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on Jul 08. 2022

완벽한 휴가를 떠나는 방법

  그대가 꿈꾸는 완벽한 휴가는 무엇인가.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 잔 하는 것? 오랜만에 열린 록 페스티벌을 찾아 헤드뱅잉의 무아지경을 즐기는 것? 스페이스X를 타고 대기권 밖으로 날아가 점이 된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 어쩌다 오는 흔치 않은 기회, 어디서 무얼 하느냐가 왜 안 중요하겠냐만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벌써 마음이 벅차오른다.


  큰 전제는 ‘일하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는 것. 업을 찾아 헤매는 어떤 이에겐 무간지옥 같은 긴 휴식이 무엇보다 큰 고통이렷다. 과거의 내가 그랬고, 그래서 누구보다 그 사정을 잘 알기에 조심스럽다. 휴가? 배부른 소리 하네, 하실 수 있겠지만 곧 지금의 나처럼 오아시스 같은 그것을 갈구하시게 될 터이니 조금만 버텨주시라. 이 땅의 구직자들이여, 그대들의 휴업이 한가한 휴식일 수 없고, 철 모르는 하얀 손이 아니라 누구보다 분주함을 모르지 않으니. 우리 모두는 결국 노동자로서 일생을 채울 운명임도.


  그러므로 오늘만 사치스럽게 휴가 얘기 좀 해봅시다. 회사를 오래 다녔다. 두 번째 직장이다. 첫 회사보다 더 오래 다니네 싶더니 얼마 전 장기근속 휴가를 받았다. 연차휴가에 더해 보름 남짓 쓸 수 있는 휴무가 따로 주어진다. 얼마간의 휴가비도 부상으로 받는다. 돈보다 휴무 자체가 더 반갑다. 편집만 하지 않으면 피디 참 좋은 직업인데, 기사만 안 쓸 수 있으면 기자 퍽 괜찮은 직업인데. 업계의 재미없는 농담이다. 회사만 안 다니면 회사원은 무척이나 훌륭한 직업이다.


  아내는 준비성이 좋다. 그 덕에 나 같은 무지렁이도 산다. 우리 집 휴가 계획은 아내 손에서 모두 이루어진다. 교통편이며 숙박 예약, 식단까지 전적으로 아내에게 일임한다. 국내 여행 같으면 장롱 면허인 아내 몫까지 내가 운전만 전담하면 된다. 나의 장기휴가, 본인의 하계휴가, 딸아이 여름방학의 가장 맞춤한 교집합을 그려 여행 날짜를 정한다. 다음 달 중하순 언제로 잡을 거라고 설핏 들었다. 기간은 일주일 남짓. 해외여행도 알아봤는데 일찌감치 포기한 모양이다. 팬데믹 전보다 비행기 삯이 무려 두세 배로 뛰었단다. 그래도 남편 근속 기념 휴가인데 제주도쯤은 가줘야지, 하는데 이번엔 렌터카 비용이 문제인가 보다.


  지금까지 얘기 중에 내가 바라는 진정한 휴가는 없다. 아, 물론 가족과 함께 하는 단란한 한 때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라면 그곳이 우리 땅이든 남의 바다든 중요하지 않다. 분수에 맞게 먹고 자고 놀다 오면 그게 곧 행복이려니. 그런 나의 기대가 올해는 어디로 향하느냐. 미안하지만 아내가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는 그곳엔 있지 않다. 물론 거기에서도 즐겁겠지만 더 큰 즐거움, 진짜 홀리데이가 나를 기다린다.


  아내가 다음 달 중순쯤을 여행 출발일로 삼는다면 나는 회사에 그달 말까지를 근속휴가로 신청할 것이다. 앞서 한 주 가족여행을 다녀오면 나머지 일주일은 집에서 보낼 셈이다. 아내는 나처럼 휴가를 길게 쓰지 못한다. 출근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맞벌이를 감내해 주어서 정말이지 고맙소, 부인. 아이도 그때쯤이면 2학기 개학이다. 학교 끝나고 학원 보내기 전에 간식 내주어야 한다. 학원 마치고 돌아오면 저녁 먹일 시간이다. 그건 가까운 데 사시는 아이 할머니, 나의 친모께 도움을 청하려고 한다. 수고한 대가는 응당 갚아드릴 생각이다.


