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회사 인사팀장을 만났다. 1층에서 탑승하고 오르는데 중간에 문이 열린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작은 목소리로 목례를 나눈다. 옆구리에 서류 결재판을 들었다. 경영진 고위층 방이 있는 높은 층 버튼을 누른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뭐 또 중요한 보고 하러 올라가는구나. 낯빛이 무채색에 가깝다. 어깨는 흘러내릴 듯 꺼졌다.
인사팀장은 재작년 말까지 같은 본부 동료였다. 나처럼 피디가 아니라 미디어 경영 직군이다. 남다른 성실성, 업무의 완성도를 인정받아 방송 지원부서 팀원에서 경영의 핵심, 인사팀장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팀장님이라고 부를 게요.” 인사말을 받으며 애써 희색을 감추던 그를 기억한다.
그때와 완전히 다른 표정의 그와 엘리베이터에서 조우했다 헤어졌다. 오전 내동 잔상이 되어서 이윽고 메신저를 보냈다. “팀장님, 오전에 뵀던 Hoon입니다. 금명간 오랜만에 점심 한 끼 나누시죠. 언제가 편하세요?” 일정을 살펴 날짜를 정했다. 내가 청한 것이니 내 쪽에서 모시는 것이 인지상정. 스마트폰 달력에 스케줄을 입력한다. 모월 모일 점심, 인사팀장과 식사.
약속의 날이 밝는다. 한참 만에 나눠 먹는 한 끼, 아무거나 말고 맛난 것으로 하고 싶었다. 조금 걸어가서 기다려야 할 수도 있는데 소문난 맛집이라더라, 여기 어떠시냐 메신저를 보냈다. ‘죄송하지만’으로 운을 떼며 점심시간 직후에 회의가 있어서 되도록 가까운 데였으면 좋겠다는 답신이 온다. ‘에이, 거기 맛있는데..’ 속으로만 생각한다. 알겠습니다, 가까운 데로 가시죠, 응답을 보낸다.
그렇게 무난한 갈비탕을 한 술 뜨며 말을 붙인다. 어떻게 지내셨느냐. “죽겠어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죠 뭐. 요 며칠 전엔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여보, 그렇게 스트레스받으면 회사에 다른 보직 달라고 하면 안 돼?” 힘들 줄은 알았지만 단박에 비명 같은 소회를 들려줄 줄은 몰랐다. 그렇잖아도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뵀을 때 얼굴이 너무 어두우시더라, 말을 보탰다.
“왕관의 무게를 견디셔야지 어쩌겠어요.” 방송사 인사팀장,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왕관은요 무슨, 권한은 없고 책임만 무한대인 걸요.” 공감 백배의 대답이 돌아온다. 이 일이 본인한테 맞는 일인지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는 얘기까지 대화가 나아갔다. 누구보다 적임자시죠, 바로 말을 받는다. 내가 아는 팀장님은 그런 사람이다, 회사원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동료로서 의리도 있는 분이다, 그러면서도 무조건 직원들 요구만 맞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 회사와 경영진의 입장도 대변하시더라. 몇 해 전 회식 자리에서 길게 말씀 나눠본 끝에 간직한 인상이다. 그 해 연말 인사발령은 무척이나 타당하다고 생각했노라 속내를 전했다.
“윗분들 생각은 다르신가 봐요. 바로 그 점 때문에 지적하고 나무라시더라고요. 너는 왜 본분을 잊느냐. 인사부서장이면 사측, 회사의 입장이 최우선이 돼야지 어째서 직원이나 노조를 그렇게까지 고려하려 드느냐 하시는데 고개만 조아렸어요.” 아니다, 팀장님처럼 균형감 있는 분이 인사팀장을 맡는 게 백 번 옳다. 팀장님도 직원 중의 한 사람 아니냐. 회사와 직원 사이에서 결정된 인사 방침이 팀장님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느냐, 결국 중재자로서 역할이 절실하다는 건데 그러려면 양 쪽의 입장을 모두 고려할 줄 아는 사람, 균형감 있는 사람이 그 일을 하는 게 맞지 않느냐. 사측의 일방적 대리인이 돼라? 노사 간에 갈등만 키우는 구시대적 접근 아니냐 애먼 데다 핏대를 세웠다.
회사 생활, 조직 생활을 잘하려면 다분히 ‘소시오패스’적 기질이 있어야 한다, 일단 우리 두 사람은 진작에 글러먹은 것 같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평소 스트레스는 무엇으로 푸시냐 물었다. “특별한 것 있나요. 주말에 아내랑 애들 데리고 볕 좋은 데 나들이 갔다 오는 거죠 뭐.” 그렇지 별 것 있나, 사랑하는 가족과 즐거운 한 때야말로 유일하고 확실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비루한 회사 생활 참고 견디겠느냐 맞장구쳤다. 일전에 그가 너무 스트레스받았을 때에는 부인께서 정 힘들면 그만두라, 우리 둘이 뭐라도 해서 먹고살지 산입에 거미줄 치겠느냐는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단다. 장가도 잘 드시고, 팀장님은 이미 다 가진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자리를 옮겨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커피 못 마시는 나는 과일 주스를 골랐다. 잠깐 앉아서 재미없는 회사 얘기 말고 ‘앤데믹’ 휴가 계획을 막 들으려는데 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예, 예, 알겠습니다, 예. 전화를 끊은 그가 또 ‘죄송하지만’으로 운을 뗀다. 회의 자료 준비를 서둘러야 해서 지금 일어나야 한단다. 그러시죠, 금명간 더 귀한 시간 내주시면 점심 말고 저녁에 소주 한 잔 부딪치자고 청했다. 을지로 노가리도 좋고 익선동 갈매기살도 괜찮고 낙원동 아귀찜도 좋겠고. 그날까지 잠시만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