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컴퓨터에는 문서 작업용 소프트웨어가 없다. 컴퓨터를 구매할 때 선택사항이었는데 추가 비용이 아까웠다. 집에서 문서 작업할 일이 뭐 있겠어, 고민되지 않았다. 그러다 코로나 세상이 왔다. 나와 달리 아내는 재택근무가 잦았다. 문제 될 건 없었다. 아내는 회사에서 지급한 노트북 PC를 집으로 가져왔다. 그러다 감염병 확산세가 잦아들고 아내의 재택근무도 끝났다. 우리 집엔 문서 작업에 쓰지 못하는 컴퓨터만 남았다.
퇴근한 아내가 멍텅구리 컴퓨터 앞에 앉아 끙끙댄다. 뭐해?, 심드렁하니 물었다. “파워포인트 설치하려고 하는데 컴퓨터가 자꾸 재부팅돼. 아, 이거 왜 이러냐.” 이유인즉 초등 6학년 딸아이가 학교에서 숙제거리를 받아왔는데 내일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한단다. 마침 아내가 가방에 넣어 다니는 메모리 카드에 문서 프로그램 임시 설치용 파일이 있었다. 그걸 설치 중인데 순조롭지 않다. 문과 전공자 남편은 이럴 때 아무 쓸모가 없다. 조용히 파이팅을 외칠뿐이다. “아, 오늘 잠은 다 잤네. 애 숙제 때문에 이게 웬 고생이야.” 아내 말을 애써 못 들은 척한다.
엄마는 강하다. 소프트웨어 설치에 성공했다. 이것으로 미션 클리어면 좋았겠지만 아직 시작도 못한 거다. 아내가 아이를 컴퓨터 모니터 옆으로 이끈다. 얼마나 대단한 과제인지 어깨너머로 훔친다. 담임선생님이 서너 명씩 조를 지어줬다. 각 조마다 생활 주변에 환경오염 사례를 들어 원인을 살펴보고 환경보호를 위한 실천방안을 마련해 오라는 주문이다. 훌륭한 주제다. ‘국영수’보다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있어 몇 곱절은 중요한 가르침이다.
“데드라인이 언제래?” 아내한테 물었다. “내일 까지래.” 짜증 섞인 답이 돌아온다. “선생님이 내일 꼭 컴퓨터로 발표하래?” 아이한테 물었다. “응, 피피티로 해오랬어.” 원망 섞인 답이 돌아온다. 요즘 초등학교 고학년들은 다 그런 거 할 줄 아나? 우리 딸만 할 줄 몰라서 엄마가 이 고생인 건가. “네 친구들도 피피티 만들 줄 알아?” 아이한테 재차 물었다. “몰라. 우리 반 친구들 중에 평소에 나 이런 거 잘한다고 하는 애는 없었어.”
맞벌이 사무직 엄마가 발표 자료는 만들어준다고 치고, 초안은 준비됐는지 본다. 아이 공책에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찌어찌 간추린 내용이 있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구조와 골격을 갖춘 프레젠테이션 용도로 만들려면 분자 단위로 해체해서 다시 조립해야 한다. 아내가 한숨과 짜증을 교차로 뱉는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 아래 맨 오른쪽 끝 시계가 ‘오후 11:00’를 알린다. 아이 숙제에 부모가, 정확히는 애 엄마가 무슨 생고생인가.
선생님의 교육 의도를 유추해 본다. 환경보호 좋지, 조별 활동 좋아, 발표 수업도 아주 좋지. 다 좋다. 여기까지 훌륭하다. 그런데 왜 꼭 파워포인트? 딸아이 얘기와 달리 요즘 다른 애들은 문서 작업 같은 것 일도 아닌가? 우리 애만 할 줄 모르는 건가. 아니면 어차피 너희들 중 상당수는 나중에 커서 이런 거 해서 먹고 살 테니 선행학습 같은 건가. 게다가 마감이 내일? 이것도 어떤 일이든 납기 완수가 중요하니 그것도 배우라는 건가? 스승의 큰 뜻을 알 리 없는 일개 학부모는 고개만 갸웃한다.
아무리 훌륭한 취지가 숨었더라도 이번 숙제는 지나치다. 일단 데드라인이 너무 촉박하다.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거대담론을 다루는 데 하루 한 나절은 터무니없다. 친구들끼리 충분히 의견을 교환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시간을 보장해줬어야 옳다. 그럴듯한 결론이 얻어지지 않았대도 문제가 아니다. 서로 생각을 나누는 과정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교육의 장이 된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반드시 쓰게 한 것도 아쉽다. 짐작컨대 반 친구들 중에 문서 작업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루는 아이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본다. 결국 부모님 찬스를 써야 한단 뜻이다. 한데 그것도 공평하지 않다. 어떤 조 아이들의 엄마 아빠는 컴퓨터로 일하지 않아서 그런 일이 영 녹록잖은 집도 있을 수 있다. 하필 집 컴퓨터에 문서 프로그램이 없는 아이도 있을 수 있다. 애초에 우리 집이 그랬다. 심지어는 컴퓨터가 아예 없는 아이도 짐작 가능하다. 코로나 시국, 비대면 수업의 활성화로 그런 아이가 드무니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어떤 아이는 “얘들아, 우리 집엔 컴퓨터 없어..” 아쉬운 사정을 친구들에게 털어놔야 했을지도 모른다. 남들에게 지극히 기본인 조건이 누군가에겐 어쩔 수 없는 결핍의 대상인 삶이 우리 주변엔 얼마든지 있다. 이러나저러나 아이 과제를 부모가 나서서 해결해줘야 하는 조건 자체가 잘못이다. 완성도가 좋든 아니든 스스로의 힘으로 완성해야지 어른이 대신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대로라면 내일 아이 반 수업에는 각 조 엄마 아빠들이 일터에서 익힌 고색창연한 프레젠테이션이 말 그대로 난무할 것이다.
유력 정치인 자녀들의 엄마 아빠 찬스로 세간이 들끓는다. 나라일 하겠다는 사람들이 비겁하고 치사하게 그게 무슨 짓이냐는 비난이 크다. 그러한 심리 저변에는 누구는 자식 위해서 해주고 싶지 않아서 안 하나, 하는 자괴도 섞였을 것이다. 잘했다고 추켜세울 순 없지만 그런 능력과 위치를 가졌다면 나였어도 그렇게 했을 것 같다는 목소리도 있다. 다만 학교가 앞장서서 부모님 찬스를 종용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중고생, 대학생 학부모가 되어보지 않아서 모를 수는 있겠다. 어쩔 수 없이 부모가 나서서 자리를 살펴줘야 할 상황이 생길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교복 안 입는 초등학교에서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싶다. 무엇이든 자기 힘으로 깨쳐서 그것 자체로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많기를 바란다. 본격적으로 입시 경쟁에 뛰어든 것도 아닌, 아직 어린이들 아닌가.
담임선생님이 내준 과제에 이런 단서가 붙었다면 참 좋았겠다. “우리 주변에 환경오염 사례를 들어 원인을 찾고 환경보호를 위한 실천방안을 제시하세요. 나누어준 종이에 자유롭게 내용을 작성해서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다음, 다음 주 이 시간까지 선생님께 제출하세요. 단, 절대로 부모님 도움을 받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