든 촬영 현장은 필연코 늦어지거든. 예상치 못한 현장의 변수 때문에. 촬영 지연되면 추가 사용료 지불은 어떻게 할 건지 물어봐. 또 형한테 더 중요한 건 가게 안 상하는 거잖아. 그 정도 규모면 육중한 촬영 장비들이 잔뜩 들어올 거야. 그게 다 쇳덩이거든. 부딪치면 깨지고 으스러진다는 얘기지. 심지어 분실되는 사례도 있어. 그런 것도 전부 보상받을 수 있어야 돼. 그리고 바닥! 형 식당 비싼 대리석으로 돼있지 않아? 지미집 같은 거 들어오면 자칫 상처 나고 깨질 수도 있어. 보상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그런 일 안 생기게 바닥 보강할 수단은 있는지 물어봐. 이런저런 조건 다 맞춰준다고 하면 계약서에 명시해 달라고 하고. 촬영 날은 최소한 형네 직원 한 사람이 딱 붙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돼.”


통화를 끊고 생각했다. 요즘처럼 자영업 현실이 어려운 때에 가외 수입은 가뭄에 단비다. 형이 제안받은 금액이면 직원 한두 명 월급은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 솔깃한 제안이다. 선뜻 수락할 법도 한데 대표자인 형은 숙려를 선택했다. 그럴 때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나라는 점이 조금 안쓰러울 뿐이다.


다시 전화가 왔다. 미팅을 한 차례 했단다. 촬영 지연에 대해 물었다. 시간당 얼마로 하지 말고 늦어지면 일괄 금액으로 정하자고 다시 제안을 받았다. 어차피 저녁 영업 못할 거면 매출 손실 고려해서 그렇게 하는 게 낫겠다고 나도 동의했다. 그럼에도 하루 통째로 손님을 못 받는 것에 형은 영 마뜩잖아했다. 바닥 얘기는 했느냐고 물었다. 아차, 그 얘기를 빠뜨렸네. 무거운 촬영 장비가 들어오는지, 보강이나 피해 보상 계획은 있는지 꼭 미리 물어보라고 일렀다.


주말 보내고 출근길 이른 시간, 형에게 메신저로 물었다. 형, 어떻게 됐어? 결국 안 하기로 했단다. 지미집이 들어오는데 바닥 보강에 대해 별다른 방법이 없단다. 피해 보상은 가능하지만 대리석 특성상 대공사가 된다. 자칫 배보다 배꼽이 커진다. 연장 사용료도 논의했는데 예약 취소에 따른 매출 손실분에 미치지 못하단다. 돈도 돈이지만 예약한 손님한테 못할 짓이란다. 갑자기 몇 시간 앞두고 오늘 식사 못하시게 됐다, 어떻게 얘기하겠느냐. 결국 미리 예약을 없애고 하루 통째로 촬영에 쓰게 해야 하는데 그것도 내켜 하지 않았다.


어차피 놀리는 시간과 장소, 그거 내주는 대가로 받는 돈이 달콤하게 끌리는 것은 사실이다. 엄혹한 시국, 뜻밖에 해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것을 형은 기꺼이 마다했다. 소탐대실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미리 예약을 취소시키는 것은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촬영 당일 시간이 미뤄진다고 일방적으로 취소를 통보하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예약까지 해가며 식사를 기다리는 손님, 우리 식당의 열렬한 팬, 내 편인 사람들과의 의리를 저버리는 게 훨씬 큰 손해라는 것을 형은 모르지 않았다. “잘했어 형,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형은 키가 무척 크다. 모르는 사이 더 큰 사람이 되었다. 그의 인생 경로부터 범상치 않았지만 역시 남다르다. 아, 아쉬운 기색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요즘 뜬다는 연예인 많이 나오던데, 하루 공치고 구경이나 할까 싶었는데 물 건너갔단다. 대탐소실의 결과다. 어차피, 형 그런 사람들 잘 모르잖아. 핀잔으로 위로를 대신한다. 형, 방송국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그래도 형 레스토랑 분위기 좋은 건 인정한다는 거네. 술이며 음식 끝내주는 것도 알아갔어야 했는데. 형은 어찌 됐든 내 조언에 고마웠단다. 고마움은 무슨 새삼스럽게. 조만간 만나서 한 잔 하기로. 그날도 우리는 소탐대실하지 않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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