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때우면 오후 서너 시쯤 꼭 배가 고프다. 직원들의 건강을 위한 철저한 칼로리 통제. 그것도 배려라면 지극한 것일까. 라면 한 그릇 슬쩍 비우고 올까 싶지만 관두기로. 그것 먹으면 저녁밥이 안 들어간다. 한두 시간 참았다가 퇴근길 아내와 외식? 마침 하루 업무도 슬슬 마무리돼간다. 일단 메신저로 아내에게 저녁 식사 동석을 제안한다.
뭐가 먹고 싶으냔다. 그 왜, 예전에 몇 번 갔던 덴데 회랑 초밥, 튀김, 우동 코스로 나오고 인당 이만 원 남짓이던 데. 그 집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인터넷 찾아봐도 안 나오고. 아내는 정보 검색의 달인이다. 여기? 하고 단번에 정답을 보내온다. 오, 그래 이 집. 아직 안 없어졌네. 용케 감염병 시국을 관통하고도 살아남았다. 누군가 바로 요 며칠 전 다녀온 후기를 남겼다. 음식 사진을 보는데 아는 맛이 침샘에 차오른다.
블로그에 메뉴판 사진도 실렸다. 손가락을 벌려 크기를 키운다. 초밥 정식 코스 3만 원. 가격이 올랐다. 거의 만 원 가까이 오른 셈이다. 무려 50% 인상이다. 숨 쉬는 공기 빼고 다 오르는 요즘이라지만 심하다. 식재료 값 상승에 인건비 상승, 어쩔 수 없는 주인장의 사정을 짐작 못하는바 아니다. 그래도 선뜻 방문을 결심하기 어렵다. 아내와 나, 둘이 가면 밥값만 육만 원에 필경 술도 곁들일 텐데 그러면 칠팔만 원쯤 나올 것이다. 그 돈이면 주말에 딸아이까지 우리 세 식구가 동네 돼지갈비 집에서 먹고 나오며 치르는 값이다. 부인, 얌전히 귀가해서 집 밥 먹읍시다. 아내가 내 깔끔한 포기를 기특해한다.
그게 엊그제 일이다. 퇴근 전에 아내가 메신저를 보내왔다. “오랜만에 광장시장 모둠회랑 녹두빈대떡 먹고 싶네. 난 애 미술학원 픽업하러 갈 테니까 오빠가 퇴근길에 사 오면 어때?” 음, 역시 아는 맛이 당긴다. 굿 아이디어. 회사에서 십분 남짓 걸어가면 광장시장이다. 운동하는 셈 걸어간다. 지갑에 현금이 없다. 일전에 갔을 때 모둠회는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했던 기억이 있다. 녹두빈대떡은 모르겠다. 자동인출기에 들러 현금 몇 만 원을 뽑는다.
광장시장 오랜만이네. 코로나 거리두기가 완화된 데다 봄 날씨까지 화창하다. 말 그대로 북새통이다. 사람이 뿜어내는 활기로 나도 덩달아 신명이 난다. 광장시장 북 2문으로 들어간다. 곧장 들어가면 오랜 단골집 전라도 횟집이 나온다. 횟집이라지만 시장 통로에 늘비한 포장마차 점포 중에 하나다. 그래도 그 일대 비슷한 가게 중엔 가장 고객층이 두터워서 제일 먼저 자리가 찬다. 오늘도 몇 팀인지 구분이 어려운 손님 무리들이 어깨를 맞대고 붙어 앉았다. “이모님, 포장해 가려고요. 3인분 부탁드려요.”
전에는 2인분이면 됐는데 한 사람 몫을 늘려 주문한다. 아이 때문이다. 이제 뭘 먹어도 애가 한 사람 양은 거뜬히 한다. 어릴 때 식당에 가면 엄마 아빠 2인분만 시키고 달려 나오는 국물에 밥만 말아줘도 되었다. 이젠 제대로 따로 시켜줘야 한다. 양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식도락의 질도 달라졌다. 아내는 육고기를 좋아하고 나는 물고기 파다. 엄마 아빠 사이에서 이 분야 저 분야를 섭렵하다 보니 미식가 영재가 되었다. 해산물을 특히 좋아해서 처음에 무난한 연어회로 시작한 것을 지금은 겨울엔 방어, 봄엔 보리숭어 등 제철 회까지 드신다. 입맛이 아주 ‘으른’이다. 며칠 전엔 “아빠, 나 흰 살 생선이 먹고 싶어. 주말 외식 메뉴에 참고해줘.”라고 당당히 요구하기에 이른다. 오늘 광장시장 모둠회 사가면 되겠다.
묵직한 검정 비닐봉지를 받아 든다. 이제 녹두빈대떡을 사러 간다. 걸어 들어온 길을 조금 거슬러 가면 빈대떡 점포가 모여 있다. 모두 같은 메뉴일진대 어느 집 앞엔 손님이 줄을 서고 어떤 집은 부쳐놓은 빈대떡이 불판 위에서 잠을 잔다. 왠지 한가한 저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주제넘은 측은지심이 발동한다. 녹두빈대떡 하나 포장이요. 아주머니가 얼마나 가냐고 묻는다. 전철 타고 갈 거라니까 은박지로 꽁꽁 싸매 주신다. 아마, 근처 다른 가게에서 같이 먹을 건지 살피는 눈치다. 실제로 횟집 테이블에 다른 데서 사온 빈대떡이며 김밥을 올려놓고 같이 먹는 손님이 많다. 광장시장에선 그래도 된다. 이게 시장 인심이다.
