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겠다. 어디가 분명 간지러운데 암만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는 기분. 목구멍에 뭐가 턱 걸려서 내려가지 않는 갑갑함. 큰 일 보고 깨끗이 닦아내지 못한, 그대로 속옷이며 바지 올려 입은 찝찝한 느낌. 난 그런 상태를 도통 견디지 못한다. 어떤 생각이 뿌연 먼지처럼 일면 빗자루로 훅훅 쓸어 또렷한 실체를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오래된 기억, 사물의 명칭, 단어나 문장 표현 따위에 대개 그렇게 된다. 집착과 강박에 가깝다. 생각해내지 못하면 다른 사고도 거기서 멈춘다. 다른 일을 손에 쥐지 못한다.
식욕과 성욕, 수면욕 말고도 본능에 가까운 욕구가 나는 한 가지 더 있다. 음악 청취에 대한 욕망이 그것이다. 나는 어떨 때 행복하다고 느끼느냐. 좋은 사람들과 분위기 좋은 곳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맛난 음식과 더불어 사람 사는 이야기 나눌 때. 거기에 하나 더. 감성을 충만하게 해주는 음악까지 곁들이면 완벽하다. 치사한 남의 돈 버느라 애쓰는 날들 가운데 이따금 그런 시간 보내는 게 삶의 낙이다. 그런 순간이 조금씩 더 많아졌으면, 늘 바란다.
텔레비전에서 익숙한 옛 노래가 나온다. 히트곡 제조기로 통했던 작곡가 주영훈 씨가 만들고 노래까지 한 「우리 사랑 이대로」. 남녀 혼성 듀엣곡으로 여성 파트는 가수 이혜진 씨가 불렀다. 배우 장동건 씨가 훗날 반려자가 된 고소영 씨와 함께 주연한 영화 <연풍연가>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으로 쓰였다. 유려한 멜로디와 사랑스러운 노랫말이 조화롭다. “먼 훗날 삶이 힘겨울 때 서로 어깨에 기대기로 해요~.”하는 후렴구가 와닿는다. 그래서인지 예전엔 결혼식 축가로도 많이 불렸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가수 서인국, 정은지 씨가 리메이크한 버전도 있다. 난 오리지널을 더 좋아한다.
90년대 후반 감성이 그렇고, 내가 그런 노래 많이 좋아했지. 그중에도 유독 좋아하던 노래가 있었는데 그게 이거였나 싶었다. 영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으로 쓰였고, 혼성 듀엣곡이고, 격정적인 코드 진행과 노랫말이 인상적인. 맞는 것도 같고 아닌 듯도 하고. 맞나 싶은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우리 사랑 이대로」가 조금 더 대중적이었고 내가 찾는 노래는 아는 사람만 아는 ‘마니악’ 한 것이었다.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고 나중에 음악 전문 채널에서 뮤직비디오도 봤던 것 같다. 지상파 방송사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 그런 노래가 따로 있었어. 내가 찾는 건 그거야.
단서가 너무 없다. 제목도 가사도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녹색창에서 찾아볼 검색어조차 마땅치 않다. ‘90년대 말 라디오에서 나오고 나름대로 뮤직 비디오도 있었던 영화 OST로 쓰인 <우리 사랑 이대로>는 아닌 소수 취향의 혼성 듀엣곡’으로 입력해서 떡하니 조회됐으면 참 좋았겠으나 그럴 리 만무하다. 요새는 사진 검색 기능도 있다. 머릿속을 찍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보고 싶었다. ‘90년대 말 히트곡’이라고 썼다가 지운다. 엄밀히 히트곡은 아니었다. 듀엣곡으로 고쳐 입력한다. 검색 결과가 너무 방대하다. 대중가요에 조예가 깊은 블로거들이 정리한 목록도 뒤져본다. 이거다 싶은 가수와 제목이 없다. 그래, 가수도 되게 유명한 사람들은 아니었어. 점점 미제 사건이 돼간다.
기억의 윤곽을 뾰족하게 깎아낸다. 90년대 말을 구체화한다. 군대 가기 전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97년 아니면 98년이다. ‘97년 혼성 듀엣곡’, ‘98년 혼성 듀엣곡’ 번갈아 입력한다. 쿨, 샵, 자자, 업타운, 스페이스 에이, 비쥬 같은 혼성 그룹 노래들만 열거된다. 아냐, 그런 댄스곡이 아니라고. 그룹은 더 아니었다. 그 노래를 위해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진, 이른바 프로젝트 그룹이나 피처링 같은 개념이었다. 이번에는 가수 김동률, 이소은이 부른 노래 「기적」이 조회된다. 이것도 당연히 아니다. 내가 찾는 건 분명 좋은 노래였지만 이 정도로 이름 난 가수가 부른 인기곡이 아니다. 녹색창을 나와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어플에서도 검색을 이어간다. 어플 회사에서 미리 모아놓은 추천 플레이리스트를 뒤진다. ‘노래방에서 많이 부른 듀엣곡’, ‘밀고 당기는 남녀 듀엣곡’, ‘그 시절 감성 듀엣곡’ 등 이런저런 목록을 아무리 뒤져도 꼭꼭 숨어서 머리카락 한 올도 뵈지 않는다.
