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건이 줄거리가 없다고?!

by Hoon

회의 막바지, 상사가 사담을 꺼내온다. “이번에 개봉한 탑건 투, 내가 봤는데 아~무 내용이 없어! 아~~무 생각 없이 머리 비우고 보기에 딱 좋아!! 여러분들은 다 봤나?”


이제부터 드리는 말씀은 상급자의 역린을 차마 그 자리에서 건드릴 수 없었던 어느 심약한 노동자의 뒤늦은 고해다. 나의 상관 말고도 주변에 비슷한 반응이 더러 있었다. 그것에 대해 늦었지만 나름대로의 반박이다. 어렵게 입을 뗀, 무지를 향한 일갈이다. 지금쯤이면 볼 분들은 다 보셨겠지. 스포일러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할 말은 꼭 해야 하겠기에.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다. 기실 대단한 유출이랄 것도 없다.


그러면서 이런 감상평도 덧붙인다. 마치 놀이공원 롤러코스터 타듯 아무 생각 없이 즐기면 된다고. 일견 동의한다. 탑건 속편은 청룡열차, 독수리 요새, 프렌치 레볼루션, 티익스프레스 같은 영화가 맞다. 낮은 곳에서 천천히 출발해 털털털털 경사 길을 오른다.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하는 시점부터 자유 낙하하며 속도를 높인다. 오르락내리락 사정없이 흔들더니 공중에서 사람을 마구잡이로 돌린다. 끝났구나 싶을 때쯤 낙차를 주어서 다시 속력을 붙인다. 코스를 마치고 승강장으로 돌아오며 머리는 산발에 얼빠진 탑승객들의 표정. 그걸 영화관 빠져나가는 관객에게서 본다.


그런데 그게 승객 입장에서 그런 것이지 만드는 사람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고도의 수학, 공학적 계산의 결과다. 높은 데에다 열차 올려서 툭 떨어뜨린다고 저절로 달리지 않는다. 위치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 정밀한 수학적 연산을 거듭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코스 어느 쯤에서 열차가 멈춘다. 코스 완주가 목표여도 곤란하다. 급커브에 수직 낙하, 나선 운동이며 공중제비까지 다양한 구간을 배치해야 재미와 스릴을 끝까지 올릴 수 있다. <탑건 매버릭>은 쾌속 질주, 아니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잘 만들어진 어트랙션이다.


탑건이 왜 잘 만든 롤러코스터냐. 줄거리 자체가 기승전결의 구조를 충실히 따른다. 교복 입고 학교 다니던 시절 배웠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5단 플롯에 꼭 들어맞는다. 그래서 긴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와서도 ‘내가 뭘 본거지?’ 하는 뒷맛이 남지 않는다. 줄거리의 하이라이트, 위기와 절정의 변주도 훌륭하다. 그냥 높게 올렸다가 단번에 떨어뜨려서 끝이 아니다. 점층적, 복합적 구조로 관객을 뒤흔든다. 작은 시련을 극복하면 곧 더 큰 위기에 직면한다. 겨우 비행기술을 연마하니까 적 활동의 증가로 작전 준비가 촉박해진다. 팀워크의 균열을 봉합했더니 주인공 매버릭과 고인이 된 옛 단짝 친구의 아들 루스터, 두 사람의 감정 대립이 마침내 폭발한다. 임파서블 미션을 클리어하는 순간 주요 인물의 전투기가 격추된다. 결국 죽은 건가 싶으면 다시 꿈틀거린다. 무사 귀환만 남았다 싶은 때에 다시 적기가 따라붙는다.


개연성 있는 전개가 무엇보다 훌륭하다. 다음 시퀀스로 이어지는 흐름이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다. 말이 되고 납득이 간다. 극 용어 가운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것이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연극에서 자주 쓰였단다. 걷잡을 수 없이 벌여 놓은 이야기를 수습하기 위해 갑자기 절대자가 등장하는 장면을 말한다. 일거에 상황을 정리해서 다음 국면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한데 뒤집어 생각하면 그것이 없이는 줄거리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억지로 이어 붙이는 반칙 같은 장치다. 탑건 후편엔 그런 ‘치트 키’가 없다. 주인공 매버릭이 왜 전설적인 항공 학교로 돌아오게 됐는지, 거기서 옛 동료의 아들과 왜 다시 만나게 됐는지, 두 사람 감정의 앙금은 어디서 시작됐는지, 비행 작전엔 어떻게 함께 하게 되는지가 모두 말이 되게 서로 붙는다.


