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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표 특제 떡볶이 만드는 방법

by Hoon

일요일 점심이 늦었다. 딸아이가 거실 소파에서 핸드폰을 보며 뒹군다. 배고프다고 성화다. 아내는 티브이 영화 정보 프로그램을 보는 중이다. 아내가 아이에게 뭐 먹고 싶냐 묻는다. 간장계란밥은 아침에 먹었고 김치찌개는 싫단다. 라면이 먹고 싶다는데 아이 엄마가 단칼에 불허한다. 스파게티 먹을래? 그것도 별로.. “아, 그럼 뭐 먹을 건데! 엄만 몰라, 네가 알아서 먹어!”까지 듣다가 내가 나선다. “아빠가 떡볶이 만들어줘?”


마침 냉장고에 재료가 다 있다. 냉동실을 열어 떡국 떡을 꺼낸다. 떡볶이 떡이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납작한 떡국 떡도 나쁘지 않다. 숟가락으로 떠서 한입에 먹기에도 편하다. 소스가 같이 떠져서 더 맛있다. 캠핑 가서 먹고 남은 꼬치 어묵도 있다. 채소는 대파만 있으면 된다. 양파는 넣지 않는다. 양파는 익히면 금세 물러져서 국물을 흐린다. 양념도 별거 없다. 고춧가루, 고추장, 간장, 설탕, 조미료 집에 없으려야 없을 수 없는 것들이다.


양념장부터 만든다. 양념 혼합의 황금 비율을 공개한다. ‘미장루간설’, 다섯 음절을 반드시 기억하시라. 조미료,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 설탕에서 한 음절씩 조합했다. 앞 글자에서 다음 글자로 넘어갈 때마다 한 숟가락씩 늘어난다. 나는 찻숟가락을 이용한다. 2인분을 기준으로 흰색 조미료 한 숟가락이면 고추장 둘, 고춧가루 셋, 간장 넷, 설탕 다섯 번을 뜬다. 이렇게 잘 섞으면 딱 어린 시절 문방구 떡볶이 맛이다. 한데 아이 먹일 거니까 조금 더 사치를 부린다. 설탕 대신 올리고당, 간장을 줄이면서 굴소스, 매실청까지 섞어서 완성한다.


떡부터 하나하나 떼어내서 물에 담가 둔다. 꼬치어묵에서 꼬치를 빼낸다. 꼬치 어묵 한 장이면 충분하다. 꼬치 어묵을 펼쳐서 안 씹은 껌만 한 크기로 썬다. 삼각형으로 썰기도 하던데 내 방법은 아니다. 어릴 때 녹색 얼룩무늬 플라스틱 접시에 비닐봉지 씌워서 팔던 떡볶이에는 삼각 어묵이 없었다. 대파도 어묵과 비슷한 크기로 어슷썰기 한다. 떡, 어묵, 대파, 재료 끝이다. 이보다 간단할 수가.


전골냄비에 떡을 펼치고 물을 자박하게 담는다. 양념장을 싹싹 긁어 넣는다. 어묵과 대파도 흩뿌린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켠다. 끓기 시작하면 나무주걱으로 젓는다. 떡볶이 떡은 냄비 바닥에 쉬 달라붙는다. 자칫하면 눌어서 타기 십상이다. 그렇게 떡볶이 냄비를 휘휘 젓노라면 어릴 적 분식집 주인아주머니의 능숙한 몸짓이 눈에 선하다. 국물이 졸아들면서 점성이 생긴다. 접시에 소담스럽게 담아낸다. 통깨로 마지막 장식을 더하려다 멈칫한다. 옛날 떡볶이엔 그런 거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맛이 어떠냐고 물어본다. 대답은 않고 열심히 저작 운동을 하며 엄지를 치켜올린다. 생각 없다던 아내도 은근슬쩍 포크를 손에 쥔다. 한입 맛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젓가락을 가져와서 떡 하나, 어묵과 대파 한 조각씩을 포개어 집는다. 음, 옛날 떡볶이 딱 그 맛이네!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하고 기본에 충실한 맛! 억지로 꾸미지 않고 단정한 맛! 순수했던 어린 시절, 어린이들 입맛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필연의 소산인 맛!


어디 떡볶이만 그러한가. 세상 만물 중에 난 그런 것들이 무척 좋다. 대단한 장식이 없이도 기초가 충실해서 그것 자체로 만족을 제공하는 것. 음식으로 치면 값비싼 식재료 없이 아무 집 냉장고에나 있는 것들로도 이끌어낼 수 있는 맛. 거창한 장식은 없지만 만듦새가 훌륭해서 유행 안 타고 오래 쓸 수 있는 물건. 사람도 마찬가지, 가식적이지 않고 솔직해서 격의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이들을 좋아하고 아낀다. 그런 사람들은 무엇이든 사안의 본질을 꿰뚫어서 군더더기 없이 효과적, 효율적으로 소통한다.


요리사가 최고로 행복한 순간은 깨끗하게 비워낸 빈 접시를 볼 때라던가. 제법 든든한 한 끼가 됐을 터. 아이가 이다음에 크면, 이따금 맛보던 아빠표 떡볶이를 떠올리겠지. 어린 시절 우리 세 식구의 한가롭고 단란한 휴일 오후, 그때의 평화로움도 함께 기억하겠지. 그때쯤이면 우리 딸도 애써 꾸미지 않아도 기본에 충실해서 꼭 필요한 곳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어엿한 어른으로 자라 있기를. 아빠표 떡볶이처럼.



*사족) 사진은 통통한 쌀떡으로 만들었을 때 찍어둔 거네요. 어떤 떡으로 하든 모두 맛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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