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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Dec 14. 2021

물소리 멈추지 않는 양변기 고치는 방법

  안방 욕실 양변기가 이상하다. 물 내리고 문 닫고 나왔다. 불 끄고 자려고 눕는다. 수십 분쯤 지났을까. 고요해야 할 욕실 안쪽에서 ‘쉬’ 물 새는 소리가 들린다. 백색소음에 가까워서 하마터면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다. 그랬으면 이번 달 수도요금이 얼마라도 불었을 것이다. 문을 열어보니 변기가 계속 물을 채우고 있다. 허허, 이거 고장 났네. 유전자에 새긴 모태 문과생이 최대한 이과적 두뇌를 가동해 본다. 달밤에 체조보다 백배는 성가신 ‘야밤에 변기 수리’다. 유난스러운 성격 탓에 이대로는 그냥 못 잔다. 최소한 고장 부위나 원인이라도 진단이 돼야 잠들 수 있다.     


  양변기 전문가는 아니지만 사십 년 넘게 그것을 사용 중이다. 대강의 작동 원리는 체감적으로 안다. 연식이 좀 된 변기에서 그런 경우가 있다. 레버를 눌렀다 올라올 때 수조 밸브가 잘못 닫힌다. 고무 패킹이 물길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한다. 그곳으로 계속 물이 흐른다. 그런 증상인가 싶어서 변기 수조 뚜껑을 열었다. 시험 삼아 깨끗한 물을 몇 번 흘려보낸다. 한참을 기다려도 물이 멈추지 않는다. 변기로 통하는 수도관을 잠가 물이 보충되는 걸 막는다. 빈 수조 안 부속을 여기저기 들춰 본다. 잘은 모르지만 밸브 결속도 괜찮고 고무 패킹도 문제없는 것 같다. 부표처럼 생겨서 수위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물 보충을 차단하는 장치도 있다. 거기가 고장인가 싶어 만져봤는데 잘 모르겠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할 수 없었다. 대조군이 없으니 실험군도 무용지물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욕실 변기를 붙들고 씨름 중인 남편을 본 아내가 “왓 아 유 두잉?” 한다. 변기 고장 났네. 혹시 간단한 건가 싶어서 봤는데 모르겠어. 사람 불러야 돼 이거. 옛날 <개그콘서트> ‘비상대책위원회’ 코너에서 개그맨 김원효 씨가 “안 돼~ 이거 사람 불러야 돼~.” 했던 유행어가 십 년 만에 소환된다. 아, 옛날 사람. 옛날 사람이 옛 기억을 또 떠올려 본다. 욕실 인테리어 업체 전화번호가 어디 있더라.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욕실 변기는 교체한 지 2년도 채 안 된 거다. 업체 사장과 통화되면 아쉬운 소리라도 해야 하나. 사장님, 얼마 쓰지도 않은 물건이 벌써 고장이라뇨. 돈 드는 거야 어쩔 수 없는데 조금 깎아주세요. 전화하고 시간 약속 잡고 기다리고 사람 맞이하고 계산 치르고. 귀찮은 미션이 하나 생겼다. 내일 걱정은 내일모레. 가수 싸이 씨의 히트곡 「챔피언」의 노래 가사를 상기한다. 늦었다, 잡시다. 옛날 사람.


  출근 준비하면 맞벌이 아내는 거실에 있는, 나는 안방에 딸린 욕실을 쓴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거실 욕실이 이미 사용 중이다. 어쩔 수 없이 안방 욕실 변기를 쓰기로 한다. 수도관 밸브를 다시 열어 물을 채운다. 급한 대로 이렇게라도 쓴다. 변기 레버를 누르고 조금 기다리니 물소리가 멈춘다. 어? 이거 왜 괜찮지? 물을 다시 내린다. 이번에도 ‘쉬’하다가 ‘쉬욱’ 소리로 바뀌면서 물소리가 없어진다. 다시 되네 이거? 몇 번 더 레버를 눌렀다. 역시나 문제없다. 정상 작동한다. 간밤에 도깨비가 장난이라도 한 건가. 도통 모를 일이네 이거. 없는 기술로 요리조리 한참을 만져 봐도 안 되더니 하룻밤 자고 나니까 된다고? 수리비에 출장비 굳었으니 아무튼 땡큐. 기쁜 소식을 아내에게도 알렸다.     