말이 되는 사연의 압권은 매버릭의 새 연인, 패니 벤자민의 등장이다. 주지하다시피 전편의 히로인은 금발의 미녀 ‘찰리’다. 후문으로 듣자니 현실의 그녀인 배우 켈리 맥길리스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속편 출연이 곤란한 상태였다. 매버릭의 뮤즈 없는 탑건 후속편은 수컷 냄새 진동하는 ‘우정의 무대’와 다름없다. 그럴 것 같으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보지. 그것은 완벽한 오락물, 탑건의 길이 아니다. 이때 제작진은 전편에서 대사로만 등장했던 그 이름 ‘패니 벤자민’을 떠올린다. 매버릭이 잠시 썸만 타다 헤어진 그녀, 제독의 딸. 1986년도 1편에서 그녀에게 구체적인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는가. 그 요긴한 이름의 존재는 삼십육 년 후 신의 한 수가 된다.


말 되는 줄거리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마스터피스로 만들었다. 가장 정성스러운 부분은 오리지널 1편에 대한 오마주와 이스터 에그다. 감상평을 늘어놓던 상사가 내게 물었다. “Hoon 팀장은 어떤 부분이 좋았어?” 묻기에 답했다. 난 오프닝 시퀀스부터 뭉클했다고. 그 왜 항공모함 갑판 위에서 기술 요원들이 온갖 수신호로 전투기 출격시키는 장면 있지 않느냐고. 거기에 쓰인 배경음악이 ‘탑건 앤섬’이라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인데, 그 음악이 댕댕 울리는 종소리로 시작한다고. 다른 항공기가 나오는 걸로 봐서 재촬영한 게 분명한데 전편과 똑 닮은 앵글에 시작부터 폭풍 감동이었다고. 답하지 않았지만 잠깐 스치는 장면도 있다. 1편과 2편 모두 파일럿 무리들이 해변에서 운동을 즐긴다. 전편에선 비치발리볼을 하며 레이벤 선글라스를 손가락으로 치켜올렸던 톰 크루즈가 이번엔 미식축구를 할 때 같은 동작을 취한다. 항공 점퍼와 오토바이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제작진이 참말로 영리하다고 느낀 부분은 전투기 F-14의 활용이다. F-14 톰캣은 그 자체로 탑건의 심벌이다. F-14 없는 탑건은 앙꼬 없는 찐빵과 진배없다. 제작진으로서는 무리를 해서라도 속편의 전면에 내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한데 F-14는 이미 미국 해군에서도 퇴역한 기종이다. 퇴역한 구식 전투기가 파일럿 매버릭의 신기와 같은 조종술로 최신예 적기를 전부 박살 낸다? 요즈음은 만화도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그런 F-14를 그럴듯한 명분으로 영화의 말미, 결정적인 순간 짧지만 임팩트 있게 등장시킨다. 객석에선 탄성이 터져 나온다. 더 치밀한 건, 영화 서두에 F-14와의 필연적 재회를 예고하는 복선을 은밀하게 장치했다는 점이다. 이 사람들 보통이 아니다.


탑건 속편의 장점을 논하려면 두툼한 논문으로 꾸미는 게 낫다. 배우 톰 크루즈의 위대함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탑건 매버릭>은 걸작이다. 탑건 세계관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목숨처럼 사랑하는 머리 좋은 이들이 모여 한 조각 한 조각 아귀가 딱 맞게 알맞은 재료와 부품으로 조립해낸 수준 높은 공작물이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 씨가 말한 ‘한줄평’이 와닿는다. "못 만든 예술품보다 잘 만든 공산품이 훨씬 낫다." 나는 그 얘기마저 비틀고 싶다. 예술가적 열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공산품은 이윽고 한정판 명품이 된다. 다시 만난 탑건은 그 경지에 있다. 탑승을 마치고 나면 머릿속 침전물을 말끔하게 날려 버릴 수 있게 해 준 제작진과 출연진에 경의를 표한다. 탑건이 줄거리가 없다고?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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