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의 멸종

by Hoon

전 직장 선후배들 몇이 모인 단체 톡방에서 후배가 말한다. “형님들, 사는 게 재미가 없습니다..” 이어서 다른 선배도 말한다. “배부른 소리 하네. 인생을 재미로 사냐. 살아야 하니까 사는 거지..” 두 사람 말이 무척 공허하고 쓸쓸하다. 공감이 간다. 인생 재미로만 사는 게 아니라지만 그것이 너무 없어도 안쓰럽다. 그게 무어든 저마다 사는 재미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돈 버는 재미, 돈 쓰는 재미, 자식 키우는 재미, 반려동물 기르는 재미, 운동하는 재미, 악기 연주하는 재미, 수집하는 재미. 뭐라도 있어야 된다. 그래야 산다.


인생 사는 재미 요소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유머’다. 나이 먹을수록 유머가 가진 힘이 위대함을 절감한다. 유머는 사람과 사람을 폭신하고 보드랍게 이어준다. 첫 대면, 긴장의 순간, 상대가 건넨 가벼운 농담에 나도 모르게 경계를 푼다. 서양 사람들이 괜히 ‘아이스 브레이커’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 우스갯소리도 들었다. 여성들이 절대로 잊지 못하는 옛 연인은 바로 유머러스한 남자라고. 무진장 웃겼던, 날 재밌게 해 주었던 사람만큼은 오래도록 기억한다고. 무슨 말씀, 돈 잘 쓰던 남자가 으뜸이라고 반박하지는 마시라.


심각한 위기의 상황에서 유머는 더욱 빛난다. 일이 틀어졌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 골몰하기만 한다고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는 게 아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웃어넘겨봅시다, 인상 쓰지 말고 웃으면서 해봅시다, 허허. 여유를 가지고 사안을 관조적으로 바라볼 때 뜻밖의 해법이 찾아지는 경우도 많다. 언젠가 신체장애가 있는 코미디언이 그걸 소재로 스탠딩 코미디를 하는 것을 보았다. 객석 반응이 이채롭다.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며, 웃어도 되나 서로 눈치 보다가 끝내 폭소가 터져 나온다. 끝 간 데 없는 유머의 절정판이다. 자신의 결점을 떳떳하게 드러내고 그것이 웃음의 소재로서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 그곳에 유머의 이상향이 있다.


심각하다 못해 인류 멸망의 순간에도 삐져나오는 유머가 있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흔히 등장한다. 나는 슈퍼 히어로 영화 팬이다. 나이 값 못한 대도 어쩔 수 없다. 특히 마블 히어로 영화를 좋아한다. 아이언맨은 적들의 포화로 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쉴 새 없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늘어놓는다. 그치 친구들이 다 그렇다. 캡틴 아메리카, 토르, 헐크 할 것 없이 유머의 귀재들이다. 저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 극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 같아 거슬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생각을 바꾼다. 그렇지, 저게 위기에 대처하는 진정한 영웅의 자세지. 슈퍼 히어로가 악당들 앞에서 잔뜩 겁먹고 긴장해봐. 시민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어. 응, 별 일 아냐, 괜찮아, 날 봐, 자 웃어, 그래 그렇지.


점점 더 잘 웃지 않는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잔뜩 굳었다. 주름살이 문제가 아니다. 노화의 발현은 그러려니 한다. 안면 근육 뒤에 숨은 웃음의 흔적이 도무지 찾아지지 않는다. 거울 앞에 서서 억지로 웃어본다. 어색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이게 다 유머의 멸종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취직해서 돈 벌기 시작한 때가 시작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회사에서 거의 웃을 일이 없다. 어떻게 해야 허술한 사람으로 비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일 잘하고 명석한 사람으로 보일까만 신경 쓰다 보니 이렇게 된 건 아닐는지. 말하자면 잔뜩 가드를 올린 복서다.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펀치에 대비하는 선수에게 웃음은 상상 밖의 것이다. 사는 게 재미가 없다, 곧 웃을 일이 없다는 후배의 말에 공감한 이유다.


과거의 나는 나름대로 재미난 후배이자 동기, 선배, 친구였다. 꽤 유머러스했다고 자부한다. 나의 유머관(觀)은 ‘일발 필살’이었다. 농담을 남발하지 않았다. 확률에 기대어서 시도 때도 없이 시도하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가벼운 잽이 난무할 때 묵직한 한 방을 준비한다. 농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때로는 심드렁한 태도를 유지한다. 먹잇감을 향한 단 한 번 도약을 위해 맹수는 몇 시간이고 풀섶에 웅크린다. 방심한 틈 사이 폐부를 찌르는 임팩트 있는 유머를 구사하려고 노력했다. 가볍지 않으면서 초지일관 진지하지 만도 않은 친구, 선후배였다. 덕분에 밥자리, 술자리가 생기면 오라고 부르고, 따르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지난 주말 성당에 다녀온 모친께서 강론 중에 신부님이 농담을 하셨단다. 아직 코로나 걸리지 않은 분들은 본인의 대인 관계를 돌아보세요. 이제껏 감염되지 않으면 친구가 없다는 방증이란 뜻이다. 내가 그렇다. 다행인지 요행인지 나는 아직 확진자가 되어서 자가 격리한 일이 없다. 집으로 격리되지 않았지만 부지불식 간 사람 사이 관계로부터 격리됐기 때문은 아닐까. 이게 다 유머의 멸종 때문이다. 영 재미없는 사람이 돼버리니 주변에 찾는 이들도 없어진 탓이다.


유머를 회복하겠다. 전에는 하지 않던 방법도 궁리한다. 시도의 빈도 자체를 늘리겠다. 어쩌다 강 펀치가 아니어도 좋다. 일상 속에서 가벼운 농담을 의식적으로라도 구사하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재 개그’는 끝까지 경계하련다. 맥 빠지는 말장난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엊그제 사고 친 후배 팀원에게도 살풍경한 분위기로 일관하지 않으련다. 그래 ㅅㅂ 우리가 회사를 팔아먹었냐, 나라를 팔아먹었냐. 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무거운 기분을 집까지 가져가지도 않을 것이다. 부인, 나 요새 회사생활 쫄깃쫄깃 스펙터클 하다오. 이러니 내가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기막힌 선거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