이쯤 되면 포기하는 게 맞다. 뜨끈해진 휴대전화기일랑 저기 치워버리고 밥이나 차려 먹는 게 낫다. 한데 도무지 포기가 안 된다. 꺼져가는 기억에 억지로 숨을 불어넣는다. 그래 이 노래 듣기도 자주 들었는데 부르기도 즐겨했었어. 어디 밖에서 그랬을 리 없고 노래방에서 불렀을 텐데, 혼성 듀엣곡이면 이성 파트너가 있었단 얘긴데. 누구... 아! 한 학 번 선배 영어교육과 M 누나! 지금은 노회한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인상 좋은 형님과 결혼해서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잘 사는 누나. M 누나와 그 시절 노래방에 가면 필수 코스로 이 노래 같이 불었었지. Hoon아, 너 혹시 이 노래 아니? 어 누나도 이 노래 알아? 이 노래 사람들 잘 모르는데 ㅎㅎ. 누나랑 공강 시간에 영화도 자주 보러 갔었지. 기억의 화질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수사 노선을 급선회한다. 그래, 영화 OST라고 했잖아. 이른 봄은 아니었고 딱 요맘때쯤 초여름 깨였다. 노래가 아니라 영화를 찾아보자. 다시 녹색창으로 돌아와 ‘1997년 개봉 한국영화’를 입력한다. 이번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화면이 나온다. 비트, 접속, 초록물고기, 편지, 넘버3 등 유명 대사와 장면이 어렵지 않게 떠오르는 명작들이 늘비하다. 1997년도 영화사에서 대단한 한 해였구나. 그 구석에 영화 제목 하나가 도드라진다. 「패자부활전」. 패자부활전? 그래 패자부활전!
1997년 3월 개봉. 장동건, 김희선 주연. 사진작가 은혜(김희선)는 오랜 연인이 새로운 상대와 만나는 것을 알게 된다. 결심 끝에 얼마 전까지 그녀의 연인이었던 동물원 수의사 민규(장동건)를 찾아간다. 함께 힘을 합쳐 멋지게 복수하자고 제안한다. 복수심에 찬 은혜로부터 옛 연인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나선 민규, 그 여정 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는 게 영화의 줄거리다. 이 영화의 주요 테마곡으로 쓰인 노래, 그 노래가 틀림없다. 검색창에 곧바로 ‘영화 패자부활전 OST’를 입력한다.
영화 <패자부활전>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가수 김태영과 최원석이 함께 부른 「For you」. 드디어 찾았다! 집념의 소산이다. 그래, 이 노래였어. 동영상 플랫폼에 같은 검색어를 써넣는다. 망설임 없이 재생 버튼 클릭! 아련한 현악기 전주가 흐른다. 그렇지, 이거지! 까맣게 잊고 지냈던 추억 속의 명곡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다. “그대 곁에 이제는 내가 있잖아, 그대 이제 내 품에 안겨요, 힘겹던 날들은 그대와 나를 이어준 인연일 뿐, 그대여 눈물을 닦고~.” 첫 소절부터 예술의 극치다. 후렴구 가사 “그대와 함께 한다면 난 견딜 수 있어, 우린 똑같은 아픔 속에 지난날을 견뎠으니..” 부분은 절절하기까지 하다. 옛 노래는 노랫말부터 품격이 다르다.
「우리 사랑 이대로」와 닮은 듯 다르다. 같은 노래로 착각할 법도 하다. 두 노래 모두 영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으로 쓰였다. 두 영화의 주연 모두 배우 장동건으로 같다. 둘 다 남녀 혼성 듀엣곡. 운명적 사랑을 노래하는 주제도 엇비슷하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한 노래는 지금도 세간에 흐르고, 다른 노래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 사랑 이대로」가 예쁘고 고운 선남선녀의 노래라면 「For you」는 세상 모든 풍파를 겪고 마침내 생존하여 마주한 남녀가 서로의 그늘에서 안식을 염원하는 노래다. 그래서 내 귀에는 후자가 더 격정적이고 북받치게 들린다. 모두 명곡임에 틀림이 없으나 나는 알려지지 않은 이 노래가 더 귀하고 좋다.
노래는 내게 1997년의 여름을 상기시킨다. 무척이나 뜨거웠고 젊고 어린 나는 더 뜨거웠다.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이었고 그래서 어찌할 바 몰랐었다. 성인 남녀의 치명적 사랑 같은 건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제 두 아이의 엄마, 중년 남자의 아내가 된 여 선배와 뭣도 모르고 듀엣을 자처했던 까닭이다. 티끌만 한 이성의 감정 같은 것 없이도 우리는 즐거웠다. 말 그대로 순수의 시절이다.
잊고 지냈던 나만의 명곡이 더 있지 않은지 출퇴근길에 좀 더 찾아볼 요량이다. 여러분도 스트리밍 서비스, 동영상 플랫폼이 추천하는 선곡 말고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새로 완성해보시라. 그런 뜻에서 1997년 여름, 많지 않았지만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채운 숨은 명곡, 김태영과 최원석 가수가 부른 「For you」를 이렇게 한 번 들어보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