검정 비닐봉지 두 덩이를 손에 들고 전철에 오른다. 행여 음식 냄새 풍길까 봉투 입구를 단단히 동여맨다. 퇴근길 시장한 직장인들에게 고역일 수 있다. 오늘 귀갓길은 운이 좋다. 앞에 앉은 승객이 금방 일어섰다. 냉큼 자리에 앉아 무릎 위에 비닐봉지를 올린다. 허벅다리에 빈대떡 온기가 번진다. 아, 회도 뜨뜻해지면 안 되는데. 다른 봉투는 잠시 일어나 객실 선반 위에 올린다. 떨어지거나 이따 두고 내리면 큰 낭패다. 하차의 순간까지 긴장을 놓지 못한다. 그래도 전혀 성가시지 않다. 우리 세 식구 맛있게 나눠 먹을 생각하면 이깟 수고쯤 아무것도 아니다.
뚜뚜뚜뚜 도어록을 풀고 들어간다. 집 안이 컴컴하다. 아내와 아이가 아직 오지 않았다. 씻고 나와서 거실 테이블에 식탁보를 깐다. 봉투 두 개를 풀어 테이블에 차린다. 보름달 같은 녹두빈대떡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돋운다. 모둠회는 참으로 알차게 담았다. 참돔, 광어, 소라, 문어가 소담스럽게 누웠다. 그것들을 들추니 밑에 멍게며 붕장어 뼈째회가 그득하다. ‘오마카세’가 별 건가. 횟집 주인장이 양껏 골고루 담아주면 그게 오마카세지. 다른 날은 보통 연어회가 들었는데 오늘은 대신에 참돔이다. 그것대로 대만족이다. 이렇게 한 상 차리는데 삼만 오천 원이다. 회 삼만 원에 녹두빈대떡 오천 원. 그야말로 착한 가격이다.
가격만 착하냐. 네버! 맛도 끝내준다. 각종 회가 숙성이 될 대로 되어서 감칠맛이 입 안에서 터진다. 우리 식구들은 갓 잡은 활어보다 이렇게 미리 횟감으로 숙성해놓은 선어회를 좋아한다. ‘주방장 마음대로’라는 뜻의 오마카세 요리를 내어주는 정통 일식 요릿집에서도 선어회를 주로 취급한다. 오늘 전라도 횟집 주인장이 담아준 회도 여느 요릿집 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참돔이며 광어 숙성도가 알맞아서 입에서 부드럽게 씹힌다. 질겅질겅 남는 것이 없이 말끔하게 넘어간다. 흰 살 생선 먹고 싶다던 딸아이가 아주 맛있어한다. 삶은 소라는 흡사 전복 같은 맛이 난다. 문어숙회도 딱 알맞게 삶았다. 질기지 않고 부드럽다. 멍게는 좋아하는 아내 몫으로 넘긴다. 붕장어, 아니 일본말이라지만 ‘아나고’라고 불러야 맛이 난다. 그건 내 몫이다. 얇게 썰어서 물기를 쫙 짜낸 뼈째회가 씹을수록 고소하다. 같이 싸준 상추에 이것저것 올리고 마늘에 초고추장 듬뿍 찍어서 한 쌈 먹는다. 초고추장도 특별한 비법이 숨은 게 분명하다. 자극적이지 않고 달큼하니 생선살과 조화롭다. 녹두빈대떡도 빼놓을 수 없다. 두툼한 한쪽을 젓가락으로 떼어서 양파 간장에 살짝 찍는다. ‘겉바속촉’의 대향연. 고소하고 든든한 풍미가 해산물의 차고 허함을 알맞게 보충해준다.
술은 ‘소맥’이다. 광장시장 모둠회와 녹두빈대떡 조합에는 묘하게 소주 맥주 폭탄주가 잘 어울린다. 굳이 그럴까 싶지만 논리적 사고를 가동한다. 회는 보통 소주와 맞춤하다. 빈대떡이나 전은 기름진 맛 때문에 톡 쏘는 맥주를 부른다. 오늘 메뉴는 그 둘을 아우른다. 그러니 소주와 맥주를 한 번에 털어 마시는 소맥이 딱 떨어지게 맞는다. 맥주 컵 두 잔을 나란히 붙여 바닥에 소주를 자박하게 따른다. 그 위로 잔 어깨쯤 있는 상표 높이까지 맥주를 거품이 적당히 일게 채운다. 능숙한 손목 회전으로 회오리 물살을 일으켜 아내에게 바친다. 짠, 캬! 이 맛이지!
오 부인, 오늘 메뉴 선정 굿! 아내가 답한다. “엊그제 오빠가 회랑 초밥 먹고 싶어 했는데 안 갔잖아. 아쉬운 대로 광장시장 음식 사다 먹으면 어떨까 싶었지. 애도 잘 먹고 그러길 잘했네.” 잘했다.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마누라지.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랫말이 퍼뜩 떠오른다. 초고물가의 시대, 혹시 퇴근길 동선 안에 있으시다면 광장시장 모둠회와 녹두빈대떡, 소맥 폭탄주의 조화를 단란한 가정에서 반드시 누려 보시라.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