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늦은 밤, 귀신 나오는 괴담을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딸아이가 애시청자다. 그거 다 보고 자면 너무 늦는데도 말리지 못한다. 혼자 보는 건 한사코 싫어한다. 아이 엄마는 슬쩍 안방 침대로 파고든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남아서 같이 봐준다. 아이는 정작 무서운 장면에선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면서 본방사수를 자처한다. 그거 보고 자면 나도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눈 감아도 까만 허공에 잔영이 남는다. 숙면에 방해가 된다. 아, 내일 회사에서 또 골골대겠네. 그 생활을 한참 반복 중이다. 이것도 부성애라면 부성애인가.
이번 회차 방송은 특히 무서웠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사연 신청자가 실제 겪은 일이란다. 어려서부터 헛것을 자주 본 여성이 있다. 특기(?)를 살려 흉가 체험 동호회에서 활동했다. 회원 모임에 다녀온 뒤부터 섬뜩한 모습의 여인과 거푸 마주쳤다. 어제는 낄낄 웃더니 오늘은 기괴한 몸짓으로 춤을 추고, 다음날은 거꾸로 몸을 세운 채 나타났다. 뒤집힌 얼굴로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게 무섭다며? 으흐흐." 퍼뜩 동호회 모임에서 만난 낯선 여자가 떠올랐다. 그녀가 물었다. 어떤 귀신이 가장 무섭냐고. 사연자가 답했다. “웃고 춤추거나 거꾸로 서있는 귀신은 무조건 피하라던데요.” 다른 회원들에게 그날 모임에서 본 여자에 대해 물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더란다. 과연 며칠 동안 마주친 의문의 여인은 누구인가, 산 사람인가 아닌가.
괴담 하면 국민학교 시절 들었던 얘기가 있다. 말하자면 클래식이다. 무섭다 못해 충격적이어서 며칠을 밤에 화장실도 못 다녀왔다. 만날 빨간 휴지를 줄까, 파란 휴지를 줄까 따위의 줄거리만 듣던 내겐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새 학교로 전근을 간 여교사가 있었다. 어느 학교에나 있는 괴담도 들린다. 첫 당직 근무 차례가 됐다. 야심한 밤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데 마침 근사하게 꾸민 무용실이 있다.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어릴 때부터 익힌 발레 동작을 연습했다. 다음날 아침 동료 교사가 밤새 별일 없었는지 묻는다. 무용실에서 거울 보면서 춤추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답한다. 얘길 듣고는 하얗게 질린 동료 교사가 말한다. “무용실엔 거울이 없어요..!”
젊은 날의 아버지가 무더운 여름밤에 들려준 얘기도 기억난다. 아버지 어릴 적 고향 동네에 무녀가 사는 집이 있었다. 근처에 서낭당도 있어서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어느 밤 친구 녀석들과 담력을 겨루었다. 창백한 달빛에 의지해 겨우 무당 집에 다다랐다. 한데 세상에나. 집 앞에 개울이 있는데 그 야밤에 무복을 입은 무당이 엎드려 멱을 감더란다. 그 광경이 너무나 기이해서 혼비백산 줄행랑을 쳤다. 날이 밝아서 다시 가보니 웬 남루한 색동저고리가 개울가 물풀에 걸려있었다. 유속에 흐느적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사람이 엎드려 고개를 물에 담그고 있는 것처럼 뵈더란다.
음산한 생각이 꼬리를 문다. 계속 뒤척이다 보니 좀처럼 잠이 들지 못한다. 공연히 그런 장면은 봐갖고. 어릴 때는 어른 되면 무서울 게 없을 줄 알았다. 마음도 몸도 커져서 처녀귀신, 몽달귀신, 유령, 흡혈귀 같은 건 코웃음 치게 될 것만 같았다. 막상 어른 돼보니 웬걸. 무서운 건 여전히 무섭다. 안타깝게도 나는 큰 체격의 성인도 아니게 됐다. 그래서일까 마음도 그다지 크게 자라지 못했다. 미지와의 조우는 두렵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초자연적인 존재는 물질세계의 이해가 깊어진 만큼 더 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새벽 한두 시 사이에나 잠이 들었나 보다. 수면 시간이 부족하다. 머릿속이 뿌옇고 몸은 천근만근이다. 도무지 못 일어날 지경이다. 건넌방에서 위잉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요란하다. 나보다 출근이 빠른 아내가 벌써 씻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있다. 나도 일어나야 한다. 늑장 부리면 지각이다. 5분만, 아니 3분만, 아니 1분만.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반쯤 감은 눈으로 욕실 불을 켠다. 반팔, 반바지를 훌렁 벗는다. 샤워기를 튼다. 칫솔을 집어 치약을 바른다. 물줄기를 등으로 맞으며 볼 안 쪽 어금니를 들쑤신다. 치약 거품을 뱉고 입을 헹군다. 샴푸를 짜서 머리를 감는다. 몸도 구석구석 씻는다. 선반에서 수건을 꺼내 닦는다.. 까지 진행하는데 내가 아직도 이불속에 있다! 엥? 내가 뭐 하고 있다고?! 이럴 수가! 일어나서 씻고 있던 게 모두 꿈이었다니.
번쩍 눈이 떠졌다. 아니 무슨 이런 경우가! 일어나서 씻고 있던 게 모두 꿈이었다. 지각하면 안 된다, 일어나서 출근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이 몽중몽이 되었다. 꿈속에서 씻은 딱 그 시간만큼 늦었다. 아오 씨, 제대로 지각이다. 양치질이며 샴푸, 비누칠을 초스피드 약식으로 해치운다. 악몽 중에 악몽, 괴담 중에 괴담이 따로 없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야 말았다. 바로 나에게!
부랴부랴 옷을 입는데 모친이 집에 들어오신다. 개학한 손녀 등교 준비시키러 오시는 거다. 아이도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어제 아빠랑 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봐서 비몽사몽이다. 딸, 일어나! 학교 가야지, 아빠처럼 지각할라! 이게 다 괴담 프로그램 때문이야. 솔직하게 얘기할게. 아빠도 귀신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