  이과생 중에 으뜸 이과생,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그럴 때 당혹스러워 한다고 들었다. 코딩 작업을 거쳐 시험 작동하면 오류를 일으킬 때보다 그 오류가 이유 없이 사라졌을 때. 오류가 생기는 건 어찌 보면 병가지상사다. 한 번에 정상 작동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낙담할 필요는 없다. 하나하나 원인을 따져 잘못을 바로잡으면 된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게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업그레이드 버전이 나온다. 진짜로 황당하고 난감한 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말끔히 고쳐지는 거다. 아니, 이게 왜? 내가 뭘 했다고 다시 된대? 정답뿐 아니라 풀이 과정도 타당해야 하는, 인과에 대한 확실한 증명을 요구하는 이과적 사고에서 이 같은 자연 치유는 용납할 수 없다.     


  컴퓨터 전문가가 아니어도 우리는 살면서 이런 일을 왕왕 겪는다. 몸이 찌뿌듯하니 몸살인가 싶은데 어느 결에 정상 컨디션을 찾는다. 치통이 느껴지기에 무시무시한 치과에 조만간 가야 하는 운명인가 했더니 며칠 지나니까 또 괜찮다. 물이 들어갔는지 어떻게 해도 먹통이던 휴대전화기가 한참 있으니 다시 켜진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심상찮아서 돈 들어갈 일 또 생기겠구나 싶었는데 주말 지나니까 괜찮다. 프로그램 개발자처럼 당혹스러운 것까진 아니어도 의아하긴 하다. 아, 그럴 땐 좀 배 아프다. 아니 저 뭣도 모르는 녀석이 갑자기 저렇게 잘 된다고? 자기도 비결을 모르는데? 여기서 또 우리는 배운다. 삶은 어차피 공평하지 않다.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난다. 초자연 현상이 아니다. 현실 세계의 물리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굴뚝 밑 잿더미 속에 불씨가 남았다. 온도와 습도 조건만 맞으면 미처 타지 못한 땔감에 다시 불이 붙는다.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뿐이다. 물 새던 양변기도 마찬가지다. 왜 저절로 고쳐졌는지 꼬집어 알 수 없지만 밤사이 어떤 변화가 생겨도 생긴 거다. 피로가 누적되어 틈새가 벌어진 여러 부품들이 수도관을 잠그고 휴식하는 사이 본래의 모양과 기능을 되찾은 것일는지 모른다. 문과생인 나로선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정 조건의 물리 법칙이 반드시 작용한 결과다. 사람도 그렇다. 갑자기 잘 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다. 걔 예전이랑 다를 바 없던데. 그래도 뭐가 바뀌어도 바뀐 거다. ‘갑자기’가 아니다. 매일매일의 미세한 변화를 스스로도, 주변 타인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그게 더 자연스럽다. 느닷없이 변하면 어색하고 이상하다. 의식하지 못한 내적 성장이 더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자연적 회복, 성공의 이유를 가늠하지 못해도 좋다. 겸손의 자세를 가지고 다행이다, 감사하다 여기면 된다.     


  이따 밤에도 욕실 변기가 괜찮아야 할 텐데. 일시적 회복이 아니길 빈다. 이제부터는 겸손과 감사의 자세로 용변을 본다. 아무렇게나 별생각 없이 레버를 누르지 않겠다. 눌렀다 올라오는 사이 수조 내부의 온갖 부속이 제 역할을 다 하는지 세심하게 살필 요량이다. 놓지 않고 관심을 가지면 사람도 물건도 엇나가지 않는다. 아싸, 돈 몇 만 원 굳었다. 오늘 저녁은 치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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