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선거 결과

by Hoon

지금쯤 연락이 와야 하는데 잠잠하다. 내가 먼저 모친한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손녀딸 반장선거 어떻게 됐다는 얘기 없었느냐 물었다. “아니, 그런 얘기 없던데.” 아이 기분이며 표정은 어때 보였는지도 물었다. 역시나 별다르지 않았단다. 음, 반장 됐으면 신나서 제가 먼저 할머니한테 얘기했을 텐데. 낙선한 것이 분명하다. 그나마 많이 낙심한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다. 지난해 1학기 반장선거에서 낙마했을 때는 울고불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러다 2학기 재도전 끝에 당선이 됐을 때는 또 어떠했나. 할머니를 보자마자 방방 뛰더란다.

마침 아내에게 톡이 온다.

아내] 반장선거는 안 된 거지? 연락이 없네.

나] 그렇잖아도 내가 방금 모친한테 전화해서 손녀딸 반장선거 얘기 안 했냐고 물어보니까 그런 내색 없었대. 기분은 괜찮아 보였다네.

아내] 그러게 됐으면 할머니한테 바로 얘기했을 텐데. 작년처럼 울고불고 안 하면 됐지 뭐.


퇴근 시간 다 돼서 어머니한테 전화가 다시 왔다. 학원 마치고 돌아온 아이에게 물어봤더니 반장으로 뽑혔단다. 의아해서 왜 아까는 말 안 했냐고 하니 학원 가기 바빠서 별생각 없었단다. 아이와 직접 통화했다. 아이는 당선 사실보다 같은 반 급우들로부터 이른바 몰표를 받은 것이 훨씬 기쁘단다. 축하하고 자세한 얘기는 집에서 하기로.


집에서 해후하여 자세한 경위, 내막을 청취했다. 더욱 놀라운 비하인드 스토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 학교는 두 번의 투표를 통해 학급 회장과 부회장을 선출한다. 1차 투표를 통해 한 명의 회장을 뽑는다. 2차로 투표하여 남녀 다득표 후보를 각각 부회장으로 임명한다. 후보 등록은 대개 타인의 추천, 본인 동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1차 투표에서 같은 반 친구가 딸아이를 추천했다. 한데 다른 후보 추천이 더 이상 없었다. 창졸간에 단일 후보에 대한 찬반 투표가 됐다. 결과가 나왔는데 감기 증상으로 결석한 1명 빼고 전원 찬성표가 나왔다.


이 대목에서 아이에게 물었다. 친구들 모두에게 지지받은 거 일단 축하하고. 그럼 너도 너 찍었단 얘기네? 우리 때는 그런 풍토(?)가 있었다. 반장 출마한 후보는 웬만해선 본인에게 투표하지 않는다. 왜냐면 개표 결과 혹시 딱 1표만 나오면 친구들한테 놀림받을까 봐. 쪽팔릴까 봐서. 얼레리 꼴레리 아무개는 반장 하고 싶다고 지(?)가 지 찍었대요~. 딸아이 대답이 걸작이다. “내가 나는 반장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나가는 건데 내가 나를 안 찍으면 어떡해. 그럴 거면 나가지 말았어야지.” 맞는 말이다. 그러다 한 표만 나와서 놀림받으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그게 왜 창피해? 한 표도 안 나온 게 더 이상하지. 적어도 한 명한테는 표 받아야지. 그게 나든 다른 애든.” MZ세대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얘기가 더 있다. 이어서 부반장 투표가 있었다. 세상에나 부반장 투표에는 남자 넷, 여자 둘 무려 여섯 명이 후보로 나왔단다. 동점자가 나와서 결선 투표까지 이어졌고 그렇게 남녀 부반장을 우여곡절 끝에 선출했다. 처음 아이가 반장으로 뽑힌 얘기만 들었을 때는 아이 반 친구들이 학급 임원 같은 거 관심이 없구나 싶었다. 근데 웬걸, 부반장 투표 상황을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내 마음대로 평론을 달아본다. 아이는 바로 전 학기에도 학급 회장으로 활동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같은 반 친구들로부터 좋은 반응도 얻었던 것 같다. 이번 선거에도 친구가 추천의 이유를 그렇게 들어주었단다. 게다가 어린 시절의 나와는 달리 아이는 요즘 아이들 말로 ‘인싸’다. 무리 안에서 제법 인기를 끈다고 들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친구들이 우르르 아이 자리로 몰려와서 수다를 늘어놓는단다. 원만한 교우 관계의 증표가 될 법하다. 그런 유력 후보가 일찌감치 등록을 마쳤다. 빠른 단념일 수도, 양보일지도 모르지만 더는 후보 추천이 없었다. 자기 추천도 없었다. 중요한 건 구성원 중 얼마나 동의해주느냐다. 아이는 만장일치를 이끌어냈다. 감격적인 일이다. 이어진 부반장 선거에서 여러 명이 후보로 나섰다. 반장은 정해졌고 저 친구라면, 나라면 반장을 도와 부반장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친구가 많았다. 결선투표까지 이어질 만큼 선거는 흥행했다.


아이에게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무언지 물었다. “응, 나는 어떻게 하면 남은 여섯 달 동안 같은 반 친구들이랑 재밌게 지낼까 그것만 생각하거든. 이번에도 선생님한테 허락받아서 한 달에 한 번 특별한 날을 만들 거야. 그날은 각자 가져온 맛있는 간식도 먹고 게임도 할 거야. 학급 회의를 꼭 딱딱하고 재미없게 할 필요는 없잖아.”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보면 마을 사람들을 훌륭하게 통솔하는 촌장 노파에게 북한군 장교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촌장이 말한다. “뭘 좀 멕여이지..” 표현은 다르지만 숨은 뜻은 딸아이와 같은 답 아닐까.


세대의 계승을 통한 발전을 믿는다.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분명히, 뭐가 나아도 낫다. 아이 반 아이들은 불필요한 갈등과 반목 없이 합리적으로, 효율적으로 리더를 선발해냈다. 과정 자체가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정치 참여의 당위에 대해 배우는 더없이 훌륭한 학습의 장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대한민국 정치의 미래가 아이들 덕분에 반짝반짝 빛난다.


다음날 처음 반장으로서 등교한 아이가 일과를 공유했다. 담임선생님이 잠시 교실을 비우시며 반장을 교탁으로 불러내셨다. 자습하는 동안 떠든 사람 이름을 칠판에 적어 놓으라고 주문하셨다. 우쭐한 기분이 들더란다. 그렇지, 그게 권력의 맛이라는 건데 거기에 취하면 안 돼. 어느새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아빠는 말이지, 네가 무서운 경찰관 같은 반장이 아니라 분주한 소방관 같은 반장이 됐으면 좋겠어. 이 말까지 할까 말까 하다 삼켰다. 그러길 잘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대통령 선거다. 아이 반 친구들만큼이나 대한민국의 앞날에도 찬란한 햇살이 드리우길 마음 깊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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