  그럼 뺀질뺀질 놀멘 놀멘, 남은 일주일 자유의 몸이 된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난 다 계획이 있다. 이제부터 들어보시라. 본가로 건너가 아침밥을 얻어먹는다. 엄마표 된장찌개를 한술 뜨며 조조 영화를 예매할 것이다. 앤데믹 무드에서 극장엔 화제작이 줄지어 개봉을 기다린다. 자칭 시네필의 한 사람으로서 영화 산업 발전을 위해 이제라도 다시 발 벗고 나서야 할 시점이다. 영화 보고 나오면 점심때다. 근처 식당가엔 오래된 맛집이 늘비하다. 하루는 냉면, 다음날은 막국수, 그다음 날은 돈가스. 오랜만에 방문해야 할 데가 너무너무 많다. 특히 아내와 데이트하던 시절부터 다니던 **면옥. 그 집 물냉면 맛볼 생각에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영화 한 편 봤고 점심 먹었고 오후에는 어디로 가느냐. 이제부터가 하이라이트다. 바로바로..! 만화방으로 간다. 두 시간 우선 끊어놓고 여차하면 연장하면 된다. 중고생들 번잡하지 않은 구석 자리 푹신한 소파를 베이스캠프로 삼을 것이다. 만화는 오랜만에 <슬램덩크> 1권부터 정주행도 좋고, 학원 스포츠 로맨스물의 기원 <H2>나 <터치>를 다시 봐도 괜찮겠다. <20세기 소년>의 명작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신간을 냈다고도 들었다. 제목이 <아사 이야기>라던가. 가만 내가 <진격의 거인>은 마지막 권까지 봤나. <원피스>는 아직도 연재 중이겠고? 명품 클래식 <드래곤볼>은 언제 봐도 페이지가 훅훅 넘어간다.


  그렇게 만화책 삼매경에 빠지다 보면 출출하고 입이 궁금해진다. 국물라면을 시킬까, 짜장라면을 시킬까. 컵라면도 있지만 만화방에선 주인장이 끓여주는 라면이 제격이다. 반찬은 김치와 단무지. 만화책 한 페이지 보고 라면 한 입 먹고. 중요 장면에 국물이 튀지 않게 조심할 것. 그것이 만화인 끼리의 예의다. 퇴식은 카운터로. 디저트는 뭘 먹을까. 왕소라로 손이 가는데 짱구도 대안이 될 것 같다. 단 것 싫으면 양파링이나 자갈치도 인정. 음료는 얼음 띄운 오렌지 주스로. 꼴에 몸 생각한다고 탄산은 피한다. 소파에 다이빙하듯 뛰어들며 덮어뒀던 데부터 다시 탐독. 과자 하나 와작 씹으면서 음료 한 모금에 에어컨 바람 빵빵.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이곳이야말로 이상향, 젖과 꿀이 흐르는 우리의 안식처, 진정한 낙원이지. 이런 게 바로 완벽한 휴가지.


  중요한 조건을 하나 빠뜨릴 뻔했다. 온전한 휴식은 사바세계와의 단절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한참 농구 명문 해남고와 격전을 치르다가, 외계 사령관 프리더 놈에게 에네르기파를 쏘다가 회사 국번으로 시작하는 핸드폰 전화를 받는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다른 휴가도 아니고 장기근속 휴가만큼은 날 좀 내버려 달라. 본부장님, 인접 팀장님들, 생때같은 팀원들아, 제발 날 찾지 말아 오.

매거진의 이전글 아저씨 셋이 반차휴가 내고 차박 캠핑하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